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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물레이션-96화 (97/379)

96화. 설계 (1)

어둠이 깔리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시각.

죽립을 쓴 중년인이 연홍색 빛이 가득한 홍등가 거리를 걷고 있었다.

빗줄기가 거세지면서, 인적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그 속에서 말없이 걷던 그는, 곧 한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죄다 부서진 창문들. 거기에 주변을 통제하는 사람들.

잠시 고개를 들어 가게의 현판을 확인한 그는, 이내 부서진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딴 데 가라. 여긴 못 들어가니까.”

때마침 험상궂은 왈패 하나가 목에 힘주며 말했다.

그 말에 죽립을 쓴 중년인이 걸음을 멈췄고, 조용히 그를 올려다보자.

“죽고 싶나?”

오히려 더 큰 경고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는 중년인의 시선에, 갑자기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 상가주님의 호위무사 아니십니까?”

왈패의 동료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중년인을 보자마자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예의를 갖췄다.

“아, 몰라뵜습니다.”

그제야 앞서 있던 왈패 역시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중년인은 그런 그에게 잠깐 시선을 두더니 입을 열었다.

“황야(黃夜)는?”

“2층에 계십니다. 빨리 데리고 오겠습니다.”

말이 끝나자 무섭게 사내가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위층에서 키 작은 노인 하나가 급히 내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오셨습니까!”

이름은 황야.

금만중이 주인으로 있는 금황상가(金皇商家)에서 정보요원을 맡고 있는 자였다.

이 근방에 중요한 소식들은 죄다 그를 통해서 흘러가곤 했다.

그러니 어둠에, 죽립을 쓴 상천장이라 해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안을 좀 들여다볼 수 있겠나?”

“물론이지요.”

그는 머리를 한 번 더 조아린 후, 주변의 무사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비켜서고, 여섯은 이곳 주위를 좀 밝혀라!”

“옙!”

“예옙!”

그의 말에, 입구 쪽에 서 있던 왈패들은 죄다 건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는 황촉불과 각등을 들고 나타났다.

가게 내부 안이 환하게 밝아지자, 상천장은 천천히 방 안을 돌아보았다.

바닥에는 시체와 유혈들로 낭자했다.

팔다리가 잘려나간 사람. 머리만 있는 자. 눈을 뜨고 죽은 자. 고꾸라진 자세에서 즉사한 자.

열 명이 넘는 무사들이 속절없이 당했다는 걸 보여주는 듯한 광경이었다.

‘대체 누가…….’

상천장의 걸음은 조금씩 더 느려졌다.

그렇게 수하들을 일별하며 중앙쯤에 도착했을 때.

무릎을 꿇은 채 주검이 된 수하 하나가 보였다.

‘철사후?!’

그는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싸운 건지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이건 전의를 상실했다는 뜻이다.

대체 어느 정도의 고수이기에, 이토록 압도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어?’

상천장은 철사후의 몸을 살폈다.

정확히는 가슴과 손, 특히 잘려나간 손목을 내려다보던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每花瞼]!’

이건 그가 모를 리가 없다.

강호에 활동하는 고수들이라면 손쉽게 알아볼 수 있는 살초의 방향과 움직임.

특히 살초의 방향, 검화(劍花)를 피워내는 곡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비단 철사후뿐만이 아니었다. 여기 쓰러진 녀석들 중 대다수가 그런 상처의 징후가 보였다.

“어찌 된 건가?”

상천장은 노인에게 물었다.

팔자주름이 드러나는 그는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듣기로 이 안에는 남녀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본 상가의 무사님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남녀라고?”

상천장을 눈을 가늘게 떴다.

추정컨대 자신의 수하들을 죽인 게, 홍등가에서 행패를 부린 자로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주검이 된 시체 한 구, 한 구를 꽤 오랜 시간 눈여겨봤다.

그렇게 한참을 보던 그에게 노인이 물었다.

“시체에서 추가로 뭔가 발견할 게 있습니까?”

“있지.”

그는 주저앉은 채로 죽은 철사후의 어깨를 가리며 말했다.

“변사한 시신의 상처를 검사하는 것을 검험(檢驗)이라고 하지. 여기 죽은 자의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부위를 양합박(兩哈膊). 상대의 검초는 이 잘려나간 부위의 절단면을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어. 시체를 불태우지 않는 한에서는 말이야.”

황야는 뭔가 비범한 그의 얘기에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허면, 어떤 무공을 썼는지 아십니까?”

“매화검법.”

“……업!”

노인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화산파를 대표하는 무공.

행패를 부린 자가 설마하니 그 유명한 구대문파의 사람이란 말인가.

“다만, 어느 쪽인지는 모른다.”

놀란 황야와 다르게 담담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상천장.

그는 시선을 옆으로 틀어, 무너진 창틀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다 부서지고, 찢겨나간 그곳을 보며 잠깐 전투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서 있던 그가 다시 노인에게 돌렸을 때는, 이전에 볼 수 없던 매우 강한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구명은 지금 어디에 있나?”

그리고 그의 첫마디는.

동업자로 알려진 구종명의 제자 이구명을 찾는 것이었다.

* * *

다음 날.

설휘는 하오문 분타주인 청년과 마주 앉아 있었다.

둘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저잣거리 내에 폐업한 가게 중 하나.

아이들이 장난을 치고 뒹굴며 놀 정도로 휴식처가 된 이곳에서, 설휘는 부서진 마루에 앉아 그에게 물었다.

“여긴 위험하진 않은가?”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 모르십니까? 그간 지내본 결과, 이렇게 사람이 붐비는 곳이 오히려 눈에 띄지 않더군요.”

사천 지역에 분포된 12개 분타주.

그중 성도 지역을 담당하는 유옥하(柔玉河)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 전 주변에서 놀던 아이 중 하나가 누구냐고 물어옴에도, 그는 태연스럽게 지나가는 과객이라는 한마디로 대꾸했다.

“앞으로 상천장은…… 어떻게 움직일 것 같나?”

“이제 곧 이구명과 만날 겁니다.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이 모두 죽었고, 주검에서 매화검법이 발견되었으니 그를 찾을 수밖에 없겠지요.”

“이구명을 의심할 수 있겠군.”

“가능성은 모두 열어두겠지만…… 오랜 협력관계에 있는 자를 그리 쉽게 의심하지는 않겠지요. 아마도 의심의 화살은 창룡문주 백양천에게 향할 겁니다.”

설휘는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런 판을 짤 수 있었던 건, 전생에 이구명을 죽여 매화검법을 얻은 덕택이기 때문이다.

해서 상천장의 분노가 창룡문주 백양천에게 향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럼 곧 손을 대지도 않고, 창룡문주를 제거할 수 있겠군.”

“그 정도로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상천장이 도발하지 않겠나?”

“창룡문주는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좀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확실한 방법이라. 하긴, 이번엔 백양천을 속일 차례지.”

“흠…….”

설휘는 잠시 고민을 하다 시선을 들었다. 그러고는 노는 아이들을 향해 방긋 웃는 유옥하에게 물었다.

“참, 이유를 알 수 없군.”

“뭐가 말입니까?”

“내가 누군지, 지금쯤은 파악했을 텐데.”

“은영단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런 나와 협력하는 게 어떤 뜻인지는 알 텐데 말이야.”

“뭐, 마교의 정치질에 관여하겠다는 거겠지요.”

“……?!”

설휘가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자, 청년은 방긋 웃었다.

본래 절세미남자라서 그런지, 남자가 봐도 훈훈할 정도로 멋진 웃음이었다.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마인들과의 싸움. 그들에 대한 적대감이 있는 곳. 정치에 관련된 일이겠지요.”

“그런데 왜? 본교 내부 사정을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나설 필요는 없지 않나?”

“당시에 그대는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 당연히 살려면 협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와서 날 걱정해주는 것도 좀 역겹긴 하군요.”

“…….”

설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다.

그의 생각을 물어본다는 게, 이제 보니 청년에겐 참으로 역겨워질 질문을 한 것이다.

그래서 잠시 입을 닫고 멍하니 장난치는 아이들을 잠시 보고 있었을 때.

유옥하가 물어왔다.

“하오문 소속 내에 분타주 평균 연령이 몇 살인 줄 아십니까?”

잠시 질문을 생각해본 설휘가 대답했다.

“최소 마흔은 넘겠지.”

“열아홉.”

“……뭐?”

“정확히는 열여덟에서 열아홉. 대부분 그쯤에서 죽지요.”

“…….”

잠깐, 말문이 막힌 설휘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번엔 그가 잠시 시선을 다른 곳에 둔 후, 말을 이었다.

“어릴수록, 경험이 많을수록 더 빨리 죽습니다. 나이가 많냐 적냐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지요. 하오문주가 일 년에 다섯 번 바뀐 적도 있었으니까요.”

거짓말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또한,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가장 만만하고 무력도 없는 밑바닥 인생.

누가 죽든, 어떤 술수에 걸려 죽든, 사실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필요가 없으면, 쓰임이 없으면 버려지는 곳이 바로 가장 밑바닥 인생이 모여 있는 하오문이다.

“그러니 아까 말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저 역시 조만간 곧 죽임을 당할 겁니다. 길에서 객사하든. 독주를 마시든. 어떤 식으로든 말이지요.”

유옥하는 이제 시선을 돌려 설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분타주 정도 되면, 언제 죽을지, 어디서 죽을지를 미리 정하곤 합니다. 전 그 상대를 당신으로 정한 것뿐이구요.”

“……?”

“이유를 굳이 말한다면, 왠지 흥미롭다고 할까.”

그 말에 이번엔 설휘 역시 그를 마주보았다.

어느새 청년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인이면서 화산의 무공을 익히고 있고. 마공을 익혔으면서 마성에 휩싸이지도 않았으며. 마교에서 나왔으면서, 첫 강호행을 하오문 소속을 구하는 일에 투자하지 않았습니까?”

“…….”

설휘는 그가 장난을 치고 있지 않음을 느꼈다.

단 한 번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번엔 제가 묻겠습니다.”

청년의 첫 질문에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몇 년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그냥 궁금해서요.”

앞으로 순탄치 않은 상황이, 삶이 펼쳐질 거라고 예감해서일까.

청년은 죽을 날짜를 묻고 있음에도 다시 웃음을 보였다.

“글쎄…….”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한, 나의 잘못으로 죽을 일은 없을 거다. 사전에 내가 다 예방을 해줄 거니까.”

“……어찌 그걸 확신하십니까?”

“확신이 아니고, 사실을 말하는 거야.”

“……?”

“난 남들보다 목숨이 몇 개 더 있거든.”

“…….”

잠깐의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은 생각보다 꽤 길게 느껴졌다.

분타주 유옥하는 그걸 진지하게 들은 건지 아닌지 몰라도.

“아, 그럼 다행이군요.”

꽤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외견상 보기에는.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할까요?”

자리에서 일어서는 유옥하.

그리고 그를 따라 시선이 움직이는 설휘.

유옥하는 턱짓을 하며 말했다.

“저기 보이시죠?”

때마침 대여섯의 남자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허리춤에 찬 검.

그리고 회색 도복.

설휘는 저 복장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사실, 복장이 아니라도 이미 상태창이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예. 창룡문도들입니다. 모두 창룡문주의 일선에서 호위하는 놈들이구요.”

설휘가 그를 바라보자, 그는 한쪽에 놓아둔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는데, 놀랍게도 상천장의 얼굴인 인피면구였다.

“이번에 백양천을 속일 차례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설휘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건 필요 없어.”

짧게 대답한 뒤 설휘가 단숨에 달려나갔기 때문이다.

이미 펼친 역용술로 인해, 설휘의 얼굴이 상천장으로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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