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설계 (3)
끼익. 끽.
역용술이 풀리자, 안면골(顔面骨)이 본래의 위치로 이동하며 강한 통증을 느꼈다.
이내 본인의 얼굴로 돌아온 설휘는 품속에서 복면을 꺼냈다.
그리고 그걸 쓴 뒤에야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조금 전, 상황은 생각보다 위험했다.
창룡문 무사 둘의 공격. 그중 광세웅의 공격은 자신이 펼친 빙원결갑에 미세하게 균열까지 냈다.
자칫 잘못했으면, 적의 칼날이 호신공을 뚫고 복부로 들어왔을지도 몰랐다.
“갑자기 치솟는 전투력이라니…….”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다.
싸움 중에 갑자기 전투력이 치솟다니.
이전에는 <+>라는 표식이 있어 나름 고려를 하고 전투에 임했지만, 이번엔 그런 것도 없었다.
“정도의 무공이라서 그런가.”
생각해보면,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매화검법 중에 나름 필살의 초식 몇 가지.
그것들은 단번에 무공을 익힌 자신과 달리, 오랫동안 수련해 심득이 녹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활용도도, 이해력도 자신이 이해한 것과는 다를 수밖에.
‘아직 내가 모르는 것이 더 많을지 모른다.’
설휘는 이들의 전투로 인해 생각의 범위가 넓어졌다.
예전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는 정보와 기연들.
여기에 숨겨진 것이 얼마나 더 있을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삶에 어디까지, 어떤 식으로 개입할 건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시스템에 잡아먹히지 말란 말이다.”
문득 AI설휘의 외침이 떠오른다.
그가 한 경고.
달리 말하면, 자신에게 펼쳐진 기연들을 오로지 선(善)으로만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말일 것이다.
“어쨌든, 이제 목표는…….”
설휘는 생각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돌렸다.
다음 적은, 무사수행 중 제일 까다로운 이구명.
그를 죽이는 것이다.
그럼 상천장은 어쩌냐고?
그는 굳이 자신이 손을 쓸 필요 없다.
여기 남겨진 혈수마공의 흔적.
수하들의 시체를 본 창룡문주가 알아서 그를 제거하려 들 테니까.
* * *
조용한 밀실.
그곳에서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외견상 한 명의 표정은 심각했고, 한 명은 되레 불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굳이 이런 식의 만남은 피하자고 내 누누이 얘기했을 텐데.”
평범한 인상. 부드러운 눈빛과 달리 목소리는 꽤 거칠었다.
이구명.
구종명의 셋째 제자로, 갑작스런 상천장의 호출에 이곳을 급히 찾은 그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불러서 미안하지만,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말이오.”
큰 사고가 발생해 부른 줄 알았더니,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한다.
인상을 쓰는 이구명을 보며 상천장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내 수하들이 죽었소. 나를 따르는 녀석들 전부.”
“그래서?”
“사인에 대해서 검안을 해봤소. 그랬더니, 수하들의 몸에서 특이한 검초가 나왔소.”
“그게 뭐길래?”
“매화검법.”
“……!”
이때, 이구명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놀람과 의외라는 감정이 한데 뒤섞인 눈빛.
이구명은 그제야 상천장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아챘다.
화산파 검법으로 죽였다면 창룡문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는 것.
다만, 한 번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쪽에 그런 고수가 있었나? 창룡문주 말고는 눈에 띄는 절정고수가……”
“그래서 그대에게 물으려 한 거요. 그대만큼 매화검법에 대해 잘 아는 자가 없지 않소.”
상천장의 말에 잠시 그를 응시하는 이구명.
그러고는 잠깐 침묵하더니,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웃어댔다.
“크크큭. 크크크큭.”
“……?”
과하게 웃어대자 상천장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웃음을 멈출 때쯤에야 다시금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에 반해, 이구명의 표정은 입꼬리가 치솟듯 올라가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의심된다는 거냐?”
그는 곧장 이빨을 드러냈다.
부드러운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하는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그럴 리가. 정말 오해 마시오. 난 그저 혹시 그대가 아는 게 있을까 싶어서 부른 거요.”
상천장이 고개를 저었지만, 이구명의 눈빛엔 여전히 살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곧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수하들까지 모두 잃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
“그런데 말이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최근엔 밖을 나돌아 다니지도 않았고, 나의 사형들 역시 이 지역에서 활동하지도 않았고…….”
“그런 거요.”
“그래,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기면, 하오문에게 물어보는 게 맞지 않나? 그놈들이 이런 거 알아보는데 전문가들이니.”
“그건, 그렇소. 그래도 화산검법을 쓰는 자들은 그대가 잘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잘 알고 있지.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이고.”
“이구명. 난…….”
“상천장.”
드르륵.
이구명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매섭게 뜬 눈으로 상천장 쪽을 응시했다.
“충고 하나 하겠는데, 문제가 생기면 좀 혼자서 처리해줄 수 있겠나? 쉬는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말고 말이야.”
“그건…….”
“그리고.”
그는 한 손으로 상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주제를 알게. 애초에 네가 날 부를 자격은 없지 않나?”
급격히 얼굴이 굳어지는 상천장.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이구명은 상천장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뭐든 적당히 해야 하는 거야. 주제넘게 선 넘다가는, 너도 네 수하처럼 될 수 있다고.”
“…….”
상천장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입술을 깨물 뿐.
그런 그의 정수리를 가볍게 툭툭 치며, 이구명은 뒤돌아섰다.
상천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의 뒤를 향했지만, 뭐라고 항변하거나 반박하지는 못했다.
무공이든, 입지든, 정치적이든.
상대에게 대항할 수 있을 만한 게 그에게는 없었으니까.
* * *
“건방진…….”
밀실에서 나온 이구명이 읊조리듯 말했다.
괜스레 짜증이 났다.
공적인 일로 적당히 몇 번 어울려줬더니, 오늘은 자신의 개인적인 일로 부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이래서는 같이 일 못 해. 아무래도 사부께 이 일을 의논해봐야겠어.”
그는 상천장과 일할 마음이 사라졌다.
손발을 맞춰야 할 녀석이 저리 칠칠찮아서야, 무슨 일을 같이 도모할 수 있겠는가.
고작 창룡문에게 당할 정도면, 대체 수하들의 수준이 얼마나 떨어진다는 얘기인가.
“……말씀드리면, 좀 더 강한 녀석을 붙여주시겠지.”
그렇게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걸어가는 이구명 앞에, 뭔가 이상한 그림이 턱 하고 보였다.
자신이 걸어가던 길 옆, 죽립을 쓴 사내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던 것이다.
“……너, 누구냐?”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딜 보고 있는 지 알 수 없는 죽립.
가슴에 품고 있는 검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던 것이다.
“누구냐고.”
그의 두 번째 경고.
스윽.
그러자 사내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제대로 세웠다. 그러고는 죽립을 슬쩍 드는 행위와 함께 입을 열었다.
“이구명. 구종명의 제자. 몇째 제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천장과 함께 손발을 맞춘다고 알려졌지.”
“……!”
“마교에서 인물이 오면, 상천장과 힘을 모아 처리하기로 약속되어 있지. 대가는 창룡문을 넘겨받는 것.”
그 말에 이구명의 표정이 묘하게 밝아졌다.
그는 허리춤에 걸려 있는 자신의 검을 보고는, 씨익 웃어보였다.
“뭔가 오늘 운수가 이상한가. 날파리들이 자꾸 꼬이는군.”
그는 검지로 자신의 귀를 후비더니 곧 씨익 웃었다.
파-----앗.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였다.
전광석화처럼 곧장 자리를 박차며, 죽립을 쓴 사내에게 매섭게 일 검을 찔러 넣었다.
쩌어어엉!
죽립의 사내가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이구명이 짧게 웃었다.
“너구나.”
“……?”
“상천장 수하들을 죽인 거.”
죽립의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촤악. 촤아악!
다시금 쏘아진 이구명의 검술.
처음엔 한달음에 거리를 좁혀버린 그의 신법이 놀라웠다면, 이번엔 검술이었다.
검의 빠르기가 빛이 아른거릴 만큼 너무도 빨랐다.
그런데.
‘이걸 막았어?’
다섯 번이 넘는 쾌검술을, 상대는 완벽하게 방어해냈다.
그리고 어느새 조금 거리가 벌어진 이구명과 죽립 사내.
“맞아.”
툭.
때마침 사내는, 죽립을 벗어던지며 그에게 화답했다.
“그게 나야.”
* * *
이구명(李球明) [구종명 제자]
신체 정상
체력 440만/440만
내공 450만/450만
전투력 1200만
이구명의 정보창.
그 안에 담긴 전투력에 대한 정보.
‘전투력 증가.’
하지만, 설휘의 머릿속엔 오직 그것 하나만 들어 있었다.
무사수행을 끝내고 본교로 돌아가는 순간, 더 큰 위기가 닥칠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전투력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다면.
적어도, 어떤 경우에 이렇게 오르고 내릴 수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전투방식 <시뮬레이션제 Lv2>
<설휘 님의 무공 개수를 분석합니다.>
<설휘 님의 무공초식을 분석합니다.>
……
<분석 완료>
그래서 극단적일지라도 이 방법을 선택했다.
적의 능력을 적극 발휘하게 한다면.
전투력이 증가하는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어떤 시뮬레이션을 돌려드릴까요?>
시뮬레이션이 묻자 설휘가 대답했다.
“상대의 전투력을 올릴 수 있게 만들어줘!”
위험부담이 큰 건 안다.
그러나 지금.
이구명을 통해 알아내지 못하면, 앞으로 더더욱 찾아내기 힘들 것이다.
촤아아아아-
눈앞을 가득 메우는 환영.
하지만 이번엔 적을 쓰러트리는 게 아닌, 적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들기 위한 그림자들이다.
잠깐 동안 수백으로 변한 환영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하나의 환영만 남겨졌다.
‘이거, 상당히 위험해지겠는데?’
그가 펼쳐내는 움직임들.
뒤로 물러서며 펼치는 서너 번의 방어. 그리고 공격이 끝이었다.
헌데, 놀랍게도 한 번의 공격에는 다른 무공도 아닌 매화검법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쨌든, 해보자.’
설휘는 검을 사선으로 쥐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에 기다렸다는 듯, 이구명이 달려들었다.
쉬익!
한 번의 찌르기.
쇄애애액!
대여섯 번의 베기에 따른 검초들.
‘지금!’
설휘는 시뮬레이션이 향하는 움직임을 따라, 제 3초식 매화검법을 펼쳤다.
촤아아아악!
맹렬한 베기와 찌르기가 혼용되어 쏘아지자, 이구명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 초식이 무엇인지 곧장 깨달은 것이다.
그러자 이구명은 맞받아치는 것보다 회피로 대응했다.
그리고 설휘의 초식이 끝나는 지점에.
“하앗!”
이번엔 그가 매화검법을 펼쳤다.
전투력 1540만(↑340만)
‘변했어!’
설휘는 보았다.
맹렬히 자신을 쫓는 매화검수를, 올라간 전투력을.
더욱이 그 초식을 보니, 자신이 방금 펼친 매화검법 제3초식과 완벽하게 닮아있지 않았다.
‘피할 수 있을까?’
동시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머릿속에 수많은 무공을 떠올려봤지만, 상대의 검법을 막을 비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투방식 <턴제>
눈앞에 쏘아지는 칼이 멈췄다.
턴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경고! 이구명이 ‘설휘’ 님의 빈틈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당연하게도 뜨는 경고창.
이렇게 된 거, 설휘는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최근에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분명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지문을.
<‘도망친다.’를 선택하셨습니다.>
진행되자마자, 설휘의 몸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패애액!
가장 우려스러웠던 상대의 첫 공격을 피해냈고, 추가로 검을 세우며 두 번째 공격까지 방어해냈으며.
패애애액!
강력한 검기는 몸을 비틀어 대응했다.
츠팟----!
맹렬한 검기와 함께 설휘의 몸은 3장이나 밀려났다.
그렇게 잠시 정적이 일고.
투툭.
설휘는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어깻죽지를 부여잡았다.
검기가 통과한 것이다.
“크크큭.”
이구명은 웃었다.
자신의 공격이 통했으니까.
나름 잘 막아냈지만, 마지막 절초까지 방어해내지는 못한 상대에 대한 비웃음.
“알아냈다.”
그런데, 상대의 반응이 이상했다.
오히려 자신을 향해 밝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전투력 증가. 그건 무공에 대한, 수많은 실전감각. 즉, 깨달음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