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전투력 증가 (2) < 둔산 >
“컥, 커어어…….”
이구명은 땅을 밟자마자 무릎을 꿇으며 꼬꾸라졌다. 칼날이 박혔다 빠진 복부 주변에는 선혈이 가득했다.
그 상태로 잠깐 정신을 잃었고, 다시 깨어난 그는 입을 열었다.
“사, 살려주시게…….”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부탁.
이구명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상대의 검이 자신의 복부 아래. 급소를 아슬하게 피해 관통되었다고.
지금 응급처치를 한다면, 충분히 살 수 있는 부상이라고 말이다.
“자넨 나와 은원관계가 없지 않나. 그런데 왜 처음 보는 날 죽이려고 드는 건가…….”
상대는 말이 없었다.
이구명은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때쯤 냉담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사내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 빌어봐.”
“……?”
“개처럼 빌어보란 말이지. 혹시 아나? 네 말대로 정말 내가 살려줄지.”
그 말에 멍하니 바라보던 이구명은 이내 머리를 바닥에 강하게 처박았다.
퍽! 퍽!
이마가 찢어지고 피가 튀는 가운데서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시면 정말 조용히 살겠습니다. 절대로 힘을 과시하거나 나대지 않겠습니다. 제발…… 제발…….”
그러고는 재차 두 손을 한데 모았다.
“부디 목숨만은…… 조용히 살아가겠습니다.”
설휘는 두 손을 싹싹 비비는 이구명을 냉담히 바라봤다.
격세지감이다.
전생에서는 그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현생에서는 이렇게 처절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어떤 준비를 했느냐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졌느냐?
전혀 아니다.
그의 행동에서 보듯, 앞으로 자신에게 또 이런 일이 발생할 거라는 불쾌감이 같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설휘는 그와 시선을 맞췄다.
“넌, 참. 신기한 녀석이야.”
“아…….”
표정에서 생기가 살아나는 이구명.
갑자기 나긋해진 상대의 목소리에 뭔가 희망을 발견한 얼굴이었다.
“이토록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녀석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하하……. 제가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지.”
설휘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조금 더 접근해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근데 그거 알아? 넌 원래 살아선 안 될 새끼였어. 전생에서 내 수하들을 아주 잔인하게 도륙했었거든.”
“……예? 수하?”
“그래서 더더욱 용서할 수 없어. 강한 자에게만 굴종하는 네 모습을 보니.”
“무슨 말씀이…….”
콱!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눈알이 붉게 충혈된 이구명.
상대의 칼이 자신의 복부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엔 정확한 급소였다.
“내 수하들에게 약속했다. 다시 태어나면, 반드시 널 죽여줄 거라고. 그러니…….”
콰악!
검신을 복부 끝까지 밀어 넣자, 이구명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옴짝달싹할 뿐.
“조용히 가라.”
설휘의 한 줄기 음성과 함께, 이구명의 몸이 무너졌다.
이번엔 의심의 여지없이 절명한 것이다.
스윽.
그렇게 그를 내려다보던 설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부서지고 땅이 꺼진 싸움의 흔적들.
그리고 눈앞에 죽어있는 이구명을 보며 그와의 싸움을 복기했다.
‘이구명은 매화검술을 제대로 펼치지도 않았다.’
그 점에서는 운이 좋았다.
이구명과 평범하게 무공 대결을 펼쳤다면, 이 싸움은 더 위험했을 것이다.
물론 기연의 도움을 받은 자신이 어떻게든 이겼을 테지만 그렇다고 적의 매서움이 사라지진 않는다.
‘기연에 의존해서는 안 돼.’
설휘는 잘 알고 있었다.
이 같은 기연이 계속해서 자신을 구해내지는 못한다고.
강한 적들과 싸우면 싸울수록, 오히려 이런 조건이 자신의 성장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사실 이구명의 전투력 증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지만, 시뮬레이션제를 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서 가장 성장이 빠르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이번 기연은 상당한 도움이 됐어.’
설휘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능력을 확인했다.
자신을 구원해준 특성 기술표를 바라보았다.
◆ 화온마공 특성 기술표 ◆
[기 모으기] : ABCD (힘주기)
힘주기.
처음엔 저것이 의미하는 것을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오른손과 왼손, 왼발과 오른발에 힘을 한 번 줘봤다.
그 순간 정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바닥에 가깝게 소실되었던 내공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나아지는 게 아니라, 대폭으로…….
그래서 강력한 내공을 펼쳐 이구명을 처리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해볼까?’
설휘는 두 발을 벌리고 집중했다.
그리고 팔과 다리에 힘을 주자 즉각 반응이 왔다.
고오오오-.
[내공이 증가합니다.]
내공 10만(↑5만)/240만
내공 15만(↑5만)/240만
내공 20만(↑5만)/240만
……
……
계속 오른다.
전투 때보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게 되자, 더욱 빠르고 큰 폭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와…….”
설휘는 크게 놀라며 자신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내공 120만/240만
삽시간에 내공이 반 이상이 찼다.
아쉬운 건, 여기서 더 이상은 오르지 않는다는 것.
아니, 오르긴 올라도 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추측건대, 이건 화온마공의 숙련도가 초급이라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뭐, 상관없지.”
설휘는 이제 시선을 올려, 자신의 능력 중 전투력 수치를 확인했다.
전투력 1001만(↑202만)
천만 이상.
거기다 기를 모을 수 있는 특수한 능력까지 얻었다.
이 정도라면, 웬만한 고수들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마지막 남은 녀석, 상천장을 보러 가볼까.”
마지막 남은 조각 하나를 위해, 설휘는 빠르게 발길을 돌렸다.
* * *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간.
금황상단 본부. 금만중 집무실 앞은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서른 명의 창룡문주 무사들로 인해 완벽히 제압당한 것이다.
설마하니 정파 무사들이 이런 기습을 하리라 생각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물론, 금만중 최측근 호위무사.
상천장이 데리고 온 고수들이 모두 제압당한 상황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헉!”
“크윽!”
하지만 집무실이 제압당한 와중에도, 상천장의 저항은 거셌다.
기습해온 서너 명의 창룡문 무사들을 손쉽게 쓰러트리며 무위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의 활약은 딱 거기까지였다.
체구가 큰 검은 복면인과 싸우자마자, 오히려 밀린 건 그였으니까.
“크헉!”
상대와 수십 합을 겨룬 뒤, 결국 상천장은 상대의 칼을 막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가 쓰러지자, 검은 복면을 하고 있는 자가 입을 열었다.
“감히 우리들을 농락하다니.”
그는 백양천이었다.
가장 경계가 취약한 시간을 노려, 금만중이 머물러 있는 집무실만을 급습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수하들을 죽인 것으로 파악되는 호위무사.
상천장을 제압한 것이고.
“이런 식으로 하면, 네놈도 무사할 줄 아느냐…….”
주저앉은 채로 상대를 노려보는 상천장.
그는 자신을 건드린 행동이 얼마나 큰 사태를 불러올지 경고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백양천은 코웃음 쳤다.
“마교놈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
그 말에 상천장의 눈이 커졌다.
그걸 알고도 자신을 노린 것을 쉽게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어차피 넌 머지않아 우리들 손에 죽을 인물이었다. 맹에서 마교놈을 보면 절대 가만히 놓아두지 않거든. 그저 내가 그 시기를 조율하느라 네가 살 수 있었을 뿐이다.”
“…….”
“그리고 보복? 그건 불가능해. 정파와 전면전을 선언할 생각이 없는 이상, 마교놈들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을 테니까. 네 죽음은 그저 사고사로 처리될 뿐.”
‘이놈, 마교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
상천장은 백양천의 말에 내심 크게 놀랐다.
본래 전국 암암리 숨어 있는 마교인들.
정파 녀석들은 표면적으로 마도 척결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 행동으로는 옮기고 있지 않다.
그건 마교가 중원침략의 야욕을 아직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걸 자신뿐만 아니라, 백양천이란 자도 알고 있다는 것.
거기서 상천장은 재빨리 변명을 바꾸기로 했다.
“그, 그거…… 네놈들이 착각한 거다.”
“뭐?”
“네 수하를 죽인 건 내가 한…….”
“누구냐!”
“멈…… 커억!”
그때였다.
그가 말을 전부 뱉기도 전에,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 소리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고.
끼이이익.
곧 문이 열리며, 죽립을 쓴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서 건넨 한 마디.
“정신없군. 사람들도 많고.”
그 순간.
“멈춰!”
입구 앞에 있던 대여섯의 무사들이 곧장 달려들 태세를 취하자, 백양천이 일갈했다.
‘이놈, 고수다!’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건.
입구 앞에 있던 십여 명의 무사들을 모두 제압했다는 것.
“음…….”
그사이 낯선 이, 설휘는 집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벽 구석에 몸을 낮춘 채 벌벌 떨고 있는 금만중이 보였고, 복면을 쓰긴 했다지만 척 봐도 백양천으로 보이는 무사도 보였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놈.
상천장이란 걸 설휘는 너무도 잘 알았다.
“너는 누구냐?”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입을 연 건 백양천이었다.
설휘는 느긋한 동작으로 그를 한 번 보고는 씨익 웃었다.
“침입자인 네놈들이 물을 건 아닌 것 같은데?”
“……뭐?”
당황한 얼굴의 백양천.
설휘는 자연스럽게 상천장 쪽으로 걸어갔다.
“넌, 설마…….”
가만히 설휘를 올려다보던 상천장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직감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마공을 쓰는 자.
자신이 그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상천장은 자신에게 다가온 설휘를 보며 물었다.
“날 구해주려고 온 건가?”
“비슷해.”
그렇게 그의 앞까지 다가간 설휘.
그 모습에 상천장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참고로 저 녀석들은 창룡문이다. 이 야밤에 비열하게 기습했지.”
“그래?”
“그렇다.”
“…….”
“…….”
그렇게.
“왜, 또 물을 게 있나?”
상대가 자신을 너무 빤히 바라본다고 느껴서일까.
상천장이 물었다.
“없지.”
사내는 짧게 대답하고는 자신 앞으로 다가오더니 들고 있던 검을 슬쩍 올렸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상천장.
“크헉!”
이내 비명과 함께 상천장의 목이 바닥을 굴러 백양천 앞으로 떨어졌다.
“……!”
“……!”
“……!”
지켜보던 창룡문 무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황당함에 물든 그들을 향해 설휘는 담담히 말했다.
“가져가라.”
“뭐?”
“이 녀석 목을 가지러 온 거 아닌가.”
그 말에 백양천은 멍하니 뜬 눈으로 입을 닫았다.
낯선 사내의 의도가 무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달에 금 사백 냥을 달라고 했지?”
“…….”
“이백 냥. 그 정도로 이 사건은 매듭짓지.”
설휘의 말에 백양천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제야 그의 신분이 대충 짐작이 간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너도 이자와 한패인가?”
“지금 그게 중요한가?”
“물론이다. 내겐 아주 중요한 문제다.”
백양천은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상천장은 마교의 인물이었다.
눈앞의 인물 역시 마교의 인물이라면,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잠깐 동안 침묵하던 설휘가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한다면. 믿어줄 텐가?”
“……증명할 게 있는가?”
“있지.”
“뭔가?”
“살인멸구.”
“……!”
그 말에 백양천의 눈이 커졌다.
여차하면, 여기 자신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것이다.
이는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이자는 자신들이 모두 덤벼도 이길 수 없을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이봐. 그리 심각할 필요가 있을까?”
잠시 얼어있던 백양천에게, 설휘가 이번엔 먼저 말을 건넸다.
“무슨 말이냐?”
“세상엔 적이 많아. 여기가 아니더라도 간자들은 곳곳에 숨어 있다. 나를 노릴 놈들도. 그리고 너도 그렇고.”
“……!”
순간, 뭔가 충격을 받은 백양천.
검을 들고 있던 그의 손이 잔잔히 떨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넌, 대체 누구…….”
그리고 의미하게 흘리는 목소리.
설휘가 별다른 대답 없이 있자, 한참을 바라보던 백양천은 이내 수하들을 향해 말했다.
놀랍게도 그건.
“돌아간다.”
철수 명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