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본 스토리 (1)
[은영단 내 곤마의 집무실.]
거친 필체의 글귀가 진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곧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청년이 설휘의 시야에 담겼다.
바로 곤마였다.
둘러보니 맞은편의 노인도 눈에 들어왔다. 특이한 것은 목 아래까지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백발에 흰 눈썹. 거기다 새하얀 의복.
눈길을 끌다 못해 신비한 느낌을 주는 노인이었다.
‘녹정관 장로?!’
설휘는 노인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본교 서열 100위 안에 드는 노고수.
설휘로서는 그저 먼발치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인물이다.
곤마를 지지하며 그의 참모 노릇을 하는 사람인데, 무슨 일인지 곤마를 마주본 채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주군, 마태룡(馬泰龍)이 실종됐습니다.”
녹 장로의 말에 시선을 들어 보이는 곤마.
상대를 응시하는 눈빛이 미묘하게 떨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미간에 주름이 조금 생겨났다.
흑창마혼(黑槍魔魂) 마태룡.
그는 곤마 휘하 ‘전력의 핵심’이라 불리는 칠사자(七使者) 중 한 명이었다.
이전에 태황각주의 뒤를 밟으라고 명령한 지 두 달째 되는 날.
갑작스럽게 실종이 되어버린 것이다.
“녹 장로. 누가 손을 썼을까요? 태황각주로는 그를 제압하기 어려웠을 텐데 말입니다.”
“음.”
녹 장로는 근심에 잠겼다.
마태룡은 실력만이 아니라 곤마에 대한 충성 또한 높았다. 그런 그의 실종은 주군인 곤마에겐 생살을 도려내는 고통일 터였다.
짧은 침음 뒤, 녹 장로가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추측하기에는 아무래도 화산파에서 나선 듯합니다.”
“……화산이요?”
“예. 그간 마태룡은 태황각주뿐 아니라, 황가산 주변을 수색하지 않았습니까. 그 일대에 화산파 비밀지부가 있다고 했으니, 거기서 문제가 발생한 듯싶습니다.”
“음.”
곤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태황각주를 감시한 지 두 달이 되는 기간 동안, 칠사자들은 많은 정보를 물어다왔다.
그중 마태룡은 거기서 더 나아가, 내통하고 있는 화산파 무사들을 쫓거나 염탐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주군.”
녹 장로의 부름에 곤마는 다시 시선을 올렸다.
“예. 녹 장로.”
“마태룡의 생사는 중요한 일이나, 아무래도 이번 일은 여기서 손을 떼는 게 좋을 듯합니다.”
꿈틀.
곤마의 눈썹이 요동쳤다.
“여기까지 와놓고서……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주군. 이 녹 모도 압니다. 태황각주와 화산파가 내통한 이유. 그 전모들이 이제야 밝혀지고 있다는 것을요. 하지만 이 이상은 위험합니다.”
녹 장로는 한 번 뜸을 들이곤 나직이 말을 이었다.
“마태룡은 극마를 눈앞에 둔 초고수. 그가 실종되었다면…… 분명 화산에서도 거물급 인사가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되면 태황각주 귀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그랬다면, 곧장 이곳으로 쳐들어왔겠지요.”
“……!”
곤마의 말에 녹 장로는 대답하지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니까.
첫째 제자 살마.
이 일을 설계한 주동자이며, 곤마에겐 아득할 정도로 버거운 상대.
넷째 제자인 곤마가 자신의 뒤를 밟았다고 생각하면, 여길 쳐들어오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후우우.”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곤마는 크게 한 숨을 내쉬며 정적을 깼다.
“녹 장로.”
“……예. 주군.”
“저는 장로가 무얼 우려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제 행동이 아주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지요. 대사형이 정파와 내통한다는 사실을 입 밖에 꺼내게 되면, 그 길로 제 목숨은 온전치 못하겠지요.”
“…….”
“하지만, 저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사형들의 알력다툼에 낀 채로 눈치 보고 살아가야 합니까? 아무런 저항도 못 한 채. 그저 저들의 패권싸움을 지켜보며 운이 좋기를, 그들이 자비를 내려주기만을 바라야만 합니까.”
곤마의 눈빛은 어느새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지금의 그는 평소와 달리, 형용할 수 없는 짙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화산은 대사형에게 돈과 무기를 넘기고, 대사형은 화산파 제자들에게 본교의 사람들을 헌납함으로써 그들에게 실전 경험을 쌓게 하고 있습니다.”
“음.”
“이는 본교의 사람으로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저는 화산파에 있는 물자들이 본교로 넘어오는 것을 증거로 잡아, 간계를 꾸밀 것입니다.”
“간계라면…….”
“둘째 사형. 마후를 이용해야겠지요.”
“……!”
그 순간 녹 장로의 눈이 커졌다.
이이제이. 나쁘지 않은 계책이었다. 아니, 훌륭한 계책일 수 있었다.
현재 본교의 힘의 균형이 살마와 마후로 양립되는 상황. 이런 상황에 마후에게 정보를 흘려, 서로 싸우게 만드는 이간계라면 성공할 확률이 높을 터.
물론 여기선 거짓말이 아닌 이간계겠지만.
“주군.”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생각을 정리한 녹 장로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지요.”
“우선 추적에 능한 자들을 선별하시지요. 황가산에 분명 예의 그 물자들이 있을 터. 민첩하고 상황 판단이 빠른 자들이 필요합니다.”
“마침 준비해 놓은 자들이 있습니다.”
“은영단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를 위해 철군성(鐵軍城)을 붙이시지요.”
“아.”
그 이름을 듣자 곤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철군성.
극마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자로, 곤마의 휘하에 있는 수하들 중 제일 무위가 뛰어난 자였다.
“이번 일은 절대 실패하면 안 되는 일이기에. 만에 하나, 적에게 생포되었을 경우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 말에 곤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건 그 역시 동의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문밖에 있는 이들에게 외쳤다.
“사령대장을 불러 오너라!”
바로 그때쯤이었다.
그의 외침과 함께 설휘의 시야는 다시금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앞에 글귀가 나타났다.
<본 스토리에 앞서, 참고사항을 알려드립니다.>
첫째, 새로운 전투방식 ‘자유제’가 도입됩니다. 평시에는 자유제로 고정됩니다.
둘째, 자유제가 아닌 다른 전투방식을 선택했을 시 일각(一刻)의 시간이 지나면 효과가 사라집니다.(재사용을 하기 위해선 반나절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니 최대한 서두르세요.
셋째, 이제부터 설휘 님은 거처로 돌아간다고 해도 저장하실 수 없습니다. 군데군데 저장할 지점이 있으니 잘 찾아보세요.
그리고 활자들이 천천히 사라지며.
<본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문 앞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설휘는 안으로 들어섰다.
방에는 뒷짐을 쥔 채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곤마가 보였다.
‘녹 장로는 없네?’
신기한 일이다.
조금 전까지 저 옆에 앉아 있었는데 말이다.
‘하긴, 곤마가 나를 부르자마자 여기에 도착했으니.’
생각해보면 시간의 흐름상 이런 상황이 더 자연스러웠다.
“왔느냐. 자리에 앉거라.”
곤마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자연스럽게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식사는 했느냐?”
“뭐, 간단히 챙겨먹고 왔습니다.”
“그래?”
살짝 미소를 짓는 곤마.
“네 소식은 간간이 전해 들었다. 실력이 일취월장했다지? 수하들도 잘 따른다고 그러더군.”
“다 곤마 님의 은덕입니다. 그간 보살펴 주신 은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 역시 고맙구나.”
몇 마디 말을 하는 동안, 설휘는 속으로 고민했다.
‘임무를 받는 게 맞을까?’
죽을 수 있을 정도의 위험한 임무다.
자칫 잘못하다간 어떤 걸 해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 있다.
그걸 각오해야 하는 임무였다.
‘강해지려면…….’
그럼에도 설휘는 이 임무를 받고 싶었다.
화산파.
자신에게 모욕을 주고, 과거의 수하들을 죽였던.
그놈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속에서 뭔가 끌어 올랐기 때문이다.
“이번에 너에게 시킬 일이 있다만…….”
그래서 곤마가 입을 열자마자 설휘는 곧장 머리를 숙였다.
“무엇이든 하명하십시오.”
“허. 위험한 임무다. 혹, 자신이 없다면 빠져도 좋다.”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강해지기 위해 수련해왔습니다. 명을 내려주시면 반드시 해내보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고맙구나.”
곤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는 잠시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내 휘하에 있는 수하 하나가 실종되었다. 말 그대로 생사불명. 죽었는지, 아님 포로로 잡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어찌된 상황인지 살펴보고 오너라.”
“어디로 가면 됩니까?”
“너도 봐서 알 것이다. 황가산이다.”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진 그도 모두 아는 내용이었다.
“혹 적이 있다 해도 가급적 싸움을 피해라. 이번 일의 목적은 상대를 살펴만 보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설휘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든 그는.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뭘 말이냐?”
그간 궁금했던 걸 묻기로 했다.
“예전에 자용초를 건네드리고 받은 이 검 말입니다.”
설휘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보고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너에게 주었지. 헌데 왜?”
“굉장히 귀한 검 아닙니까?”
“귀한 검……. 맞지.”
“헌데 이 귀한 걸 제게 왜 주신 것인지.”
설휘의 애매한 물음에, 곤마는 뭔가 알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무슨 저의가 있어서 줬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단지…….”
“설휘야.”
순간 설휘는 흠칫했다.
곤마가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부를지 몰랐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느냐?”
“……예?”
“그러니까 내 체질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느냔 말이다.”
순간, 설휘는 교육관주 적파가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 혹 천살성(天殺星)이라고 아느냐?
천살성. 그 의미를 되새기며 생각에 잠기자, 곤마가 피식 웃어보였다.
“반응을 보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구나. 뭐, 그리 숨긴 적도 없긴 하지. 맞다. 천살성이다.”
“…….”
“그럼 다시 물으마. 너는 천살성을 지닌 자에게 귀한 무기가 필요하다 보느냐?”
“아…….”
설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마성에 이기지 못해 언젠가 폭주하는 자.
그때의 천살성은 극한의 무위로 그 누구든 죽일 수 있다고 전해졌다.
그러니 딱히 보검도, 신병이기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시에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지면 주변인들이 경계심을 가져 방해가 될 뿐이란 걸.
“언제쯤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설휘는 머쓱하게 화제를 돌렸다.
왠지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
설휘가 바라보자, 곤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출발하거라.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