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108화 (109/379)

108화. 초반 보스 (2)

저장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다지 특별한 게 아니었다.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8년, 1월 마지막 주, 무사수행 완료(금만중의 신뢰)

□ 천력 95년, 제3장-8. [핵심무사 성공] 폭풍성장기(Bonus Story) 1년 차

평소 잠이 들 때 꾸준히 저장해 온 저장 목록 ‘두 번째’ 항목.

그때의 시간과 임무를 받고 이곳에 오기까지의 시간적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는 것.

여기서 재수 없게 죽는다고 하더라도 설휘는 충분히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좀 더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대비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저장을 안 한 가장 큰 이유는.

‘하필 턴제와 시뮬레이션을 다 써버린 상황이구나…….’

전투방식의 능력 중 AI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저장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공격이냐. 아님 후퇴냐.’

설휘는 말을 건넨 녀석의 위치를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눈앞의 책장을 기준으로 네 번째 책장.

거기서 우측이었다.

셋째와 넷째 칸 책장 틈으로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모험을 할 것이냐.

아니면, 후사를 도모하기 위해 몸을 빼느냐.

“거, 잔머리를 굴리느라 아주 바쁜가 보군. 하긴, 당혹스럽기도 할 거다. 본인 정도의 실력자를 한눈에 알아볼 고수가 버젓이 여기 서 있다는 게…….”

저벅저벅.

의문의 존재는 천천히 책장 사이를 걸어 나왔다.

그리고 곧 문 앞에 서 있는 설휘를 목도할 수 있었다.

“노부는 구염(究廉)이라고 하지. 내 제자인 명강을 죽이고 온 네 이름은 무엇이냐?”

노인과 마주한 설휘의 표정이 굳어졌다.

초로의 나이로 보이는 외모.

허리춤에 화려한 검집을 차고 괴이한 도복을 입은 그는, 체구는 작았고 얼굴엔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했다.

흔히 어디서 본 듯한 차림새였지만, 설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광이 서린 그의 눈빛은 이제껏 만난 그 어떤 이보다 맑아 보였기 때문이다.

‘저런 게 정파들이 말하는 정심(正心)이란 것인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압감.

절로 두려움이 생겨날 정도로 상대가 쌓은 수양은 깊어 보였다.

‘제길. 그동안 너무 수치에 의지했어.’

설휘는 속으로 스스로를 책망했다.

상대의 능력치를 모르는 상황.

그간 적의 능력을 알고 싸웠던 그에게 이런 상황은 낯설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건 달리 말해, 그동안 자신이 수치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아왔냐는 반증이기도 했다.

괴이한 차림새의 노인은 설휘에게 매우 위험한 상대였다.

“허어. 미련하도다. 아직도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냐. 설마 노부가 너 따위를 제압하지 못해서 주변의 도움을 구하기야 하겠느냐?”

드드드득.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발끝에서 생성된 기의 파동.

그것은 노인의 몸을 맴돌더니, 이내 거세지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츠측.

노인이 끌어올린 기공으로 인해 주변의 책장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부 책들은 바닥에 떨어지기까지 했다.

그 순간.

“……휘.”

기의 파동이 멈췄다.

그리고 노인은 설휘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내 이름은 설휘다.”

설휘는 솔직히 자신의 이름을 고했다.

어차피 지금 이 노인을 제압하지 못하면, 마태룡을 찾기는커녕 살아나갈 수조차 없다.

“설휘라……. 마교놈치고는 정겨운 이름이군.”

구염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 그럼 무슨 이유로 명강을 죽이고 여길 잠입해 들어왔느냐?”

“…….”

“왜? 그건 대답하기 싫으냐.”

그가 한 발짝 다가오자, 설휘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노인.

“음, 좋아.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떠냐?”

뭔가 재미난 생각이 났는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서로에게 궁금한 점 한 가지씩을 질문하기로 하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솔직히 모든 걸 알려주는 거다.”

그 말에 설휘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네가 이곳에 잠입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나 역시 너에게 알아내고 싶은 것이 있으니, 결국 우리 모두 궁금한 건 매한가지 아니냐. 그리고…….”

구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하지. 이긴 자가 모든 걸 가질 테니, 서로에게 좋은 조건일 테고.”

“내가 널 어찌 믿지? 어차피 소란이 일면, 다른 녀석들이 이곳으로 몰려올 거고.”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된다.”

사아아악.

노인이 한 손을 들자 자색이 기운이 그의 손끝으로 몰려들었다.

무색무취의 권기에 색이 스며들었다는 건 보통의 권기보다 한 차원 높은 기운이라는 것.

노인은 그것을 응축시키더니 이내 한쪽으로 던져버렸고.

콰아아아앙!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과 폭발이 터져 나왔다.

“이 무슨…….”

건물이 무너질 듯한 정도의 충격이 일었지만, 정작 설휘가 놀란 건 다른 곳에 있었다.

평범한 문이 그 거대한 기폭발에도 멀쩡했다.

“진법이다. 이 공간은 특별한 진법으로 둘러쳐져 있지. 그래서 이 정도의 힘으로선 파훼할 수도 없지.”

“아…….”

설휘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이름 모를 진법으로 방어되어 있는 건물.

마치 미리 누군가 침입할 것을 대비해 파놓은 함정처럼 느껴진 것이다.

“여긴가?”

기릭기릭.

노인이 자신 옆에 있던 책장을 쓰다듬더니 어딘가를 툭 하고 눌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이 많은 책장이 밑으로 쑥 하고 가라앉았다.

그로 인해 이 공간은 여기 오기 전에 봤던 연무장처럼 평평하게 변했다.

“아. 참고로 이 진법은 내가 만든 것으로, 날 죽여야만 파훼되는 진법이다.”

설휘는 한걸음 더 뒷걸음질 쳤다.

머릿속에선 계속해 경종이 울려댔다.

이자와 싸우는 건 위험하다고.

“자. 그럼 나를 도와줄 자는 없어졌으니, 노부부터 물으마. 너는 명강을 죽이고 왜 여기 잠입한 것이냐?”

노인의 물음에 설휘는 잠깐 침묵했고.

이내 생각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사람을 찾으러 왔으니까.”

“사람?”

“그렇다.”

“누구?”

“마태룡.”

“…….”

거듭된 그의 물음에, 설휘는 대답했다.

어차피 이번에 자신이 그에 관해 물을 거였기 때문에.

“당신, 마태룡이라고 알고 있나? 마교 출신으로 이 근방에 있는 것 같던데.”

“음…… 역시, 그자가 마태룡이었던가?”

“어디 있는 줄 아는가?”

설휘는 급히 물었다.

그러자, 이번엔 노인이 친절하게 대답해 줬다.

“흠. 마태룡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최근에 한 놈이 이곳에 잡혀 들어오긴 했지. 범인이 상대할 수 없는 마두라 관주들께서 계속 감시하시고 계시지.”

“위치가 어딘가?!”

"한 번씩 묻고 답하기로 하지 않았나."

노인은 눈을 부라리듯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몇 번째 제자 소속의 사람인가?”

“……뭐?”

“네가 따르는 자, 몇째 제자냐고 묻는 것이다.”

“……!”

순간, 설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노인의 의도가 물씬 몸으로 느껴졌다.

이건 심히 위험한 질문이다.

자신이 죽으면, 책임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예상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이자를 죽이지 못하고 살아나가도 난 죽어.’

설휘는 기억하고 있었다.

사령대를 노리는 매서운 칼이 존재한다는 거.

이왕 이리 된 거, 모두 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넷째 제자, 곤마다.”

“호오?”

이번엔 노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반응을 보니, 상대 역시 마교와 관련된 정계에 꽤 관여된 인물로 보였다.

이번엔 설휘 차례였다.

“난 우리 신교의 태황각주와 당신의 문파인 화산파 장로 구종명이 거래하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묻겠다. 둘은 궁극적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기에 서로 그런 거래를 하고 있는가?”

“……호오. 이놈 보게.”

노인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제껏 나눴던 반응 중 가장 놀란 얼굴을 지어 보인 것이다.

노인은 턱을 쓸어내리며 잠시 침묵했고.

이렇게 대답했다.

“애송아. 대답은 여기까지다.”

“뭐?!”

“이제, 더는 알려줄 수가 없단다.”

파아아악.

일순, 그의 발밑에서 기의 파동이 퍼지기 시작했다. 설휘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냄새를 맡았다.

매화향.

매화검법의 정수를 익힌 자만 뿜어낼 수 있다던 그 향을 그가 보여주고 있었다.

‘난 반드시 저자를 죽이고 살아 나가겠다.’

설휘는 이를 악물었다.

분명 자신을 넘어서는 고수다.

그런 상대임에도 이렇게 투지가 끌어 오르는 것은 바로 설휘, 그 자신의 성장 때문이었다.

비대칭적으로 강해진 무공들은 이제 죽음을 담보로 한 싸움이 아니면.

성장하기 힘든 상황이 아닌가.

“대신 내 높은 아량으로, 선수를 양보해 주마.”

노인은 내기기공을 언제든 펼쳐낼 수 있을 정도로 끌어올린 후.

스윽.

설휘를 향해 여유롭게 손짓했다.

* * *

‘소신수마공을 쓴다.’

설휘가 선공으로 꺼내든 건 극음의 마공이었다.

소신수마공 특성이라 불리는 빙사의 힘을 이용하여, 상대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느리게 만들려는 생각이었다.

쩌저저저적!

예상은 적중한 걸로 보였다.

달려든 설휘가 검을 쏘아내자, 넓게 쏟아진 빙공이 주변을 온통 서리로 뒤덮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모래알처럼 광범위하게 퍼진 빙사가 주변의 모든 것들을 굳게 만들었다.

‘제길, 피했어.’

설휘는 급히 몸을 틀었다.

그리고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공간을 향해, 직감만으로 휘둘렀다.

그 순간.

까아아아앙!

이미 지척까지 다가온 노인의 검과 맞부딪쳤고.

“큽!”

설휘의 몸이 일 장이나 공중에 붕 떴다.

내공에서 밀린 것이다.

“……하압!”

몸이 뒤집힌 채로 설휘는 다시 한번 극음의 기운을 모았다.

그리고 빙결의 기운이 검에 다 실리기도 전에 휘둘렀고.

눈앞까지 다가온 노인의 검과 다시 한번 부딪쳤다.

카아앙!

쾅!

설휘는 땅에 그대로 내려 박혔다.

그럼에도 가만있지 않았다.

노인이 계속 공격해온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맞상대하면 진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설휘는 한 가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화산의 검법이 어떤지를.

언뜻 화려한 검술로 상대를 점점 옭아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거기에 일격필살의 초식을 숨겨놓았다.

그 말은 한순간 빈틈이 생기면 목을 취한다는 얘기다.

쩌어엉!

또다시 맞부딪침.

쩌어엉!

그리고 한 번 더.

구염은 계속해서 설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쯤 되니 상대의 고의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럼에도 설휘는 일격에 최대한 내공을 실어 상대해 주었다.

화산검법이 얼마나 패도적인 지 알고 있으니까.

괜히 검술로 싸우려 하는 순간 그대로 필패라는 거.

쩌어어엉!

무려 다섯 번째 검의 맞대응.

허나, 이번엔 설휘 역시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가 주춤했다.

소신수마공 오 초식.

검개운하(劍開運河)라 하여 기운을 흘리는, 정확히는 분쇄하는 방식을 쓴 것이다.

‘다시 내가 밀어붙여야 해!’

설휘는 이를 악물며 이번엔 자신이 움직였다.

촤아아악!

그대로 쇄도해 들어올 줄 알던 구염이 검을 맞대었는데, 거긴 허공이었다.

놀랍게도 설휘의 검은 위로 향해 있었고, 재차 아래로 그어졌다.

소신수마공의 중급에 오르며 쓸 수 있게 된 빙결의 파동.

검 모양을 따라 빙하의 기운이 그대로 쏟아지며 상대를 덮쳐온 것이다.

“어딜!”

그 순간 노인의 검이 번쩍거렸다.

검결을 따라 매화향이 퍼지며 빙하의 기운을 잠재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설휘를 향해 달려들려던 그때, 설휘는 그에게 닿지도 않는 찌르기를 구사하고 있었다.

허나, 그건 단순한 찌르기가 아니었다.

풍신검이었니까.

콰아아아앙!

뇌전의 기운에 거대한 풍압이 실리며 그대로 구염을 강타했다.

그대로 뒤쪽 벽까지 밀려간 구염은.

쾅!

어떻게 된 일인지 연속으로 폭발하기 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제길……”

작전은 실패했다.

상대의 의도를 알고 본인의 내공이 거의 바닥이 나던 그때.

오히려 풍신검으로 반격했다.

그럼에도 그는 피해냈다.

그건, 자신보다 내공을 끌어오는 데 있어서 몇 배나 더 수월하다는 걸 뜻했다.

설휘는 심한 현기증 때문에 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었다.

“뭐, 꼭 실패한 건 아니군.”

설휘는 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의도했든 아니든. 좋은 결과로 이어졌으니까.

[소신수마공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고급↑)]

“이놈. 어떻게 된 몸이기에 뇌전과 빙공을 함께 쓸 수 있는 거지?”

구염은 방금 전 무위를 보고서 놀라워했다.

두 개의 성질이 상극은 아니라 할지라도, 내공심법을 운용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그럼에도 상대는 그것을 펼쳐냈다.

“뭐, 살아남기 위해 별짓을 다 했다고 쳐두지.”

“……특이한 녀석이로군.”

“특이하다고? 그래, 특이하지.”

설휘를 이빨을 드러냈다.

“이제부터는 훨씬 더 특이할 거다. 싸움의 대가를 부를 거거든.”

“……뭐?”

설휘는 이빨을 드러내며 고개를 들었다.

“한번 경험해 봐라.”

나름 충분히 잘 싸웠으니.

이젠 비장의 한 수를 꺼낼 순간이었다.

전투방식

“미친 녀석이 어떤 건지 말이야.”

그 녀석을 꺼낼 시간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