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112화 (113/379)

112화. 퇴각 (1)

시간 제약은 없었지만, 다급한 건 매한가지다.

데리고 가야 하는지. 아니면 놓아두고 가야 하는지.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여기서 도망가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대장! 어서!”

재촉하는 수하의 외침에 설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데리고 간다면 곤마의 절대적 신임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제 한 몸도 빼기 힘든 이 상황에 이자를 온전한 상태로 데리고 갈 자신이 없었다.

더욱이 숨도 겨우 붙어 있는 이자가, 퇴각 도중 공격이라도 받게 되면…….

“대장!”

‘제길!’

설휘는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진법까지 해제한 이상, 이대로 사내를 놓고 가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데리고 간다’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때였다.

파파파팟.

거짓말처럼 잘려나가는 쇠사슬.

천천히 바닥으로 엎어지는 남자를 설휘는 급히 안아들었다.

그러고는 요림과 음무기가 보는 가운데, 설휘는 외쳤다.

“가자! 어서!”

* * *

남자를 받쳐 들고 동혈 속을 빠져나온 설휘는 혼란스러운 광경을 목도했다.

침입자를 눈치챈 것인지 서너 명의 무사들이 문 쪽으로 들이닥쳤고, 그 공세를 적송과 용진 그리고 소령이 막아내고 있었다.

“위쪽으로!”

요림이 지붕을 가리키며, 자신의 배 위에 두 손을 올렸다.

밀어줄 테니 밟고 올라가라는 얘기다.

팟.

음무기가 먼저 빠르게 올라서, 천장 대들보를 밟았다.

설휘는 남자를 등에 엎쳐 메고 곧장 도약했고, 다른 쪽 들보를 밟으며 자리에 섰다.

그리고 이 건물로 들어왔던 공간 쪽으로 빠르게 빠져나왔다.

“하…….”

먼저 밖으로 나온 음무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나온 설휘는 곧장 그 의미를 이해했다.

이곳 건물로 몰려드는 무사들.

뿐만 아니라, 만일을 대비해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쪽에 포진된 화산파 제자들.

완벽히 포위된 형국이었다.

“이거, 도망갈 수 있을까 싶습니다.”

나름 퇴로로 생각했던 뒤쪽 길목이 차단당하자 음무기가 허탈한 듯 말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의외의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있소…… 공간이…….”

“뭐?”

마태룡이라 짐작되는 사내였다. 그는 흐느끼듯 말을 이었다.

“진법 주위에…… 비밀기관이 있소.”

“……!”

사내는 고개를 들고 있었다.

흰자위만 가득하던 눈에 초점이 또렷이 맺혀 있었다.

“확실한가?”

“……아마도.”

음무기의 물음에 그가 대답했다.

“내려가자.”

설휘는 그를 데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차피 이곳을 뚫고 나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투욱.

그를 내리고 지면으로 내려오니, 한창 대치 중이던 수하들이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특히 뒤따라 올라가던 요림도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안에서 길을 열 테니, 도망칠 틈이 보이거든 모두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옙!”

설휘는 수하들에게 명하고는, 다시금 열려있는 동혈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다시 사내에게 물으려는데.

“저기 뒤쪽의 벽. 단순한 벽으로 보이지만, 어딘가 눌러보면 비밀 통로가 나올 것이오.”

“정말이오?”

“아마 그럴 거요.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지만, 똑똑히 들었소. 거대한 기관진식을 움직이는 톱니바퀴 소리를……….”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 말에 음무기가 빠르게 벽 쪽으로 붙었다. 나름 기관진식에 조예가 있었기에, 자신 있게 이곳저곳을 손으로 만지더니.

“오! 찾았습니다!”

그의 외침과 함께 금속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릭끼릭 드드드득!

그리고 거짓말처럼.

또 하나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뒤따라온 요림이 그걸 보고 입을 쩌억 벌렸다. 진법 내 기관진식이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구조였다.

“너는 빨리 나머지들을 데리고 이 안으로 오너라.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

“옙!”

요림이 곧장 외쳤고, 음무기는 이미 사람 크기만 한 공간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설휘도 마태룡을 어깨에 둘러메고 그를 따라 빠르게 뛰었다.

‘확실히 이해가 된다.’

또 다른 통로인 비밀기관을 둘러보며 설휘는 생각했다.

내부에 어둠은 없었다.

안은 사람이 이동하기 편하게 되어 있었고, 곳곳에 야광주로 된 불빛이 내부를 밝혀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체한 진법은, 외부인을 위한 것이다.

혹여나 침입자가 들어와 자신들이 걸어놓은 진법을 파훼하게 되면, 마을 곳곳에서 신호탄이 터져 사로잡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심문은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조사했을 터.

그러니 이 길을 알지 못하는 외부인은 꼼짝없이 저들의 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곤마 님께서 보내셨소?”

이동 중에 사내가 물어왔다.

기운을 차린 듯 목소리가 이전보다 더욱 또렷했다.

“그렇소. 그대는…… 마태룡이오?”

설휘의 물음에 잠깐 망설이듯 침묵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이젠 부끄러운 이름이 되었군.”

“다행이오. 곤마 님께서 애타게 찾으셨으니.”

파파팟.

점점 길이 좁아지고 있었다.

아마도 출구에 가까워졌다는 신호일 터.

“어느 부대에서 왔소?”

“은영단 사령대요.”

“은영이라면…… 추적에 특화된 부대?”

“그렇소.”

“그렇다면 날 그냥 버리고 가는 게 좋을 듯한데…….”

“여기보다는 낫지 않겠소?”

“그게 불가능해서 말이오. 당신들 수준으로는 이들의 방어진을 뚫지 못해.”

때마침 입구가 보였다.

음무기가 좁은 천장의 막힌 곳을 툭툭 치며 밀어내니, 사람 몸통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나왔다.

“올라오십쇼.”

음무기가 앞서갔고, 설휘도 그곳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땅을 밟았는데.

“허…….”

절로 신음이 나왔다.

설휘가 도착한 곳은, 통로 따위가 아닌 이름 모를 건물의 방이었다.

그리고 자신들 앞에는 두 노인이 있었다.

“내 뭐랬나. 이곳으로 도망칠 거라 하지 않았는가?”

“정말이네? 들어갈 때는 분명 정문을 통해 들어갔었는데…….”

의자에 앉은 노인 하나.

벽에 기대고 선 노인 하나.

자신들을 보고서도 여유가 넘쳐 보였다.

“기관진식이 잘못된 거 아냐?”

“천문자는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자야. 설계에는 문제가 없다고.”

“그렇다면 비밀이 샌 거야?”

“난들 아냐.”

투욱.

의자에 앉은 노인이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오히려 잘됐지. 다른 장로들에게 걸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실적을 올리면 되니까.”

대화와 표정.

여유 있는 몸짓과 시선.

능력은 알 수 없으나, 딱 봐도 평범한 녀석들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크큭. 이제 시작이야. 친구.”

마태룡이란 사내는 웃고 있었다.

마치 ‘내 말이 맞잖아.’ 하는 그런 비웃음이 담긴 웃음이었다.

콰아아앙!

때마침 땅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그리고 대치된 상황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 여기 계셨군요. 모두 빠져…….”

구멍으로 올라온 용진이 말끝을 흐렸다.

눈앞의 화산파 소속 인물들을 확인한 것이다.

차례로 수하들이 올라왔지만,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보고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적송이 주변을 둘러보았고.

“남서쪽에 있는 건물입니다. 여길 벗어나면 곧장 우리가 목표한 퇴각로가 있습니다.”

“좋다. 이렇게 하자.”

설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하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이자를 데리고 먼저 가라.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자꾸나.”

“대장. 지금 무슨…….”

“어서! 시간 끌면 이곳도 포위당해!”

설휘는 소리쳤다.

지금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노인들의 얘길 들어보니, 다행히 대부분의 화산파는 정문 쪽으로 쏠린 듯 보였다.

그렇다면 이곳을 통해 빨리 나간다면, 당분간 추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마을을 전방위적으로 포위한다곤 하지만, 조사해 본 바 지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이곳 아래엔 쉽게 쫓아올 수 없는 협곡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재밌는 녀석들이네. 내가 이렇게 떡 하니 서 있는데도 우릴 따돌리고 간다고 하는 걸 보면.”

“뭐, 자신이 있나 보지. 자넨 누굴 맡을 텐가?”

“난 저기 앞에 세 놈. 대장으로 보이는 놈도 함께.”

“쳇. 아쉽군. 그럼 난 뒤에 있는 세 놈인가.”

화산파 놈들의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설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제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설휘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이 두 화산파 놈들을 처리할, 유일한 방법.

그라면, 이 상황을 분명 타개해 줄 것이다.

“어서!”

설휘의 외침에 수하들이 하나같이 도약했고, 화산파 두 녀석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도와다오.’

설휘는 재빨리 전투방식을 바꿨다.

전투방식

늘 그랬듯, AI로 전투방식을 선택하자마자 시야가 일그러졌고.

다시 천장에서부터 이들을 볼 수 있었다.

* * *

‘늦은 건가.’

약간의 실수를 해버렸다.

수하들이 움직이자마자 노인들이 반응했고, 그에 대항하여 전투방식을 바꿨을 때는 이미 늦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하앗!”

‘절세풍검이다!’

AI설휘가 검을 내리치자, 눈 깜짝할 사이 당도했던 두 노인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

우리 쪽 수하들은 전혀 피해를 받지 않고 지붕을 뚫고 빠져나갔다.

주변에서 기의 파동이 눈에 보일 정도로 거세게 휘몰아치는 데도 말이다.

‘아군은 맞지 않는다는 건가.’

설휘는 절세풍검에 숨겨진 또 하나의 능력을 확인했다.

뿐만 아니라, AI설휘는 떨어지는 노인들을 향해.

“합!”

풍신검을 쏘아냈고, 연속으로 노인들이 솟구쳐 올랐다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곧장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당한 듯 보였다.

“아, 진짜. 무능한 새끼. 결국 이런 식으로 돼버렸구만.”

그 사이, AI설휘는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전보다 더욱 굳은 표정이었다.

“방금 너의 모자란 판단으로 수하 다섯을 잃었다.”

- 무슨 말이냐? 수하들을 잃다니.

“방금 네가 내린 판단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수하들의 전투력이 최소 600만은 넘어야 해. 그 정도는 되어야 퇴각로를 뚫고 미리 약속해 놓은 장소에서 모일 수 있단 말이다.”

- 그걸 네놈이 어떻게 알아? 아니, 지금 능력으로도 가능해. 분명 이쪽은 경비가 허술했다고.

“이러니 매번 내게 병신 소릴 듣는 거지. 이 새끼야. 화산파 놈들이 이렇게 몰려나온 지금 상황에선 네놈뿐만 아니라 수하들의 능력을 키우지 못하면 해결하지 못한다고!”

- …….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지금 AI설휘가 하는 말은, 마치 미래를 알고 있다는 소리로 들렸기에.

“그리고 저기 보이는 노인 둘. 저놈들, 미리 제거했어야 했다.”

- 제거라고?

“그래, 다행히 네가 구염을 제거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저기 옆에 그놈도 함께 서 있었을 거다.”

“크으으읍.”

“크읍.”

노인 둘은 겨우 정신을 차린 듯했다.

눈에 독기가 찬 모습이, 마치 구염 때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 그런 거였나.

그제야 나는 이 임무를 하기에 앞서 먼저 손을 봐야하는 녀석들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구염과 저 두 노인.

저놈들을 먼저 제거한 후에 마태룡을 데리고 나가는 임무에 착수해야 한다는 걸.

“잘 들어. 이제 여기서 죽으면 남은 목숨은 단 두 개뿐이다. 그리고 계속된 너의 무능한 판단으로 곧 하나가 되겠지. 고작 곤마가 제시한 세 가지 선택 중 가장 낮은 난이도에서 이렇게 헤매고 있는 거다."

- …….

“너는 언제쯤 정신을 차릴 거냐! 대체 너에게 붙은 목숨들을 뭐로 생각하는 거냐! 너 같은 병신 때문에 네 수하들이 죽는 거 아니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저 녀석의 말을 들으니 그간의 노력은 보잘것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가 어떻든 다시 수하들을 죽을 위기로 몰고 있지 않은가.

“자, 다시 선택해라. 내가 이놈들을 죽이고 간다 해도 그곳에 수하들은 없을 것이다. 목적지엔 수하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준 마태룡만 있을 뿐. 그래도 계속 진행하겠느냐? 아니면!”

AI설휘는 나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네가 들고 있는 예호후검과 진초혜. 두 가지 보물을 도구함에 넣고, 다시 한번 도전해 보겠느냐?”

- 난…… 나는…….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떤 말도 꺼내기가 힘들었다.

정말 저 녀석의 말이 맞는지도 지금으로선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때였다.

“대장!”

“……?”

나의 시선이 지붕 옆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놀랍게도 소령이 서 있었다.

그리고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 소령, 네가 어떻게?”

AI설휘도.

지금 이 상황이 믿기 힘든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원래 너는 여기 올 수가 없는데…….”

그리고 그때.

나는 보았다.

파아아아앗-

엄청난 속도로 쏘아지는 한 인영(人影)을.

“악!”

소령은 거짓말처럼 한 노인의 손에 짓이겨졌다.

눈 깜짝할 사이 노인 중 하나가 달려들어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크크큭. 내 거라고 말했지?”

노인의 웃음.

그것은 지켜보던 나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아니, 그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이 씨발 새끼가…… 감히…….”

AI설휘의 얼굴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분노에 찬 얼굴로 변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동시에 나타난 알 수 없는 글귀들.

그건 내가 알던 AI설휘가 아닌.

또 다른 AI설휘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