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천미려의 제자 (1)
스스로 움직인 건 아니었다.
파팟.
지문 선택과 함께 무대 위로 직접 뛰어든 자신은, 상대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고.
곧이어 사황대장 녀석이 등장했다.
[State Summary, 상태 요약]
화순 [사황대장]
체력 770만/770만
내공 720만/720만
전투력
822만
상대의 능력치를 보고서 율사에게 말을 건넸다.
“어르신. 고작 저 녀석을 상대로 싸우란 말입니까?”
딱 여기까지.
‘상대를 도발한다.’를 선택하자, 제멋대로 나온 반응과 대화였다.
“……호오.”
제법이라는 시선으로 설휘를 바라보는 율사.
이런 상황이 꽤 놀라운 듯, 그의 눈에는 이채가 서려 있었다.
“감히 어디서 그따위 망발을…….”
옆에서 자신이 한 말을 들었는지, 화순이란 녀석이 거친 반응을 보였지만.
“하긴. 그래 보이는군.”
“저, 저기…….”
율사는 그의 말을 딱 잘랐다.
그러고는 떨떠름하게 서 있는 사황대장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말을 건넸다.
“좋다. 더 강한 상대를 붙여주마.”
율사의 고개가 사황대 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종과 횡으로 다닥다닥 앉아있는 이들을 살피더니.
“거기, 둘째 열. 오른쪽 기준으로 여섯 번째!”
율사의 외침에 좌중이 조용해졌고, 곧이어 한 사내가 일어섰다.
“옙!”
“무대로 나와라.”
‘어? 이건 뭐지?’
설휘는 황당해했다.
상대를 도발하는 것까지는 예상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다른 곳으로 튀었다.
율사는 왜 여기 있는 사황대장이 아닌, 사황대원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한 명을 지칭한 것일까.
파팟.
잠시 뒤, 율사에게 지목당한 사내가 무대 위로 나타났고.
“칫!”
앞서 나왔던 사황대장은 별다른 말 없이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상태창.
[State Summary, 상태 요약]
천균(千鈞) [사황대원, 갈위 장로의 제자]
체력 1270만/1270만
내공 950만/950만
경지 초절정의 극(極)
전투력 999만
‘아…….’
그걸 본 설휘는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저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장로분들 중 한 분.
얼굴은 모르나, 기억하기로 음무기가 패했을 당시 ‘갈 장로’라는 언급이 있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눈앞의 사내는 그의 제자로 보였다.
사제자인 곤마 밑으로 들어온 갈위 장로가 자신의 제자를 사황대로 보낸 것 같았다.
“이제 됐느냐?”
율사가 자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확실히 화순보다 더 강해 보이는 상대.
설휘 스스로도 이쯤 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싸움에 앞서 아래 지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상대를 도발한다.
▷ 그냥 진행한다.
‘뭔가 있어!’
계속되는 물음.
점점 상황이 불리해지는 선택 지문이지만, 설휘는 이 선택 지문이 가진 의도를 대충 알 것 같았다.
이런 질문의 끝은 결코 최악의 수가 아니라는 걸.
위기만 잘 극복해낸다면, 오히려 더 좋은 상황이 펼쳐질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상대를 도발한다.’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순간, 설휘 본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삼 합(三合).”
“……?”
“그 안에 끝내겠습니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조금 굳어진 설휘의 표정.
삼 합이라는 건 서로의 일 초식을 세 번 교환하는 공방을 가리켰다.
그만큼 빨리 끝내겠다는 얘기를 건넨 것이다.
“허어. 이거 방금 재밌는 얘길 들었습니다. 여기 사령대장이, 이 사황대원을 삼 합 안에 쓰러뜨리겠다고 합니다.”
율사가 좌중을 향해 말하자마자, 눈앞에 나타나는 반응들.
현장 반응을 보여드립니다.
[장로]
“눈썰미가 있는 자로군요. 잠시 사황대원으로 보냈던 갈 장로의 제자를 어찌 알아봤나 봅니다.”
“그래도 태도가 너무 시건방집니다. 고작 사령대장 수준으로 삼 합이라니.”
“어허. 말을 삼가시오. 시건방지다니. 그만큼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오? 모르긴 몰라도 이번에 역임한 사령대장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자일 게요.”
“사령대장이 강해 봤자지요. 그의 상대는 갈 장로의 애제잡니다. 백혼 장로의 제자와는 격이 다릅니다.”
“뭐? 격?! 이보게.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요! 그리고 몇 번 말하지만, 저 음무기란 놈은 이제 내 제자가 아니라니까!”
장로 쪽에서는 싸움이 일어난 듯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반응들.
[칠사자]
“갈 장로의 제자를 용케 알아본 듯해.”
“그저 허풍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동의한다. 둘 다 실력이 꽤 있어 보여.”
[사군성]
“내 눈엔 사령대장이 좀 더 강해 보인다.”
“그래도 삼 합은 무모한 결정이다.”
“뭔가 수가 있겠지.”
현장 반응이 끝나자, 율사가 말했다.
“좋다. 삼 합 안에 끝내지 못하면 사령대장이 지는 걸로. 다만, 사령대장이 패한다면 지나친 제안을 한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할 것이다.”
그의 경고에 설휘는 예를 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말은 안 했지만, 사실 이 정도 조건이라면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딱. 이 정도 조건이라면.
싸움에 앞서 아래 지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상대를 도발한다.
▷ 그냥 진행한다.
‘이게 또?’
계속되는 지문과 선택은 설휘를 점점 수세로 몰아놓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더욱더 곤경에 처하는 것을 즐기는 듯 보였다.
예전이라면.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괴물’의 의도에 순응했을 것이다.
당황이든. 고민이든. 아니면 좌절이든.
하지만 이젠 다르다.
설휘는 알고 있었다.
이제껏 이런 난처한 질문 뒤에는 그만한 큰 포상이 주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수많은 경험 끝에 내린 결론.
혜택이 클수록. 도전의 가치 역시 더 커진다는 것도.
‘그건 못 참지.’
‘상대를 도발한다.’를 선택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대결에서 승리할 시, 특별 이벤트를 열 수 있습니다.
‘특별 이벤트…….’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자신은 율사에게 재차 말을 걸고 있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일합(一合).”
“……?”
“생각해 보니 그게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삼 합은 지루한 면이 좀 있지 않겠습니까?”
“…….”
그 말을 끝으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을.
“뭐 이런 미친 새끼가…….”
갈위 장로의 제자인 천균이 깼다.
그러나, 그걸 단순한 말로 치부할 율사가 아니었다.
“하하하!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사령대장이 삼 합은 너무 길다고, 일 합 안에 끝내겠다고 하는군요. 일 합. 단 한 번의 초식 대결. 캬…… 참으로 대찬 녀석입니다.”
너무 충격적이었던 걸까.
좌중의 반응이 활자로 보이지 않았다.
황당해서인지, 아님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했는지. 물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주둥이를 찢어주지.”
결국 살의를 내보이며 말을 거는 천균.
녹색의 기광이 눈가에 번들거리는 것이, 확실히 이 녀석은 이성이 마성으로 절여진 태(態)가 보였다.
‘저게 나와는 다른 점이지.’
마성에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자.
이성이 마성과의 일치율이 높을수록 단기간에 엄청난 실력자가 된다.
평소라면 저런 노골적인 살의에 주눅이 들었을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간 경험했던 수많은 강자.
죽음 역시 여러 번 경험해서인지, 이 정도의 살의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전투방식을…….’
설휘는 슬쩍 전투방식을 건드릴까 생각하다, 이내 접었다.
고작 이 정도의 상대에게 이런 기술을 쓴다면, 앞으로는 더욱 시스템에 의지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더는 시스템에 의지하지 않는 게 이전과 달라진 지금의 소신이었다.
거기다 이미 자신에게는 특수 기술도 있지 않은가.
‘한 번에 쓰러뜨리려면 역시, 그것밖에 없겠지.’
몇 가지 특수 기술을 떠올렸지만, 선택은 하나였다.
빙공극저하.
단 한 번의 승부라면.
시간을 결박할 수 있는 기술, 이것만 한 게 없었으니까.
한편, 사령대 조장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황대장을 상대로 싸우는 것도 조금 걱정스러웠는데, 갑자기 싸울 대상까지 바뀌자 다들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의아해하고 있었다.
“설마, 저 녀석은…….”
그런 와중에 그를 알아본 자가 있었다.
“너, 알아?”
소령이 음무기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조장들을 슬쩍 본 뒤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장로석에 앉은 깡마른 노인 보이지. 저분의 제자야. 사제자인 곤마 님 쪽으로 붙으면서 제자까지 함께 데리고 왔나 보네. 나와 같은 경우지.”
“정말?”
“얼마나 강한데?”
조장들이 궁금한 듯 곧장 물어왔다.
그 말에 음무기는 잠시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총단 내 장로 제자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해. 사빈당(社彬黨)이라고 제자들끼리 무공을 교류하고 대련하는 곳이 있는데, 참가 인원 50명 중 저놈은 10등 정도를 한 거로 기억해.”
“장로의 제자들 중 10등이라면…… 은영단 내에서는 적수가 없다는 말 아냐?”
“아마. 그렇겠지.”
음무기 말에 조장들은 수긍했다.
많고 많은 마인들 중에 선택된 자들.
천마의 제자를 논외로 치면 그다음이 장로들의 제자다.
그들이 선별해 가는 제자들은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럼 대장은…….”
“쉽지 않겠지. 거기다 일 합이라니. 너무 심하지 않아?”
적송이 말끝을 흐렸고, 소령이 불만을 터트렸다.
그냥 싸우면 되는데 왜 저런 무모한 짓을 벌이는지.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용진이 뭔가 생각났는지 음무기에게 물었고.
“넌 몇 등 했는데?”
그 말에 음무기는 어렵지 않게 답했다.
“나? 난 등수가 없는데?”
“왜?”
그 말에 사령대 조장들의 시선이 다시 하나둘씩 모였다.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이내 모든 조장들이 쳐다보자 음무기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뒤늦게 말끝을 보충했다.
“……쫓겨났거든.”
* * *
“준비되었나.”
율사의 말이 들리고, 설휘는 맞은편 천균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해가 간다.
은영단 내 사령대에 대한 평가를 그동안 많이 들어왔을 터.
무력은 없고 그저 추적술에만 특화된 부대.
그러니 눈앞의 상대가 어떤 자인지 조사 따위는 당연히 안 해봤을 것이다.
“그럼, 시작해라!”
율사가 소리쳤고, 설휘와 천균은 다시금 서로를 마주 보았다.
“…….”
곧 좌중에 다시금 침묵이 감돌았다.
둘 중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켜보던 이들 역시 이해했다.
대장급 싸움에서의 일 합.
단 한 번의 공방으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니, 당연히 압박감이 있을 수밖에.
그래서인지 천균의 입장은 더욱 복잡했다.
당연히 지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었지만, 혹여나 패하게 된다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그런 불안감에 발을 못 떼고 있었다.
“왜.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더니, 막상 싸우려니까 겁이 나나?”
물론 설휘는 달랐다.
“이봐. 사령대는 말이지. 추적에 특화된 조야. 그래서 늘 기대 이하의 취급만 받곤 했지. 조장들도 그렇고.”
“…….”
“그런데 말이야. 이젠 입장이 달라졌어. 무엇 때문에 달라졌는지 아나?”
설휘는 불만 가득한 그를 노려보며 턱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자신 있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여기에 들어왔다는 거지.”
스윽.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로 손등을 매섭게 그어버리는 설휘.
“너, 뭐 하는 거야?”
“아. 이거?”
설휘는 그에게 피가 흐르는 손등을 내보이며 말했다.
“그런 게 있어.”
“……도저히 못 봐주겠군.”
천균은 어깨를 펴고 자리에 섰다.
잠깐 긴장했던 스스로를 탓하듯 호흡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화아아아아-
한 곳으로 맹렬한 파공이 쏟아졌다.
‘이건?!’
설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저 녀석이 방금 쏘아낸 것은 투기(鬪氣)에 가까웠다.
상대를 옭아매는 기운이지만, 기운만으로는 해를 끼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 무서운 건, 그것을 쓰는 시전자가 엄청나게 많은 살인을 저질렀다는 걸 바로 보여준다는 것에 있었다.
‘오호라. 저 마공을 쓰는구만.’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율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갈위 장로의 제자가 지금 쓰려는 건 사황대의 무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은영단의 무공도 아니었다.
바로 혈금강마공(血金剛魔功).
수많은 살인을 통해 혈로(血路)를 보게 된다는 마공으로, 익히는 것이 실로 어렵다고 알려져 있었다.
자신의 능력보다 한 단계 더 높은 힘을 쓸 수 있다고 알려진, 본교 내에서도 상위 마공인 것을 이 자리에서 쓰려고 하는 것이다.
‘일 합은 무슨. 살아남기도 힘들겠구만.’
그는 이 싸움의 결론을 내렸다.
혈로를 본다는 건, 상대방의 길을 본다는 것.
일 합은커녕, 이 정도 수준에서는 절대로 천균을 꺾을 수 없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