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턴제 Lv2 (1)
마태룡.
칠사자 서열 2위인 명실공히 초마의 고수가 수하가 된다는 것.
말이 안 되는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다.
지금 선택이, 예전의 선택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면.
그가 자신의 수하가 되든, 아니면 협력자 또는 조력자가 되든. 어떻게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칠사자가 내 수하가 되는 게 가능한가?”
그건 설휘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얘기는 들은 적도 없었으니까.
스스로 자발적으로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얘기한다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뿐.
“지문 선택은 결국 정론으로 가는 게 이상적이다. 괜히 다른 꼬임에 엮이면 일을 그르친다.”
그간 많은 선택지를 겪으면서 느낀 바였다.
스스로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많은 걸 얻어봐야 위험하기만 할 뿐.
여차하면 그만한 대가를 게워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
설휘는 도구함을 열었다.
아직 아침이 되기 전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이제는 또 다른 보상, 그중 가장 눈길이 가는 물품에 대해 확인할 시간이었다.
드르륵.
“특이하구나.”
도구함에서 '황금 벨트'를 꺼내 서탁에 올려놓은 설휘.
모양은 별로 화려하지 않았다.
그저 은은한 황금빛에, 곳곳에 비취색이 아로새겨져 있을 뿐.
말이 황금이지, 얼핏 보면 가죽으로도 보였는데.
이걸 어디에 쓰는 건지 몰라 처음에는 한참을 고민했다.
“이걸…… 이렇게 매는 건가.”
철컥.
어찌어찌 허리에 둘러서 찼더니, 고리가 맞춰지며 몸에 딱 붙었다. '벨트'라는 게 허리에 감는 혁대를 의미하는 듯했다.
생각보다 착용감이 편안했다. 처음부터 자신의 몸에 맞춰서 만들어진 듯, 조이거나 흘러내리지도 않았다.
‘어?’
하지만 무엇보다 이렇게 매는 게 맞다고 확신하게 된 것은, 그 직후 눈앞에 뜬 활자 때문이었다.
[빈칸에 영약을 넣으세요.]
[빈칸] [빈칸] [빈칸] [빈칸]
참조, 전투 중 빈칸에 들어간 영약을 즉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빈칸.
하지만 ‘전투 중 빈칸에 들어간 영약을 즉시 사용’이란 문구의 뜻을 설휘는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조금 궁리하다가, 이내 이번에 받은 영약을 도구함에서 꺼냈다.
○ 남극연단(南極鍊丹)
설명 : 남해의 끝, 빙산의 심해에서 수백 년 동안 냉기를 이겨낸 꽃의 씨앗.
효능 : 체력을 10만 올려준다.
○ 무생성수(無生聖水)
설명 :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깊은 협곡에서 흐르는 성스러운 물.
효능 : 내공을 10만 올려준다.
이 두 개를 빈칸이라 적힌 부분에 가져다 댔더니.
“어?!”
황금 벨트의 빈칸이 변했다.
[연단] [성수] [빈칸] [빈칸]
“가만, 이거…….”
설휘는 이 현상을 보고서 빠르게 유추했다.
벨트 안에 들어간 영약들. 이건 마치 턴제 싸움 때, 도구함에서 금창약을 꺼내 쓰던 것과 느낌이 비슷했기에.
“전투 중 즉시 회복이라…….”
설휘는 그제야 이 벨트의 기능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도구함에 넣어두었던 영약을, 전투 중에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장비.
이거라면 한참 싸우고 있던 와중에도 부족해진 체력과 내공을 즉각 보충할 수 있을 테니까.
사용하기에 따라 전세를 뒤집을 수도 있다.
[저장하시겠습니까?]
“음.”
설휘는 침소에 눕기 전 진초혜, 황금 벨트. 풍운극마검을 모두 도구함에 넣고 저장했다.
모든 보물을 차고 죽었을 경우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8년, 1월 마지막 주, 무사수행 완료(금만중의 신뢰)
□ 천력 95년, 제3장-8. [핵심무사 성공] 폭풍성장기(Bonus Story) 1년 차
세 개의 목록 중에 두 번째에 저장하고 나니.
이제 설휘에게는 마지막 일정만이 남아 있었다.
■ 천력 98년, 7월 마지막 날
* * *
[금만중]
“안녕하십니까! 마침 저희 상단에 좋은 상품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어느 물건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아침이 되자마자 눈앞에 나타난 금만중.
투숙하고 있는 이곳으로 직접 찾아온 게 아니라, 그저 눈앞에만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영약]
○ 자천감로수(紫天甘露水) 500G
○ 천지설엽초(天地雪葉草 1000G
○ 태현화정(太玄火精) 1500G
○ 만년순천단(萬年順天丹) 2000G
‘이거 참.’
목록을 받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저 영약들을 사면 대회에서 받은 5,000G를 딱 다 쓰게 되는 것이 아닌가.
너무 정확히 들어맞는 게, 누군가 일부러 이렇게 짜두기라도 한 듯해서 썩 찜찜했다.
‘그래도 다 사는 게 좋을 테지.’
설휘는 기분을 털어냈다.
이제껏 경험해 본 바에 따르면, 돈을 들고 있어 봐야 제대로 쓸 곳이 없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구매했던 신병이기의 효능이 워낙 탁월했으니,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자천감로수를 구입했습니다.]
[천지설엽초를 구입했습니다.]
[태현화정을 구입했습니다.]
[만년순천단을 구입했습니다.]
[금만중]
“잘 선택하셨습니다. 실로 구하기 힘든 영약이지요. 그럼.”
금만중이 그렇게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럼. 이제 받은 걸 가지고…….”
기존에 있던 영약들은 도구함에 넣고, 이번에 구입한 것들을 벨트 안에 넣었다.
[감로수] [설엽초] [화정] [순천단]
“이렇게 되는 거군.”
감로수 : 체력을 1500만 회복
설엽초 : 내공을 1500만 회복
화정 : 체력과 내공을 2000만 회복
순천단 : 체력과 내공을 5000만 회복
“전투 때 아주 요긴하겠구만.”
설휘는 이어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마지막 일정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천력 98년 8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36/36)]
▷ 조장들과 임무수행[곤마의 임무 받기]
▷ 수하들의 일정 정하기
▶ 임무 받기
▷ 무사 수행
‘임무 받기’를 선택하셨습니다.
▶ 흑구(은영단주)
‘흑구’에게 임무를 받으시겠습니까?
수하들과 함께 움직이실 건가요?
▶ 함께 간다.
▷ 혼자 간다.
눈앞이 다시금 새하얀 빛으로 뒤덮였다.
* * *
[흑구]
“소식 들었다. 곤마께서 주최하신 대회에서 칠사자 중 한 분을 쓰러트렸다지? 정말 놀랍구나. 너는 이미 은영단에 있을 수준을 넘어섰다.”
첫 대화는 칭찬 일색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대화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근엄한 말투로 바뀌어 있었다.
[흑구]
“기려사대(羈旅社隊)는 강시나 실혼인(失魂人)을 만드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강시는 시체를 이용하지만, 실혼인은 이성이 마비된 광마(狂魔)들을 이용하지. 그런데 조금 전, 큰 문제가 발생했다고 우리 쪽에 통보가 왔다.”
기려사대. 본교의 많은 사술을 연구하는 조직.
통상적으로 기기아대라는 곳의 지시를 받긴 하지만, 독자적인 연구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설휘]
“큰 문제라면…….”
[흑구]
“산 채로 만든 실혼인 몇몇이 명령을 거부한다는 얘기다. 처음엔 그저 제조과정에서 생긴 가벼운 불량이라고 봤지만, 그게 아니었어. 광마 중 생존 본능이 심한 녀석들이 폭주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 폭주하는 놈들이 주변 실혼인뿐만 아니라, 강시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거다.”
[설휘]
“허면,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흑구]
“통제할 수 없는 광마들을 우선적으로 죽여라. 살아있을 때 일류 수준에 머물던 녀석들이라, 그다지 강하지 않을 것으로 보여. 기려사대는 우리만이 아니라 기기아대에도 요청을 보냈다고 하니, 정 위험하면 시간만 끌어도 돼. 다만 지금 가장 가까운 게 우리라서, 할 수 있다면 초동 조치를 부탁한다고 해 왔다.”
결론적으로, 미쳐 날뛰고 있는 실혼인들과 강시들을 처리하라는 것을 뜻했다.
[설휘]
“알겠습니다.”
[흑구]
“그래. 위치는 우리 은영단 뒤쪽에 있다.”
솨아아아아-
곧장 눈앞으로 환한 빛이 떠오르고, 이윽고 시야에 초점이 맺히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설휘 자신은 이미 수하들과 함께 산 위에 도착해 있었다.
흑구에게 들은 대로, 은영단 뒤에 있는 작은 언덕이었다.
“대장, 저기인 것 같은데요?”
조금 앞으로 걸어 나갔을 때, 음무기가 한곳을 가리켰다.
척 봐도 괴이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로 보이는 곳에는 노인과 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그들의 옷에 그려진 괴이한 도형이 눈길을 끌었다.
주술적인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어디서 오셨습니까?”
“은영단이오.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왔소.”
“아이고, 감사합니다. 본교 곳곳에 급히 요청을 보냈는데 아직 어디에서도 소식이 없어서…….”
노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어 아이가 고개를 슬쩍 들더니 이내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헌데, 여기 오신 무사님들 다섯 분이 전부입니까?”
“그렇소만.”
“아…….”
노인의 표정이 다시금 굳었다.
“왜 그러시는 거요?”
그 모습에 적송이 물었다.
“그것이…….”
노인은 이내 다시 표정을 풀고 입을 열었다.
“상황이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하게 변하고 있어서 그럽니다. 실혼마인(失魂魔人)이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듯 날뛰고 있습니다. 구절귀환진(九絶鬼幻陳)을 이용해 밖으로 못 나오게 하고 있지만, 오래 막지는 못할 겁니다.”
그 말에 요림이 급히 물었다.
“구절귀환진(九絶鬼幻陳)? 그거, 백두광마의 손발을 묶을 수 있는 상급 진법이 아니오? 그런데 그걸로도 오래 막지 못한다고?”
그러자 노인이 아닌 아이가 대답했다.
“광마였던 실혼마인들이 강기로 보이는 공력을 투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끝도 없이 피어오르는 마공을 이용해서요.”
“뭐?!”
“이런!”
“아!”
그 말에 수하들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강기를 펼치다니.
그렇다면 절대고수란 말이 아닌가.
설휘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크게 당혹스러웠다.
사령대가 경직된 반응을 보이자, 주술복의 노인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음. 이 늙은이가 보기에는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예상합니다. 아마도 초검기(超劍氣)로 보이는 기운의 일종이겠지요. 하지만 그걸 쓰는 녀석은 하나만으로도 큰 위협이 되는데, 저 안에 있는 실혼마인은 모두 여덟이나 됩니다.”
“흠…….”
설휘는 노인이 자신들 뒤에 누가 더 없나 살폈던 것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지금 상황은 은영단장인 흑구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강기가 아닌 초검기를 쓴다고 해도, 그건 이미 초절정의 극에 올랐다고 봐야 했다.
더군다나 상대는 실혼인.
체력은 무한할 테고, 제조과정에서 사악한 사술이란 사술은 온통 동원됐을 터라 내공의 깊이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보통 강시나 실혼인에게 펼치는 사술은 독약과 사람의 피를 제공하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놈들은 사람의 정혈을 흡수해 극악한 마공까지 펼쳐낸다.
천마 제자들의 이권다툼에서 천마의 둘째 제자인 마후가, 기기아대 같은 주술 집단을 최우선적으로 흡수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가만…….”
설휘는 얘기를 듣던 중, 뒤늦게 발견한 글귀를 쳐다보았다.
노인이 아닌 아이의 머리 위에 이런 게 떠 있었던 것이다.
임무 받기 턴제 Lv2
‘턴제 Lv2?!’
저 괴상한 글자를 입으로 내뱉진 못하지만, 어떤 의미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일전에 시뮬레이션도 저런 글귀가 뜨더니 이전보다 훨씬 더 유용해져서 큰 도움을 받지 않았는가.
‘그럼, 어떻게 하면 저걸 가져오는 거지?’
다만, 임무 받기의 뜻이 어떤 건지 몰라 잠깐 고민했는데.
이게 너무도 쉽게 해결이 되었다.
“음. 저는 사령대장 설휘 님의 특급제자 음무기라고 합니다. 어르신, 우리가 어떻게든 막아보겠습니다.”
“특급……? 아, 정녕 그래 주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여기 계신 분은 은영단의 고수들 중에서도 가장 강하신 분입니다. 다른 협력자분들이 오시기 전에, 우리들만으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음무기의 말에 노인이 깊이 허리를 숙인 직후.
[임무를 받았습니다.]
[턴제가 Lv2로 업그레이드됩니다.]
[턴제 Lv2 효과]
자신과 상대의 피해를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수하들이 위기를 겪는 순간, 일시적으로 그들의 몸과 하나가 됩니다.
독심술의 능력이 더욱 향상합니다.
‘이건 또 뭐지?’
눈앞을 가리는 턴제 Lv2의 설명들.
하지만, 뜻을 모른다고 계속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대장! 갑시다!”
이미 출발한 조장들을 보며, 설휘 역시 발걸음을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