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더 높은 세상을 향하여 (3)
대체 어찌 알았을까.
실종된 마태룡의 종적을 추적한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바다.
하지만 그가 살아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애초에 화산파는 마교를 발견하는 족족 죽여대기로 유명했으니까.
설휘도 전생에서 마태룡과 만나지 않았다면, 그가 죽었을 가능성을 더 크게 점쳤을 터였다. 그런데.
‘나도 겨우 얼마 전에 마음을 먹은 것인데?’
그를 구출해서 데려감은 물론, 이후에 수하로 들여 심복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최근에 와서 떠올린 발상이다. 설휘조차도.
그런데 이 꼬마는, 대체 뭘 근거로 그런 추론을 한 것일까?
“제게 공간이동을 할 위치를 명하셨다는 건, 실종자를 발견했거나 단서를 찾았다는 방증입니다. 더욱이 제가 따르는 이유를 거듭 물어보시면서, 이번 임무의 점괘를 물어보신 것. 보통의 대화라면 자연스럽겠지만 거기에 어떤 의도가 있지 않을까, 라고 달리 생각해 본다면 이런 추정이 가능합니다.”
‘이 녀석, 천재구나.’
설휘는 새삼 느꼈다.
별것 아닌 대화에 몇 번이고 가정을 넣어, 질문자의 의도를 유추하는 방식.
아마도 이런 게 가능한 것은, 송화가 가진 점괘라는 사기적인 능력 때문일 터.
하지만 그 점괘를 단서로 받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속내를 파고들어 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장님.”
송화는 진지한 표정으로 설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칠사자는 이제자 곤마 님의 핵심무사입니다. 그들의 충성심은 남다르다고 들었습니다. 그중 한 명인 마태룡을 대장님의 수하로 삼기 위해선, 먼저 그의 충성이 예전과 같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물론이다.”
설휘가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었다. 곤마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가, 어찌 누구 밑으로 진심으로 들어갈 생각을 할까.
“그 말은, 그 조건만 만족할 수 있다면 포섭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다는 뜻도 됩니다.”
“어떻게? 초마에 오른 고수, 그런 고수를 내가 어찌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본교에서 수하들이 대장을 따르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소인의 생각으로는, 그중 제일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만족하거나, 그 이상을 실현해주는 자라는 것입니다.”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고, 목숨을 바칠 만한 자격이 되는 사람.
송화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그럼 나는 불가능하지 않느냐?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무공이 강해야 할 텐데?”
“글쎄요. 적어도 마태룡이란 분의 기준은, 무공의 고하와는 상관이 없을 겁니다.”
“왜지?”
“외람되오나, 곤마께서 무공이 강하시던가요?”
‘아!’
순간 설휘의 눈이 커졌다.
그랬다. 곤마는 무공이 강한 자가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딱 한 번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저 평범한 자가 아닌가.
“제 경우를 보자면, 저는 대장님과 함께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따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요.”
송화가 거기서 조금 더 말을 이었다.
“더 살 수 있다는 것. 그건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니까요. 미래, 앞날. 대장님은 제게 그런 존재십니다. 그래서 제가 따르는 것입니다.”
“…….”
누군가를 진심으로 따르게 하려면, 그에게 앞날과 미래를 느끼게 하라.
송화의 말에 설휘는 감탄했다. 어찌 어린아이가 이토록 현기 넘치는 말을 한단 말인가. 주술사들 사이에서 자라서 그런가?
“조언 고맙구나. 도움이 되었다.”
설휘는 내심 그 말을 깊이 받아들였다.
스윽.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길게 늘어진 숲속을 바라봤다.
이곳의 시야에선 보이지 않는, 화산파의 비밀분타가 있는 곳이었다.
“의식을 치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지?”
“예. 어디 가시렵니까?”
송화의 물음에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휴식을 취했으니, 이제 다시 움직여야 할 때였다.
“도주로를 정리하려 한다. 미리 처리해야 할 놈들이 몇 있거든.”
마태룡을 데리고 무사히 나오기 위해선 말이다.
* * *
역용술과 잠영투체술.
사람들의 이목을 속여 적진에 진입하는 무공들이다.
한쪽은 얼굴을 바꾸며, 한쪽은 신체를 일시적으로 줄이거나 늘린다.
하지만 이 무공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이것을 운용하다가 일격을 받으면 엄청난 내상을 입게 된다는 것.
또 하나는 기껏 펼쳐도 높은 경지의 고수에게는 발각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시전자가 상황에 맞게 적절히 잘 써야만 이 두 개의 기술은 빛을 발휘했다.
사삭.
설휘는 조심스레 화산파 비밀지부 안으로 파고들었다.
마침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시간상 저녁때라 은신술이 큰 도움을 주었다.
사박. 사박.
일단 어두워지기 시작한 때니, 자연스레 시야가 좁아진다. 지붕을 오를 때나, 지면을 걸을 때. 발걸음 소리만 조심하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거기다 창을 통해 내부로 들어갈 때, 골격을 비트는 잠영투체술이 큰 도움을 주었다.
스르륵.
지붕의 기와를 몇 장 벗겨내고, 들보 위의 좁은 공간으로 기어간 설휘.
그는 2각도 채 지나지 않아, 목표했던 방으로 보이는 곳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여기였지.’
기관진식이 있는 방은 두 곳.
하나는 마태룡이 포박되어 있는 자리. 또 하나는 그를 부축해서 이동했던 비상통로 인근.
이곳은 전자가 아닌 후자였다.
설휘가 이곳을 목표로 잡은 건, 마태룡을 데리고 도망쳤던 그때의 기억 때문이었다.
전생에 자신의 퇴로가 막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그곳에 있던 두 노인 때문이 아니었던가.
‘우선은 이놈들부터 제거한다.’
사박사박.
주변이 조용해질 때쯤, 설휘는 급히 문 앞에 달라붙었고, 곧 이 안에 그때의 노인들 중 하나가 있다는 걸 확신했다.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저장하시겠습니까?]
설휘는 선택 지문의 권유를 거부했다.
이깟 놈들에게 죽을까 고민할 정도라면, 애초에 이곳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장하지 않습니다.
설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이익.
방 안에는 조그마한 탁자로 보이는 것들이 즐비한 게 보였고, 그 위로는 값비싼 물건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금괴와 은괴도 보였다.
마치 이 근방의 돈을 모두 이 안에 가져다 놓은 것처럼.
“무슨 일이냐?”
그 너머에는 한창 금붙이와 은붙이를 살펴보는 깡마른 노인이 있었다.
뒤를 보지도 않고 묻는 게, 당연히 같은 화산파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여기도 진법이 걸려있을까?’
설휘는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전생에는 워낙 상황이 다급해서 또 다른 진법이 있는지 없는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AI를 불렀더니, 녀석은 엄청난 위력으로 건물 자체를 무너뜨리지 않았는가.
“아.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으…….”
그제야 고개를 돌린 노인.
설휘는 노인의 놀란 얼굴을 바라보며 곧장 전투방식을 바꿨다.
전투방식 턴제
동시에 노인의 능력치가 떴다.
[State Summary, 상태 요약]
구양진인 [화산파 서문관주(西門關主)]
체력 1100만/1100만
내공 880만/880만
경지 입신(入神) 초입
전투력 1999만~2888만
일전에 자신이 겨우 처리했던, 구염도장보다 전투력이 더 높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전생과는 달랐다. 고작 이 정도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으니까.
“빚을 갚으러 왔다. 구양진인.”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속으로는 분노가 치밀고 있었다.
-으드득!
놈은 당시 소령을 그의 눈앞에서 죽였다. 목이 꺾인 그녀가, 마지막으로 지은 얼굴. 천천히 빛을 잃어가던 두 눈은 아직도 그의 뇌리에 생생했다.
“뭐라고? 빚?”
당시의 설휘는 비굴하게도 AI의 뒤에 숨었다.
자신으로서는 힘이 미치지 못하기에, 그가 죽여주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지금의 자신은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그래, 빚.”
“귀하는 대체 누구신지……. 이 노부의 기억에는 없는 인물이오만?”
이제 와서 예의를 차리는 건가. 조심스레 한발 물러서는 깡마른 노인에게, 설휘는 입꼬리를 들어 보였다.
“네 기억에는 없어도 나는 있다. 저번에 진 빚, 이자까지 쳐서 두둑이 갚아주마.”
처억!
더는 말을 섞을 필요가 없었다. 설휘는 바로 출수할 준비를 했다.
* * *
절세고수.
흔히 정파에서는 화경에 오른 자, 마교에서는 극마에 오른 자라고 통칭한다.
삼화취정과 오기조원.
정수리에서 세 가닥의 정기가 꽃처럼 피어오르고, 신체 경맥에서 내기 수발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자.
이 수준이 되면 단전에 쌓인 진기의 양에 따라 환골탈태가 일어나기도 한다.
보통은 이를 신(神)의 경지라 하며, 적수가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입신의 경지는 바로 그 아래 단계다.
절정을 뛰어넘는 경지보다는 높지만, 신의 경지라 불리기엔 부족한 단계.
정파에선 이를 입신에 올랐다고 칭했다.
마교에도 이와 비슷한 단계가 있다.
마를 초월했지만, 아직 극복하지는 못한 경지.
그 경지를 흔히 초마라 불렀다.
“허어…… 이제 보니.”
구양진인은 입신의 경지에 올라있었다.
그의 전투력은 과거 상대했던 구염도장보다 훨씬 더 높았다. 그럼에도 설휘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전투방식 자유제
오히려 전투방식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더러운 냄새……. 마교의 개로구나.”
과연 입신인가. 딱히 마기를 흘리지 않았음에도, 상대는 이쪽이 누구인지를 눈치챈 듯 보였다.
드르륵.
노인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기대듯이 벽 한쪽을 눌렀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기기기긱.
대체 무엇을 건드렸는지, 갑자기 금은이 즐비한 탁자들이 바닥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제 두 사람이 마주한 자리는 평평한 바닥. 좀 넓은 창고 정도의 공간이었다.
‘지난번에 구염이 쓴 기관진식이 이것과 유사했는데.’
설휘가 신중히 그 흔적을 살피자, 노인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겁을 먹은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 간혹 이런 놈들이 있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기어들어오는 쥐새끼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독 안에 든 쥐가 되지. 우린 흔적을 남기지 않아.”
아마도 진법을 말하는 것이리라.
밖으로 소리가 새나가지도 않고,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르는 환경.
시전자가 죽거나 풀어주지 않으면, 절대 깨지지 않는 그런 공간이 진법이니까.
“이 노부에게 들려줄 말이 많아 보이는군. 어떻게 여기로 들어온 건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왔는지. 쉽게 쉽게 가자고. 어차피 네놈 입이 열리는 건 시간문제니까.”
구양진인의 자신감.
그 목소리를 듣던 설휘는 담담히 말을 되돌려주었다.
“심마환요진이 꽤 쓸 만하긴 하지.”
“……뭐?!”
순간, 노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얼굴에, 설휘는 피식 웃었다.
AI가 전생에 말한 것을 따라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말이야. 누구에게 더 좋은 걸까?”
설휘가 다시금 말했다.
“그야 당연히.”
노인은 놀란 표정을 풀고서 이내 눈을 내리깔았고.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때는.
“나에게지!”
이미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패애애액.
거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
과거라면 꼼짝없이 당할 정도의 신법이지만, 지금의 설휘는 달랐다.
카아앙!
반사적으로 그의 검격을 막아냈다.
그러자, 나름의 기습을 노렸던 노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놈 봐라? 나름 믿는 재간이 있었던 모양이군.”
아마도 실패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모양이다.
“허나, 너는 방금 실수를 했다. 방금만 해도 내가 너무 쉽게 여겨 방심을…….”
“거, 아침에 서긴 서나?”
그래서 설휘는 괜히 더 도발을 하고 싶어졌다.
“……뭐라고?”
말을 못 알아들은 구양진인. 하기야 도사가 어디 이런 시정잡배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나 있을까.
“늙으면 원래 양기가 입으로 다 몰린다지? 말이 긴 거 보니……. 거 참, 안됐어.”
“……!”
짐짓 시선을 내려 하체로 눈을 돌리자, 노인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이런 육시랄 놈이!”
카앙!
빠르게 설휘의 검을 밀쳐내며 두 발짝 뒤로 물러나자마자.
노인의 검술이 다시금 펼쳐졌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초식이 아니다.’
화산파 놈들의 주력인 매화검법이 아닌, 매서운 찌르기가 이어졌다.
설휘는 기다렸다는 듯 한 차례 받아냈다.
‘어?’
그리고 재차 이어지는 상대의 찌르기.
그걸 또다시 받아내려던 설휘가 일순 멈칫했다.
검 끝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본 것이다.
‘속임수? 허초다!’
단순한 찌르기라고 속인 후, 내력을 담아 일격을 쏘아내려고 한 것이다.
“흡!”
설휘는 검을 맞부딪치지 않고, 몸을 옆으로 틀어 흘려내는 것으로 대응했다.
파밧!
그러자, 순간적으로 노인의 발이 빨라지는 게 보였다.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노인이 검법을 쓰려 한다는 걸.
촤아아악.
구양진인이 수평으로 검을 휘두르자, 검기가 활처럼 휘어지며 공간을 갈랐다.
설휘는 옆으로 몸을 틀어 대응하려다가, 그게 불가능함을 느끼고 공중으로 뛰어 피해냈다.
“하압!”
그 순간 노인의 눈빛이 번뜩였다.
허공으로 부유하는 자신을 정확히 겨냥하여 재차 검기를 쏘아낸 것이다.
후에 알았지만, 이는 일자혜검(一字慧劍)이라는 무공이었다.
한 수에 오묘한 이치가 담긴, 그저 검기를 쏘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정확히 표적을 따라가는.
그래서 도저히 피할 수 없게 만드는 무공이었다.
투둑.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설휘는 그것마저 가까스로 피해내며 다시금 땅을 밟았다.
“이놈. 빙공을 쓰는구나.”
노인은 공격이 빗나간 이유를 바로 알아챘다.
이제껏 설휘가 검을 맞받아치면서 흘려낸 한기.
그것이 바닥으로 스며들었고, 그로 인해 일자혜검의 초식이 제대로 써지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그는 설휘의 위치보다 아래로 검기를 쏘아냈고.
덕분에 상대가 피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실력은 형편없군. 어찌 그따위 실력으로 겁 없이 이곳까지 들어왔는가?”
입가에 비웃음을 보이는 구양진인.
설휘는 되레 그 모습을 비웃었다.
“이봐,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나?”
“……무슨 말이냐?”
“쯧쯧.”
설휘는 웃었다.
“보통 강호의 선배에겐 세 번을 양보하는데, 난 무려 다섯 번이나 양보했다.”
“……이놈이. 어딜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냐!”
노인의 창노한 음성이 쩌렁쩌렁하게 방을 울렸고.
“그게 뚫린 입인지 아닌지, 이제 알게 될 거다.”
스윽.
설휘는 손목을 그었다.
그리고 뚝뚝 떨어지는 선혈을 손에 묻혀, 이어 눈에 흠뻑 묻혔다.
“곧, 네가 독 안에 든 쥐가 될 거거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휘의 시야가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