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미리 제거할 인물들 (2)
화산파 비밀지부로 오기 전, 설휘는 시뮬레이션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철군성을 만나고 정보를 받은 다음이었다.
“사흘째 저녁, 화산파 비밀지부에 있는 마태룡을 구출하기 위해서 미리 제거해야 할 인물들을 알려줘.”
지난 생에서는 세 노인이 자신을 가로막았기에.
AI의 조언도 있었고, 혹시나 더 대비해야 할 일이 있을까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결과는 이렇게 나왔다.
[제거해야 할 인물은 총 셋입니다.]
첫 번째, 구염도장
마태룡에게 결박해놓은 진법이 깨질 때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인물입니다.
이틀째 점심 이후부터 제거 가능.
두 번째, 구양진인
마태룡을 구출해서 이동할 비밀 통로에 있는 인물입니다.
이틀째 아침 이후부터 제거 가능.
세 번째, 구문도인
구양진인의 부름에 응답하는 인물입니다.
이틀째 저녁 이후부터 제거 가능.
다행히 예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당시 마태룡을 숨겨놓았던 구염도장.
그리고 진법이 풀린 뒤, 비밀 통로와 연결된 방에 있던 구양진인과 구문도인.
이 세 명은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인물들이었다.
‘이곳이다.’
설휘는 구염도장이 알려준 민가에 도착했다.
가까이 다가서도 저장하겠냐는 말이 나오지 않자, 그는 지붕 위로 올라가 몸이 들어갈 틈을 도려내어 들보를 밟았다.
서재로 보이는 공간 가운데,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아마도 이자가 구문도인인 모양이었다.
‘기습. 단번에 끝낸다.’
사박. 사박.
극도로 자세를 낮춘 설휘는 천장에 걸쳐진 들보를 기며 구문도인 쪽을 향해 이동했다.
천천히, 느리지만 신중하게.
그리고 마침내 노인의 머리 위에 도착했을 때.
“……누구냐!”
콰당!
벼락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슉!
시간 결박은 이미 펼쳐졌고, 설휘는 수직으로 떨어지며 그의 등허리에 검을 꽂아 넣었다.
푸욱!
“…….”
비명조차 없었다.
등에 칼을 찔러 넣은 행위. 그 동작 한 번으로 상대를 끝내버린 것이다.
‘시체는…….’
설휘는 조심스레 가장자리에 있는 바닥을 매만졌다. 그리고 오돌토돌한 나무 몇 장을 집어 드니.
달그락.
이전에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공간이 나타났다.
스윽. 툭.
그곳으로 구문도장을 집어넣고는 나무판자를 닫았다. 밖에 버린 구염도장과는 달리, 그들이 만든 곳에 시체를 숨긴 것이다.
“후…….”
마지막 세 번째 인물까지 제거 완료.
큰 짐을 던 기분이 되어 한숨 돌리는 설휘.
그는 천천히 깔리는 야음을 틈타, 들어왔던 지붕으로 다시 올라갔다.
‘이제, 주변을 살펴보자.’
하루 전에 미리 움직였던 이유.
시뮬레이션은 마태룡을 구하는 날을 기준으로 하루 전에 제거가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 이유만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지형 조사. 주변 지리를 살피기 위해 미리 움직인 것이다.
이전에 한차례 조사한 지도를 본 적이 있기에, 생각나지 않는 몇 군데만 돌아보면 금방 끝날 것 같았다.
* * *
고요한 새벽.
숲속 가운데 작은 터가 있었다.
오래된 나무 둥치를 파고들어 한쪽 벽을 대고, 임시로 만든 자리.
“다 됐어?”
“어. 모아보자.”
설휘에게 지형 조사를 명 받은 사령대 조장들.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시간 안에 겨우 완수할 수 있었다.
“와. 이게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되네…….”
각자 조사한 대로 지형도를 제출했고, 용진은 그런 그림 네 개를 합쳤다.
그러자, 이 근방의 모든 지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화산파 비밀분타와 비밀지부가 만나는 곳은 총 세 곳이야.”
적송이 말하자, 그 옆에 있던 요림이 대답했다.
“외부 병력이 들어왔을 때는, 여기 이 지점과 마주치겠는데?”
큰 개울가를 가운데 두고, 비밀분타로 이어지는 길의 두 곳.
외부에서 부대가 들어온다면 위쪽에서 만날 가능성이 가장 컸다.
비밀지부는 샛길이 많고 소로길도 제법 있어, 사실상 비밀분타의 아랫길에서 합류할 수밖에 없는 지형이었다.
“그런데 정말, 지원이 올까요?”
설휘가 지형 조사를 하라고 지시하자, 의견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설휘가 ‘우리가 살 길’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저 도망치기만 하려는 건 아닌 듯 보였다.
“음, 퇴각로라면 이렇게 넓게 조사하진 않지. 대장은 분명 우리 쪽에서 병력이 오리라 생각하는 듯해.”
요림이 말했다.
하지만 소령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뭐가 걸려?”
“……뭔가 이상해. 이번 일에 있어서 우리 사령대를 지원해주는 다른 부대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은영단 말고 다른 부대겠지.”
“다른 곳도 없다고. 출발하기 전에 이미 알아봤거든.”
소령의 말에 요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대장이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분명히 조력자들이 올 거라고 했잖아.”
“조력자? 하긴, 도와주는 이들이 반드시 우리 편이라는 법은 없지.”
문득 소령이 묘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편이 아니면, 누가 우리를 도와준다고?”
“그건…….”
단순히 짐작이기 때문일까.
소령은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걸 주저하고 있었다.
“와……!”
그때였다.
바바바박!
멀리서 미친 듯이 주파해 오는 한 인영.
그는 지척까지 다가오더니, 엄청나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해냈어. 내가 드디어 해냈다고!”
“……?”
다들 의아한 듯한 표정을 보이자, 그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신병이기의 특수능력 말이야. 사실, 앞선 동작은 필요 없는 것이었어. 개구리 동작은 하지 않아도 발동되는 거였다고!”
잔뜩 고무한 표정의 음무기.
이토록 굉장한 것을 알아냈다는 뿌듯함도 함께 서려 있었다.
“……자네, 말 안 해줬나?”
요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용진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크흠.”
모른 체하는 용진.
분명 설휘는 용진에게 불필요한 동작을 제외하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사령대 조장들이 듣는 곳에서 음무기의 불필요한 동작도 함께 말해두었다.
그런데 지금 음무기의 말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것 같았다.
“나중에 알려주려고 그랬다고. 정말이야.”
“으하하하! 됐어! 이제 꼴사나운 짓 하지 않아도 된다!”
음무기는 환희에 잠겨 그런 대화를 듣지도 못했다.
그 모습에 요림과 적송은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그나저나, 음무기.”
“어.”
“지도 내놔봐.”
때마침 소령이 손을 내밀자, 그는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러고는 품속에 있던 양피지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왜? 어떻게 했는데?”
모두의 시선이 음무기의 양피지로 쏠렸다.
지도의 그림은 간단했다.
산은 산(山)이란 표시.
강은 강(江)이란 표시.
길은 로(路)라는 표시.
그 외엔 등고선 같은 것들을 색칠이나 진하기로 표시했다.
“이게 뭐야…….”
“아니, 왜? 그래도 알아볼 수준은 되는데?”
“너 인마. 대장께서 오시면 분명 지적을…….”
“저기 오시네.”
설휘가 걸어오는 것을 본 수하들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그들에게 송화가 가장 먼저 인사를 했다.
그렇게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벌써 다 조사를 한 것이냐?”
“옙.”
“그럼요.”
설휘의 물음에 수하들이 하나둘씩 대답했다.
과연 사령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히 일을 해 준 모양이다.
“좋아. 시간 여유를 조금 가질 수 있겠군. 우선 이것부터 보자꾸나.”
설휘는 품속에 있던 지도를 한 장 펼쳐 수하들에게 내밀었다.
화산파 인물 셋을 암살하고 돌아오는 길에 챙겨본 주변 지역의 지도였다.
“어, 이곳은……?”
가장 먼저 본 음무기가 곧장 알아차렸다.
비밀분타와 완전히 다른 지형이라는 것을.
“비밀지부다.”
“와. 하루 만에 이걸 다 하셨습니까?”
용진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설휘가 그려온 지형도는, 자신들이 조사한 곳보다 훨씬 더 넓었다.
심지어 적지 한가운데.
이 정도로 자세하게 지리를 알 정도면, 임무는 이미 반쯤 성공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우선 여길 보거라.”
설휘가 한 건물을 찍었다.
“이곳에 마태룡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방 안에 포박되어 있는 겁니까?”
“그보다 더 깊은 곳에. 방 안으로 들어가면 기관진식이 있다. 그걸 작동시키면 된다.”
설휘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고 묻는 이가 없었다.
대장의 능력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신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진법이 하나 더 있다. 마태룡을 구출해서 이곳, 비밀 통로로 나가는 길에 여기를 조심해서 이동하면, 이 통로는 이쪽 건물과 연결이 되어 있다.”
스윽. 스윽.
다른 건물을 가리키자 수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소령이 물었다.
“그럼 이곳에서……?”
“그래. 공간이동을 할 생각이다.”
설휘는 시선을 돌렸다.
“송화.”
“예.”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지?”
“최소 반 각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공간을 넘어서는 술법이니만큼 사전 준비가…….”
“알았다. 그때까지 우린 여기서 버틴다.”
그 말에 다들 표정이 굳었다.
진법을 해제하면 내부에 있는 화산파 놈들이 알아차리게 될 터.
“음, 송화야? 네 이동술을 미리 펼쳐두는 건 어떻겠냐.”
적송이 물었다.
적지에서 몰려드는 적을 맞아, 최소 반 각의 시간을 견디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어떤 고수가 있을지, 또 어떤 위험이 더 있을지 모르는 터에.
그에 송화가 말했다.
“어, 그게…… 제가 이동술의 준비를 하는 동안, 본교 특유의 기운이 퍼집니다. 화산파 같은 도문의 명문이라면, 분명 이상함을 알아챌 겁니다.”
“이런…….”
“그래도 마태룡의 진법을 해제하는 순간 바로 발동하면, 그만큼 시간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그 정도는 줄일 수 있을 거다.”
설휘가 동의했다.
“혹, 저들이 몰려올 때의 대비책은 있으십니까?”
음무기가 물었다.
지금까지 놀라운 것들을 알아내고 조사해낸 사부.
그러니 이번에도 놀라운 방법을 알려주지 않을까 하고.
“그건 그때 가서 알려주마.”
설휘는 그런 음무기를 향해 미묘하게 웃어 보였다.
* * *
아침이 밝아오고, 수하들이 다들 체력 비축을 위해 취침을 하는 사이.
사박.
설휘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틀렸군.”
떨어지는 나뭇잎은 좀처럼 예측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한 번씩 나무줄기를 발로 찬 뒤, 수십 개의 나뭇잎을 보고 예측을 해봐도.
거의 맞추지를 못했다.
‘다시 돌아왔나.’
반나절.
시간이 지나고 시뮬레이션을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시간.
설휘는 최근 궁금한 걸 계속해서 시뮬레이션을 사용해 확인해 두었다.
그런데 시뮬레이션의 약점이라고 할까.
과거의 수는 매우 정확하게 읽는 반면, 미래에 일어날 일은 예측하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렇게 물었다.
“마태룡을 구할 최적의 시간대가 언제일까?”
시뮬레이션이 돌고, 꽤 오랜 시간을 거친 끝에.
그것이 곧 결과를 토해냈다.
변숫값이 너무 많습니다.
정확한 시간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이 괜히 마음에 걸리는 설휘였다.
“변수라…….”
줄일 수 있는 한에서는 다 줄였다. 그래도 어찌 될지.
* * *
그날 초저녁. 설휘는 수하들과 함께 빠르게 움직였다.
사사삭. 사삭.
소령과 용진, 음무기는 비밀통로가 있는 방에 진입했고, 나머지는 마태룡이 숨어 있던 건물로 향했다.
설휘는 이전처럼 천장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방 안에는 화산 제자 다섯이 있었다.
스윽.
설휘는 송화에게 대기하라는 신호를 준 뒤. 적송과 요림에게 손짓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설휘가 먼저 움직였다.
“헛!”
“아!”
“어?”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반응하는 세 명의 화산파 제자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추가적인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설휘는 재빠른 속도로 세 명의 목에 검기를 쏘아냈고.
“컥!”
“큭!”
“읍!”
곧장 바닥에 쓰러졌다.
“윽!”
“헉!”
그리고 이어진 두 명의 짧은 단말마.
적송과 요림이 남은 녀석들을 처리한 것이다.
투투툭.
설휘가 기억해둔 기관진식을 건드리자, 요란하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드드득. 끼기이익.
“대장…….”
너무도 능숙한 움직임 때문일까.
설휘가 기관진식을 해제해버리자, 사전에 이미 전해 들었음에도 수하들은 매우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설휘가 그런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정신 바짝 차려. 여긴 적진이다.”
“죄송합니다.”
“옙.”
곧이어 문이 열리자 계단이 나왔고, 송화가 조심히 바닥을 밟자, 설휘와 일행은 안으로 들어갔다.
“아…….”
그리고 곧 거대한 벽이 그들을 막았다.
거기서 설휘는 시뮬레이션을 발동시켰다.
“눈앞의 진법을 파훼하는 방법을 알려줘.”
이전에도 여기서 진법을 해제한 적이 있지만, 과정이 무려 열 번을 넘는 까닭에 모두를 기억해내지는 못했다.
자, 아래에 표시하는 위치에 손을 맞댑니다. 수열로 계산된 위치에 일정량의 내공을 주입하면 됩니다.
지문을 보니 기억이 났다.
그래서 이전처럼 주입하니.
목환상미로진(目幻想迷路陣)이 해제되었습니다.
진법 파훼에 성공했다는 문구와 함께, 마태룡이 보였다.
이윽고 선택지가 떴고.
당신의 미래를 위해 어떤 판단을 내리시겠습니까?
▶ 데리고 간다.
▷ 놔두고 간다.
‘데리고 간다.’를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와.”
쇠사슬이 잘려나가자, 설휘가 남자를 급히 안아 들고 외쳤다.
* * *
삐익! 삐이익!
일행이 비밀통로로 접어들었을 때는 이미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도처에서 들려오는 호각 소리. 그리고 사람들이 소리치며 우르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
잔뜩 긴장한 용진과 음무기, 소령이 그를 불렀다.
뒤늦게 온 수하들도 상황이 어떤지를 예감하고 있었다.
반면에, 송화는 열심히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외부의 소리나 긴장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그만큼 이 진법이 펼쳐내기 어려운 것이리라.
‘이 선인가…….’
설휘는 수하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원 진처럼 그어진 곳.
발동하는 시간에는 꼭 이 안에 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적진에 홀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대장! 이제 비법을!”
음무기가 다급히 물어오자, 설휘는 새벽에 그가 건넸던 질문이 떠올랐다.
대비책이 있느냐, 하는 것.
“버텨보자.”
“예?”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멍한 표정으로 변한 음무기.
설휘는 그런 음무기 앞에 섰다.
투닥투닥!
사람들이 운집하는 듯 문 앞에서 이런저런 고성과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고작 오 분(五分) 정도만 버티면 된다고.”
그 말을 끝으로.
드드득!
“적이다!”
“쳐라!”
문짝이 뜯어지며 좌, 우, 앞, 뒤, 그리고 천장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화산파 인원들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