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탈출 (1)
상황은 과거와 달랐다.
그때는 지금처럼 적들이 사방에서 득달처럼 달려들지 않았다.
아마도 달라진 환경 탓일 터.
전생엔 비밀 통로로 이어지는 방에 두 노인이 대기하고 있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들 스스로 제압하리라 여겼을 테고.
설명 그렇지 못하더라도 전투가 발생하는 사이,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을 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방위에서 건물을 부수기까지 하며 미친 듯이 달려들 줄은 설휘도 예상하지 못했다.
[수라폭열공을 사용합니다.]
정면의 입구가 부서지며 서너 명의 무사들이 달려오자, 설휘가 빠르게 발동시켰다.
순간적으로 내린 판단이었다.
이렇게 포위하며 공격해 들어오는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압도적인 무위로 기세를 찍어누르는 게 가장 효과적이었다.
콰아- 콰와- 콰와- 콰앙!
“으악!”
“악!”
“우와악!”
검을 내지른 방향으로 터지는 네 번의 폭발.
그런데 지금 그가 펼친 수라폭열공은, 평소의 그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이유가 있었다.
설휘는 단순히 특수 기술만 펼친 게 아니었다.
수라폭열공에 사대극마공에서 기를 증폭시키는 무공인 풍전격세(風前擊勢)를 가미했다.
수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 깨달은 사실 하나.
특수 기술은 기존의 무공과 함께 펼쳐내는 게 가능했다.
콰아아아앙!
그리고 앞선 네 번의 폭발보다 더 거대한 폭발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로 인해 건물 반이 통째로 뜯겨 나갔고, 그 결과 무려 여덟의 인원이 화마에 쓸려 몸 전체가 증발해버렸다.
“……!”
“……!”
“……!”
설휘의 압도적인 무공은 사방에서 덤벼들던 무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좌, 우, 뒤에서 건물을 부수며 달려드는 무사들의 발을 멈추게 만들었고.
“으악!”
“컥!”
“악!”
그 찰나, 천장을 부수고 떨어지던 화산파 놈들은 사령대 조장들의 일격에 손쉽게 제거되었다.
“하압!”
슈슈슈슈슉!
특히 요림은 신병이기의 이능을 사용해, 적들이 접근해 오기도 전에 모조리 즉살해버렸다.
스으으으-
전운이 감도는 중에 갑작스럽게 생겨난 정적.
이 고요함은 적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설휘의 무위로부터 오는 공포감은, 그들의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전투방식 턴제 Lv2
그사이 설휘가 전투방식을 바꾸었고, 일순 수많은 수치가 그의 시야로 몰려들었다.
Lv2가 되며 한층 더 강화된 능력.
단순히 설휘의 시야뿐만 아니라, 언덕에 가려진 곳까지 제3자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설휘는 그런 능력치들을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20만……. 50만, 100만…….’
역시나 앞서 달려들었던 놈들의 전투력은 높지 않았다.
그보다 뒤 열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
그들이 진짜였다.
전투력이 죄다 100만을 넘어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주의해야 할 인물들도 몇 보였다.
정면에 보이는, 일대제자 십여 명 뒤에 서 있는 중년인.
일대제자를 지휘하는 놈으로 보였다.
전투력 2699만
턱수염이 길었고, 눈은 작았다.
거기다 단구였다.
하지만 눈에 기광이 가득 서려 있는 것이, 확실히 만만치 않은 녀석임을 방증하고 있었다.
전투력 1888만
그리고 대각의 시야에 있는 인물로, 불쑥 튀어나온 돌담에 서 있는 노인이 눈에 띄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흰 턱수염이 왠지 도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전투력 2255만
좌측, 다른 건물의 지붕을 밟고 서 있는 장년인.
기골이 장대해서인지 풍채에서 느껴지는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눈빛은 적막해 보였으나, 얼굴빛에서는 노기가 느껴졌다. 그는 이 상황이 상당히 불만스러운 듯, 입을 쩝쩝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셋보다 더 눈길이 가는 노인이 있었다.
‘저 녀석이 대장인가.’
[State Summary, 상태 요약]
구온진인 [화산파 북문관주(北門關主)]
체력 7500만/7500만
내공 6600만/6600만
경지 입신(入神)
전투력 3000만/최소치/
자신과 싸웠던 인물들 중 최강자.
칠사자 중 하나인 서무귀보다 더 강한 것으로 보였다.
전투력은 3천만 이상이어서 나타나지 않았지만, 체력과 내공을 보면 확실히 위험한 인물인 게 틀림없었다.
‘저 녀석이 안 덤비길 빌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적은 강했다.
“일대제자가 전선에 서고, 다른 이들을 모두 빠져라.”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기 때문일까.
이들을 지휘하는 중년인이 외치자, 반파된 건물 사이로 화산파 제자들이 우수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쪽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일대제자들이 곧 앞 열에 섰다.
숫자는 대략 서른 명.
전투력은 평균적으로 200만과 300만 사이가 제일 많았다.
“시간은 얼마 남았나?”
설휘는 원 진 중앙에서 눈을 감고 있는 소년에게 물었다.
송화가 곧장 대답했다.
“아직 4분 남았습니다.”
시간을 확인한 설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요림에게 지시했다.
“요림, 네가 정면에 서거라.”
“허면 대장께서는…….”
“아무래도 시선을 끌어야겠다.”
한 명 한 명은 그리 강하지 않으나, 일대 제자들이 동시에 달려들면 생각보다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럴 때는 자신이 홀로 나가 시선을 끌어주는 게 주요할 수 있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저기 장로로 보이는 인물들도 있는데…….”
“괜찮다. 시간이 임박하면 알려다오. 그리고 용진.”
“예, 대장.”
설휘를 대신해 마태룡을 업고 있던 용진이 대답했다.
“잠깐 도 좀 빌려줄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어차피 마태룡 때문에 싸울 수 없던 그는 설휘에게 도를 건넸다.
때마침 의식이 돌아온 마태룡이 물었다.
“대체, 너희들은 무슨 생각인 건가.”
그에겐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도망치지 않고 한데 모여 있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저리 많은 적을 향해 홀로 가려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그런 행동을 모두 묵인하고 있는 것도 그랬다.
“그럼 나중에 보지.”
설휘는 마태룡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고는, 팔등을 검으로 그었다.
투툭.
그러자 피가 흥건히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이후 설휘는 용진의 도를 어깨춤에 묶고는, 눈앞을 가리는 수많은 수치들을 제거했다.
전투방식 자유제
전투방식을 바꾼 것이다.
* * *
파앗.
설휘가 정면으로 도약하며 달려들자, 그곳에 모여 있던 일대제자들은 당황했다.
조금 전의 가공할 마공을 다들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설휘가 펼친 건 전혀 다른 무공이었다.
[초풍신을 사용합니다.]
설휘가 펼치자마자 거대한 기의 폭풍이 지축을 흔들며 쏘아져나갔고, 서너 명이 그대로 바람에 쓸려나갔다.
그중 두 명은 일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초풍신을 사용합니다.]
[초풍신을 사용합니다.]
[초풍신을 사용합니다.]
설휘의 손놀림은 거침없었다.
바닥을 디딘 직후, 숨 쉴 틈도 없이 세 방향으로 다시금 쏘아냈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무공.
거기다 방사형으로 쏟아져나가니, 주춤하거나 조금 반응이 늦었던 일대제자들은 죄다 휘말리고 말았다.
결국 정면에 서 있던 일대제자 십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만 것이다.
“물러서라!”
보다 못한 이들의 책임자, 단구의 중년인이 나섰다.
그는 외침과 동시에 곧장 신법을 펼치며 설휘를 향해 전광석화처럼 달려나갔다.
‘기다리고 있었다.’
고오오오-
그의 움직임을 본 설휘는 곧장 검을 원형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검 끝에서 새하얀 운무가 펼쳐지며 주변의 모든 것을 얼려버렸다.
그로 인해 기습하려던 단구의 중년인은 순간적으로 주춤했고, 그사이 수많은 빙공이 쏘아지며 그의 움직임을 더욱더 옥죄였다.
설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수라폭열공을 사용합니다.]
콰콰콰콰- 쾅!
“크아아아악!”
단 한 번.
그걸로 충분했다.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서, 꽤나 강했던 중년인의 목숨이 그대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게 뭔…….”
정면에서 지켜보던 요림은 입을 쩌억 벌렸다.
대체 얼마나 강한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저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지상에 있기는 한 건가 싶을 정도의 폭발력이었다.
“내공이 무한한 사람처럼 보여…….”
가운데서 송화를 보호하던 소령도 감탄을 거들었다.
사대극마공의 초풍신이라 불리는, 저 가공할 무공을 끝도 없이 사용했다.
그에 더불어 빙공에 이어 화공까지.
최상급 수준의 광범위한, 많은 내공을 요하는 무공을 연속해서 사용했다.
그러니 수장으로 보이는 적이 저토록 허망하게 당하는 상황도 나온 것이었다.
화공을 쓰는 자기에, 당연히 빙공을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그 고정관념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었다.
“저자는 대체 누구냐…….”
마태룡도 그 장면을 보았는지, 체력이 바닥난 상황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경험에 차이가 있을 뿐, 사령대 조장들이 가진 감정을 그라고 느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사령대의 대장이지요.”
음무기가 말했다.
“사령대장이란 말인가?”
“그렇소.”
“그걸 지금 믿으란 말이냐?”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이 알아서 판단하고.”
음무기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조장들은 다들 동의했다.
이곳을 통솔하는 자가, 드디어 나서려고 한다는 걸.
* * *
“모두 물러나라!”
그때였다.
좌우측에서 고수로 보이는 노인들이 달려들 때쯤, 노호령이 떨어졌다.
그 목소리와 함께 일대제자들은 죄다 뒤로 물러났다.
구온진인이 도약했고, 설휘와 삼 장의 거리를 두며 땅을 밟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마교 놈들이 침입해 온 것이냐.”
“마교 놈들이라고?”
그 말에 설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주, 위선자 납셨네.”
“……?”
“마교랑 손을 잡은 건 너희들이 아니냐.”
“……뭐?”
뭔가 당황한 것 같은 표정.
그 모습은 설휘에겐 더없이 역겹기만 했다.
“와라, 검으로 말하지.”
설휘는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공간이동이고 뭐고, 이 녀석만 죽이면 사실상 끝나는 싸움이었다.
“건방진.”
상대는 당연히 비아냥댔고, 이내 신법을 펼치는 걸 확인했다.
그 순간 발동시켰다.
[빙공극저하를 사용합니다.]
시간이 극도로 느려졌다. 설휘의 목표는 명확했다.
오로지 구온진인이라는 놈.
저놈만 죽이면 모든 게 끝난다.
설휘는 그런 생각으로 느려진 시간 속에서 그를 향해 질주했다.
사아아아-
설휘가 한 발을 움직이는 데 반해, 적의 움직임은 미미했다.
그렇게 좁혀진 거리에서.
설휘의 칼이 그의 복부를 향해 거침없이 찔려 들어갔다.
콱!
그 순간 시간의 결박이 풀렸고, 구온진인은 복부를 잡고 물러섰다.
입가에 역혈로 피가 맺혀 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눈빛은 살아 있었다.
‘젠장. 정확히 급소를 노리는 건 쉽지 않구나.’
결과적으로 반은 성공, 반은 실패였다.
분명 적에게 피해를 주긴 했는데, 원하는 걸 얻지는 못했다.
상대가 완벽하게 멈춰 있지 않은 탓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움직임의 속도가 간헐적으로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는 신법의 특징으로 볼 때, 제아무리 시간의 흐름을 극도로 늦춘다 해도 정확한 급소 자리를 노리기는 설휘로서도 쉽지 않았다.
특히나 구온진인 같은 초고수에겐 말이다.
확실히 적에게서 도망치거나 상대의 공격을 막는 것과는 효율성 측면에서 조금 부족했다.
“이노옴!”
피해를 꽤 입은 탓인지, 상대는 쌍심지를 켜고 다시 달려들었다.
“하압!”
설휘는 곧장 빙공을 펼쳤다.
해무.
이전 중년인을 죽일 때와 같은 방식으로 상대했다.
‘어?’
그런데 구온진인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게, 그의 동선에서 어찌 된 일인지 해무가 밀려나는 게 보였고.
자신을 향해 쏘아대는 검기도 볼 수 있었다.
파파팟.
설휘가 옆으로 도약해 상대의 기공을 피하자.
“아합!”
이번엔 자신이 바닥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다가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기회.’
하지만 그건 설휘 역시 바라던 바였다.
상대의 검을 막아낸 순간, 자신은 이미 준비를 끝마쳤다.
그렇게 막아냄과 함께 발동시킨 특수 기술.
이것 역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반격 기술이었다.
[초풍신을 사용합니다.]
“……!”
고오오오.
거의 지척에서 청색 기류가 생성되자, 경악하는 구온진인의 얼굴이 보였다.
지축을 흔드는 충격파와 풍압이 솟구쳐 올랐고, 정확히 그의 몸을 직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