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금선탈각(金蝉脱殻) (1)
한편, 마태룡은 극도로 집중해서 운기조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똑. 똑. 똑.
관절에서 콩 볶는 소리가 났다.
한 줌도 안 됐던 미약한 기운들은 어느새 단단해진 단전을 중심으로 강하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임·독맥을 통해 수백 번의 주천(周天)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우드드득!
그리고 곧 전신의 경맥이 열리자, 온몸 구석구석으로 진기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분명 단전이 일부 깨어졌는데…… 깨끗이 회복되었다.’
마태룡은 자신의 몸에 생겨난 변화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스스로 적진에 들어가 포로가 되었을 때.
그는 죽음을 각오했다.
비록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일제자와 이제자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히 보답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각오했다는 게 꼭 죽고 싶다는 건 아니었다.
죽기를 각오했음에도, 숱한 고문으로 인해 단전이 부서지고 말자 극심한 회의감과 후회가 떠올랐다.
목숨을 버릴 각오도, 애초에 무인으로서 살았기에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단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더는 그 무인으로 살지 못하고 폐인이 되었다는 것.
아마 그런 회의감 역시 상대의 의도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고문으로 포로의 기를 꺾고,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면.
순순히 모든 것을 털어놓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의 이 몸 상태는 뭔가.
“으음.”
단전도 그렇지만, 오랜 시간 고문을 받아 저하된 체력도 거의 다 회복되었다.
그것도 단 한순간에.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인지, 마태룡은 본인이 직접 겪고도 아직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 믿어주시겠습니까?”
설휘, 자신을 치료한 자.
그는 스스로를 은영단 사령대의 대장이라 했지만, 마태룡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가 보인 무위는 은영단의 단주라 해도 흉내조차 못 낼 수준이었다.
그런 자가 고작 단내 사령대의 대장?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애초에 날 구출하러 왔다는 것도…….’
당장 자신만 해도 칠사자 중 하나.
그런 그도 감당이 안 되어서 화산파의 비밀 지부라는 사지로 스스로 걸어 들어왔는데, 그 사지를 정면으로 돌파해서 벗어날 수 있는 무력이라니.
그리고 그런 무력을 지닌 자가 고작 사령대장으로 머무르고 있다니.
이쯤 되면 농담이라도 맘 놓고 웃지 못한다.
그래서 뭔가 계략을 짜서 자신을 속이려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제가 계략을 짜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흐음…….”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를 믿지 않으면 어찌할 텐가.
속내는 모르겠지만, 설휘는 분명히 능력자다.
마태룡 자신을 구출해 온 것뿐 아니라, 신비한 약으로 치료까지 해주었다.
큰 틀에서 보자면, 같은 사제자 곤마 님의 수하라면 마땅히 할 일들이다.
어쩌면, 역량이 너무 뛰어난 것에 자신이 지레 경계를 하는 것인지도.
‘저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운기조식을 끝낸 마태룡은 한쪽 돌담에 등을 기댄 채 명상에 잠긴 사내를 바라봤다.
듣기로는 이제자 마후의 병력들이 곧 몰려온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선 빨리 도망치는 게 답이 아닌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기에 저렇게 앉아만 있는 것일까.
투욱. 툭. 툭.
그때였다. 정찰 나갔던 그의 수하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 주변에 화산파 병력이 속속 집결하고 있습니다.”
“백 명이 훌쩍 넘는 숫자입니다. 이곳 비밀지부 쪽뿐만 아니라, 비밀분타 쪽에서도 합류한 듯 보입니다.”
“저편에서 흑의를 입은 인원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추정컨대, 이제자 마후의 병력으로 보입니다.”
용진과 요림, 적송이 차례대로 보고했다.
과연 AI가 말한 대로였다.
이제자의 수하들이 일거에 몰려오고 있었고, 비밀지부와 분타에 있던 화산파 놈들이 다 같이 충돌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음…….”
설휘는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다시 그들을 보며 물었다.
“너희들은 어찌하면 좋겠느냐?”
“그냥 여기 계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마침 크게 눈에 띄지도 않은 곳이라.”
용진이 먼저 말했다.
“나는 반대야. 이런 대규모 싸움은 몇 번의 큰 충돌 후 여러 갈래로 쪼개지게 되어 있어. 그리되면 병력 일부가 이곳으로 올 가능성이 있다고.”
적송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세력과 세력의 다툼은 모난 공과도 같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저 고수 몇 명이 싸우는 게 아닌, 수백이 넘어가는 대규모 싸움에는 반드시 부수적인 피해가 발생한다.
전방위 각개전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럼 지금 빨리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음무기가 말하자, 이번엔 요림이 고개를 저었다.
“움직인다고 해도 지금은 아냐. 당장은 양쪽의 경계심이 극도로 높을 터. 몸을 빼려면 저 둘이 부딪히면서 정신이 없는 틈에 움직여야지.”
“그때가 언젠데?”
“글쎄. 나도 모르지. 하지만 싸움이 나면 곧 알게 될걸? 시끄러워질 테니까.”
요림의 말에 대부분이 끄덕였다. 하지만 거기서 소령이 이의를 제기했다.
“꼭 움직이는 게 좋다고 할 수는 없어. 만약 화산파나 이제자 중 한쪽의 병력이 월등하다면……. 오히려 그들은 사방을 경계하며 살필 터, 그럴 때에 우리가 도주하는 걸 봤다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으음.”
일리 있는 말이었다.
화산파는 당연히 자신들을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을 테고. 이제자는?
그들은 그저 단순하게 아군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을까?
“그럼 어떻게 하잔 거야?”
“뭐, 대장이 결정하시겠지.”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자연스럽게 설휘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설휘의 시선은 한 소년을 향해 있었다.
“송화야.”
“예. 대장.”
“주술사끼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느냐?”
“……아니요.”
“그럼…….”
설휘는 슬쩍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시뮬이 말한 건, 이것이겠군.”
“……?”
“공간이동의 흔적. 매우 높은 수준의 술법을 썼다는 걸, 주술사들은 이걸 보고 알아본 거군.”
“아.”
송화는 눈을 껌뻑였다.
확실히, 공간이동을 펼쳐낸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니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아직 의식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만, 그걸 주술사도 아닌 설휘가 어떻게 안 것인지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자 세력 중에 기기아대란 부대가 있지?”
음무기의 말에 수하들은 뒤늦게 떠올렸다.
송화가 분명 기려사대의 걸출한 인재이기는 하나, 기기아대야말로 본교의 주술과 비술을 사용하는 존재들.
만약 여기에 그들 중 일부가 왔다면, 자신들의 위치 정도는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무조건 자리를 옮겨야겠군.”
팔짱을 끼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마태룡. 그가 처음으로 한 말에 다들 동감했다.
지금 여기에 있다간 누가 됐든 무조건 맞닥뜨리게 될 터였으니까.
이제자든, 화산파든, 아니면 일제자의 병력이든.
“대장. 허면, 어디로……?”
설휘는 이미 일어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밀지부로 간다.”
“예?”
“무슨?”
“어디요?”
“……?”
수하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설휘를 바라보았다. 마태룡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설휘의 생각은 확고했다.
“아무래도…… 이 판을 흔들어야겠어.”
* * *
등하불명.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조금 전에 들어가서 한바탕 들쑤셔놓았으니, 비밀지부에 있는 화산파 세력은 잔뜩 화가 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면밀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을 터.
아니면, 이제자의 병력을 상대하러 갔을 상황이다.
해서 설휘는 그 허를 찔러, 급습했던 비밀지부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성공만 하면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될 터.
우선은 은밀히 산을 타고 이동하며, 화산파 제자들과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한 마리도 보이지 않네…….”
조심에 조심을 거듭한 덕인지, 이동 중에 화산파 놈들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주변을 이 잡듯 뒤지느라, 이미 대부분의 병력이 이곳을 빠져나갔을 테니까.
인근 민가 대부분은 거의 다 비어 있었다.
“여기다.”
설휘는 적당한 민가 앞에 도착하여 수하들을 불렀다.
그리고 수하들이 자신의 옆에 다다랐을 때쯤 다시 말을 꺼냈다.
“모두, 내게 병기를 다오.”
“예?”
“……?”
수하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설휘는 굳이 납득시키려 하지 않았다.
“어서.”
그렇게 수하들의 신병이기를 모두 모았다.
설휘는 도구함을 열어 신병이기들을 빠르게 그곳에 넣었다. 더불어 자신의 검과 벨트, 신발도 함께 넣었다.
“대장?”
“방금 뭡니까? 신병이기가 전부 사라진 거 같은데?”
수하들이 한마디씩 했지만, 설휘는 대답이 없었다.
도구함 안을 다시 확인한 그는 민가 문 앞에 바짝 다가섰다.
그러자.
저장하시겠습니까?
기다렸던 문구가 나왔다.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8년, 7월 마지막 날.
■ 천력 95년, 제3장-8. [핵심무사 성공] 폭풍성장기(Bonus Story) 1년 차
‘이번엔 어디에다 저장을 하지?’
잠깐 고민했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첫 번째 선택지는 만약을 대비해 남겨놔야 했다.
두 번째 역시 마찬가지, 저기에는 상상도 못 할 금액의 신병이기가 있다. 훗날을 위해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세 번째구나.’
그렇게 선택하니.
■ 천력 98년, 본 스토리_첫 번째 탈출 미션(1)
이런 글귀로 저장되었다.
“자.”
그리고 설휘는 도구함에 넣었던 걸 다시금 꺼내주었다.
수하들은 병기가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기현상에 놀라 물었지만.
“차차 알려주마. 나중에.”
설휘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음…… 뭐.”
수하들은 반쯤 체념하며 받아들였다.
이제껏 설휘가 영문 모를 행동을 한 게 한두 번이던가.
미래를 예측하는 발언도 그렇고, 기이한 공능을 가진 신병이기를 가져온 것도 그렇고.
“대장, 우린 이제 어찌합니까?”
팔락!
체념한 적송의 물음에, 설휘는 한쪽 지도를 폈다.
“이곳으로 가자.”
가장 남쪽에 위치한, 전생에서 수하들이 마태룡을 숨겨놓았던 그 지점을 가리켰다.
“예? 더 퇴각하지 않고요?”
“그래.”
음무기의 물음에, 설휘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자 이제껏 말없이 보고 있던 마태룡이 끼어들었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군.”
웬만해선 굳이 나서지 않으려던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마후의 수하들이 이길 확률이 크다고 해서 안심하지 마라. 그들은 우리 편이 아니니, 언제든 이를 드러낼 수 있다.”
화산파가 이기든, 이제자가 이기든 위험한 건 똑같았다. 병력이 줄어든다고 해도 안심해선 안 된다.
그리고 만에 하나, 일제자가 빠르게 이 일에 개입한다면.
자신들에게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글쎄요. 그보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위기가 올지도 모르지요.”
“무슨 말이냐?”
“늘 그렇듯. 상황은 우리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을 테니까요.”
경고의 이유.
[기기아대가 송화의 존재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제자 마후는 사제자 곤마에게 주술사가 붙은 걸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기기아대는 독자적으로 행동할 것이고, 설휘 님이 본교에 도착할 때까지 따라붙을 것입니다.]
시뮬레이션 1번 길을 선택하니 뜨는 정보들.
그건 송화가 죽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게 해줬다.
[싸움은 어리석은 짓. 송화를 그들에게 보내면, 이제자 병력의 호위 아래 안전하게 본교로 복귀할 수 있을 겁니다. 송화의 신변을 확보하기 전에는 그들과 협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공간이동.
이 주술의 사용은 결과적으로 패착이었을까.
이제자의 기기아대는 자신들이 이동한 위치를 재빠르게 찾아냈고, 이후 자신들을 추적했다.
이것으로 보건대, 이제자는 그만큼 압도적인 병력을 이끌고 온 것으로 보였다.
‘내 선택은 늘 그러했지.’
항상 최악의 판단을 했고,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렸다. 새로운 능력이 부여되면, 그 능력에 매달리기만 했다.
결과는 늘 어떠했는가.
최선의 선택이 늘 최고의 결과를 안겨다 주었는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최악의 판단이 늘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다. 그리고 그 최악의 판단이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 주기도 했다.
선택은 늘 그런 식이다.
자신의 삶에선 어떤 선택도 최악이 될 수 있고, 최선도 될 수 있다.
선택에 대한 믿음.
그걸 개척해나갈 용기.
그것이 있다면 선택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혹,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설휘가 마태룡에게 다가가서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게.”
“예상컨대, 머지않아 정말 강력한 자가 우리 앞에 등장할 겁니다. 아니, 지금 곧일지도 모르지요.”
“그가 누구지?”
“직접 보시면 압니다. 그래서 부탁을 드려보려고 합니다.”
“…….”
마태룡의 미간이 꿈틀댔다.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설휘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를 설득해 주십시오.”
“…….”
“당신이 아니면, 절대 대항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납득하기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딱 한 번만 제 편에 서주실 수 있겠습니까?”
미묘한 시선.
마태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민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인지. 왜 그런 얘길 하는 것인지.
설휘는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송화야.”
“예.”
“공간이동은 더는 불가능하지?”
“아, 예. 적어도 한 달은…….”
“이해한다. 엄청난 술력이 들어갔을 터야. 그건 그렇고 가속법이라는 게 있다던데…….”
“예, 그건 가능합니다. 계통이 다른 종류의 술법이라.”
“나중에 내게 써주려무나.”
“아, 알겠습니다.”
송화가 반색하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도 여기서 어떤 임무를 맡을 수 있다는 게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또 하나 물으마. 과거, 다른 부처와 연락을 어떻게 했느냐?”
“연락이라면?”
“내가 강시들과 싸웠을 때, 그때 어떤 방식으로 연통을 했는지 묻는 것이다.”
송화는 ‘아!’하며 손뼉을 치고서 말했다.
“반딧불을 이용했습니다.”
“……?”
“주술과 촉매로 길들인 반딧불로, 주술사들만 볼 수 있는 불빛을 하늘에 띄웁니다. 그리하면 그 근방에 있는 자들은 모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랬구나.”
설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송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헌데…….”
“내가 신호를 주면, 그걸 밝혀주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설휘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담담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대장? 이동 안 하십니까?”
음무기의 말에도, 설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짧게 입을 열었다.
“이제, 나오시지요.”
“……!”
“……!”
“……!”
갑작스러운 침묵.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수하들.
부스슥.
곧 복면인 한 명이 수풀을 헤치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설휘, 그 아이를 나에게 넘겨라.”
놀랍게도 그는.
사제자의 비밀무사인 철군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