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149화 (150/379)

149화. 설휘가 계획한 세 개의 안배 (3)

“저건…… 혈우검신 유패?”

“유패 님이 여길 왜…….”

사령대 조장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팔왕철마웅이 나타났을 때만 해도 절망감에 모든 걸 내려놓았던 그들이었다.

팔왕 중 하나가 설휘에게 접근했을 때는 차마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리는 이도 있었다.

그런 때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유패.

대체 무슨 생각인지, 분명 아군일 터인 팔마의 도를 막아내며 그가 등장한 것이었다.

“기, 기억났다. 철군성이 그랬어. 이번 싸움에 혈사단이 투입되었다고.”

“아.”

혈사단이 투입되었다면, 혈사단장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용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게 지금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음무기가 물었다.

유패는 사제자 곤마의 휘하가 아닌, 이제자 마후의 휘하다.

그런 그가 왜 자신들을 감싸는 건가.

“어…… 혹시?”

송화가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뭐?”

“대장님이 저한테 구조 요청을 하라고 하셨어요. 왜 그러시나 했는데…….”

반딧불을 이용한 구조 요청.

그건 기려사대가 위기에 빠졌을 때 도움을 청하는 방식이다.

싸움이 시작될 때 퍼뜨렸던 그 신호. 그게 유패의 눈에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인다고 해서 왜?

그 의문은 곧 소령이 풀어냈다.

“지난번에 우리가 기려사대의 곤란을 해결해 주었잖아. 그런데 그건 원래 은영단 수준에서 처리할 수 없는 문제였어. 그러니 혈사단이 늦은 게 더 부각된 거지.”

“아, 기억나. 혈사단장 유패가 이번에는 미안하다고, 다음번에는 늦지 않게 오겠다고 했었지. 그럼……?”

적송이 탁, 하고 무릎을 쳤다.

혈우검신 유패는 나름 인품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다.

별호에 마(魔)가 아니라 신(神)이 들어있다는 것만 봐도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그는 은원을 확실히 갚는 사람. 또한, 한번 한 말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분명히 기려사대의 곤란을 본인이 처리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유감을 표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맙소사. 유패 님이 기려사대에 진 마음의 빚을, 대장이 끌어다 썼구나.”

“아.”

“와.”

다들 그 말에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이제 보니 설휘가 송화를 넘겨주지 않은 건, 그저 본인의 고집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싸우다 보면 누군가 말려줄 사람이 올 것이라는, 그런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팔왕철마웅도 다 눌러버릴 수 있는 엄청난 고수, 유패의 존재를 계산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기가 막힌 상황이네.”

“정말이야. 대단해.”

설휘의 그림을 뒤늦게 깨달은 사령조장들이 혀를 내둘렀다.

적의 아군을 끌어들여, 상황을 해결할 생각을 했다니.

“봤지, 내 사부가 이런 사람이라니까?”

그 와중에 음무기는 슬쩍 제 얼굴에 금칠을 했다.

꼭 다된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것 같은, 얄미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령조장들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는.

“그가 정말로 중재를 해줄까?”

겨우 희망적이게 된 상황을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니까.

소령의 말에 일행들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혈우검신 유패는 상당히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인물. 허나, 그는 이제자 마후의 아래에 있는 인물이다.

거기다 이번 싸움에서 기기아대는 분명 손해를 보았다. 설휘와 사령대의 인원들이 죽이고 파괴한 실혼인과 강시들.

이들은 분명 마후의 전력이었다.

“……그것도 생각해둔 게 있으실 거야.”

요림의 혼잣말에 다들 동의했다.

알고 있는 것이다.

유패는 분명 대단한 인물이다.

그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사령대는 여기서 다 죽을 수도, 혹은 다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건 대장이 그와의 대화를 어떻게 이끌어나갈지에 달려 있었다.

* * *

“이거 참.”

유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대도(大刀)를 회수한 뒤 엉거주춤 서 있는 팔마를 향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앞길을 막아서 미안하네.”

“아, 아닙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팔마.

그도 분명 완벽한 초마의 고수, 전투의 화신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선 유패는, 초마의 단계를 확실히 넘어선 극마의 고수였다.

“오셨습니까, 혈사단장님.”

팔왕들이 하나둘 다가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굽혀 예의를 표했다.

투욱. 투욱.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팔마가 유패를 향해 검을 휘두른 격이었다.

혹시 자신들의 자세나 태도가 유패를 불편하게 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 것이다.

“유패 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팔왕들과 마찬가지로, 기기아대 역시 모두 머리를 숙였다.

이번에 혈우검신이 참전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제껏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최전선에서 화산파 놈들을 섬멸하던 사람이니까.

유패는 그 정도의 인물이었다.

이제자의 실질적 오른팔이며, 마교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극마고수.

그의 위에 있는 공식적인 극마고수는 고작 열셋.

그것도 교주와 그 휘하에 있는 자들을 모두 포함한 숫자였다.

서열 14위.

수만, 어쩌면 수십만에 달할 수도 있는 마교 전체에서 서열 14위. 그것이 주는 위압감은 엄청났다.

“다들 일어서시게. 인사를 받으러 온 건 아니……. 어? 칠사자 마태룡이 여기 있었구만?”

짧게 손을 내젓던 그의 시야에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처억.

마태룡 역시 예를 표했다.

“유패 님을 뵙습니다. 반년 만이지요?”

“그래, 이번에 자네가 준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네. 역시 칠사자다워. 앞으로도 종종 부탁하네.”

“아, 아닙니다.”

그들의 대화에 설휘의 눈이 커졌다.

마태룡이 던진 정보를 받은 자가 다름 아닌 유패였다니.

이건 그도 몰랐던 일이다.

마태룡과 유패는 밝은 안색으로 하하 허허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오래전에 엮였던 인연이 나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안색이 밝아진 유패는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자신을 불러들인 사내, 설휘에게 말을 건넸다.

“갑자기 왜 기려사대의 방식으로 나를 부른 것이냐. 그리고 너는 여기서 왜 본교의 사람들과 싸우고 있지?”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유패의 물음에 설휘는 즉각 대답했다. 애초에 그를 부를 때부터 준비해 둔 핑계가 있었다.

“왜 저쪽에서 싸움을 거는지 말입니다.”

“저쪽? 누구, 기기아대가? 너희에게 싸움을 걸어?”

“유패 님, 소녀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이제까지 침묵하던 한 여인이 나섰다.

기기아대 대장 중 하나인 여린이었다.

“말씀하시지요.”

역시나 술법가들에게는 예의를 갖추는 유패였다.

그녀는 설휘를 슬쩍 노려본 뒤, 잠깐 숨을 고르고서 말을 이었다.

“전투 참여 중에 예기치 않은 곳에서 상당한 술법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곳으로 향했고, 거기에는 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저들 중에 상당한 수준의 술법사가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사제자의 수하들.”

여린은 스윽, 하고 송화와 사령대를 가리켰다.

“생각컨대, 이제자께서 꾸리는 대계에 사제자가 술법사를 가지면 곤란할 것으로 판단하여, 미리 싹을 자르고자 저들에게 술법사를 인도하라 했으나, 거부. 때문에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허…….”

유패는 침음성을 내뱉었다.

곤란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여린은 속으로 이빨을 드러냈다.

‘흥, 어리석은 녀석.’

사령대장. 그가 왜 유패를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자의 오른팔인 유패가 왔으니, 자신들은 책임 소재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뭐 하나만 묻지요.”

“하명하십시오.”

유패의 말에 여린은 고개를 숙였다.

헌데, 거기서 나온 말은 다소 뜻밖의 것이었다.

“저 아이,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저 어린 술사의 술력이 그토록 대단했습니까?”

“……예?”

여린은 눈을 껌뻑이기만 했다. ‘지금 당장 죽입시다.’ 하는 말만 기다리고 있던 그녀였기에, 이게 웬 말인가 싶었다.

유패는 다소 불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토록 술력이 대단하여, 반드시 섬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실력이었냐는 말입니다. 기기아대. 3개조. 전원이. 움직여야 할 정도로.”

마지막에는 딱. 딱. 말을 끊어서 묻는 유패.

덕분에 여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답변하기가 곤란했다.

‘그렇습니다.’ 라고 하면 고작 저런 꼬마에게 위협을 느낄 정도냐고, 기기아대의 위상을 스스로 깎아 먹게 된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면…….

“말해보시오.”

질책하는 유패의 눈빛에, 그녀는 입술을 한 차례 깨문 뒤 천천히 입을 뗐다.

“술법의 길은 예측하기 어려운 것. 옛말에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라 했으니, 훗날에 저 아이가 성장하게 되면…….”

“허면, 지금은.”

길어지려는 여린의 말을 끊고 유패가 물었다.

“당장 기기아대를 위협할 정도의 술사는 아니다, 그 말 아니오?”

“…….”

여린의 입이 잠시 달싹거렸으나, 그녀는 곧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보기에, 유패는 자신들과 결이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미래의 화근을 미리 밟아 놓으려고 하는, 앞날을 조심하는 자신들의 태도가, 그에게는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게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허망하군, 허망해. 이거 참. 궐장쯤 되는 직위를 가진 자가 어찌 이리 부끄러움을 모를까.”

끌끌끌.

아니나 다를까, 유패는 혀를 차며 곱지 않은 눈빛을 보냈다.

그는 자그마치 극마의 고수. 거기다 도달한 지도 오래된 사람이다.

한 조각 술력 차이에 진흙탕 싸움을 하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리라.

“저 아이가 그리 큰 싹인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소. 여린 궐장, 그대가 말했다시피 앞일은 모르는 일인데, 여기서 저 아이를 놓아주면 나중에 마후 님을 위협할 만큼 큰 사람이 된다는 보장이 있소?”

“그…….”

“기기아대의 이름을 걸고 장담할 수 있느냐는 말이오.”

“……!”

여린의 입이 막혀버렸다.

앞날이 창창하던 후기지수도, 운기행공을 잘못하다가 피를 뿜고 죽기도 한다.

그런 것이 앞날이고, 그런 곳이 마교다.

“어이가 없군. 대단한 잠재력을 지닌 인물이 있다면, 그건 싹을 자를 것이 아니라 품어야 할 것인데. 제거보다 회유에 힘쓸 생각을 해야지. 아무리 당파싸움, 후계자 쟁탈전이 중대한 사안이라 해도…….”

쯧쯧쯧.

유패는 다시금 혀를 찼다.

당장은 싸우더라도 결국은 다 같은 마교의 교인이고, 멀리 보면 나중에는 받아들여야 할 이들이다.

패자(霸者)의 길은 살육에만 있지 않다.

결국은 다스리고 보듬는 것을 통해 세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마교 서열 14위 유패.

그가 보기에는, 여린의 저런 구실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주군인 마후의 총애를 독차지하기 위해 외부인을 쳐내는, 좁아터진 소견머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장 마태룡까지 죽이려 들었으니…….’

특히 협조자, 자신들에게 귀한 정보를 주어 전공을 세우게 해준 이까지 싸잡아서 죽이려 들다니.

살인 멸구로 입 다물게 할 생각인지 몰라도, 행여나 이 사실이 나중에 소문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면…….

오히려 이제자 마후의 위엄이 깎일 뿐이었다.

“하지만 유패 님, 저들 역시 선을 넘었습니다.”

여린이 항변했다.

그녀는 여러모로 억울한 모양인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희가 소유하고 있던 실혼인 대부분을 파괴했고, 그중 절반 이상은 재사용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막심한 피해인데…….”

“아직도 모르고 있구나!”

버럭!

말을 자르며 호통치는 유패.

그에 여린은 흠칫 놀랐다.

연장자와 주술사에게 지극히 예의를 차리던 그가, 이렇게 언성을 높여 하대를 한다는 건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의미였다.

“그 피해! 애초에 너희들이 자처한 것이 아닌가! 조력자를 마주했으면 호위해서 데려올 것이지, 누가 싸움을 걸라 그랬나! 궐주, 그대에게 그만한 권한이 있었는가!”

“……!”

궐주 여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평소 얌전하고 중후한 인물이었던 만큼, 분노한 유패의 호통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마후 님의 전력을 손실한 것은 너희의 책임이다! 염치를 모르는 데다, 강자를 알아보는 눈도 없으니! 아직 모르겠느냐? 이들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실혼인만이 아니라 기기아대 전원이 죽었을 거다!”

“……예?”

그게 무슨 소리냐는 반응의 여린. 그것을 본 유패는 더욱 통탄스러워 했다.

“기기아대 대원들이 실혼인들보다 강한가? 아닐 거다. 그렇다면 실혼인을 박살내는 무인이, 그보다 약한 술사를 척살하지 못할까? 더! 더는 말하지 마라! 그랬다간 내 손으로 입을 찢어버릴 테니!”

그 말에 여린의 얼굴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어 한쪽에 선 월사의 표정을 보았는데, 그는 여린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더 말하지 마십시오. 큰일 납니다.’

유패는 한다고 하면 정말 하는 인물이었다.

여기서 억울하다고 입을 열었다간, 정말로 그 자리에서 입이 찢겨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