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운명의 날 (1) < 둔산 >
“허, 정보를 준 자가 마태룡이었나?”
“그랬군. 칠사자가 이제자님에게…… 생각도 못 했는데.”
“이거, 아주 난처한 일이 될 뻔했어.”
한편, 팔왕철마웅은 한곳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유패가 저 정도로 격노하는 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그들도 딴에는 전투의 화신이라 불리는 이들이었지만, 초마도 아닌 극마의 고수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건 당연히 사양이었다.
하물며 자신들의 잘못도 아니고, 기기아대 궐주의 독단 때문이라면 더더욱.
“아무래도 이거…….”
“……그래, 빠지는 게 상책이야.”
의견이 그리 모이자, 일마가 대표로 나서서 유패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혈사단장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가보겠습니다.”
“뭐, 그러시게.”
다행히도 불똥이 튈 여지는 없어 보였다.
일마가 짧게 목례를 하고서 뒤를 돌아보자마자.
슈슈슈슉!
거짓말처럼 동시에 자취를 감췄다.
유패는 여전히 노기등등한 기색으로 여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궐주. 본교로 돌아가면 따로 질책이 있을 것이니, 그리 아시게.”
“…….”
“대답은?”
“네. 아, 알겠습니다.”
여린은 시뻘게진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설휘를 노려보았지만.
피식.
그는 그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그걸 보니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후…… 그대들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요? 팔왕들도 전부 자리로 돌아갔는데.”
하늘같은 극마의 고수, 유패가 재차 물어왔다.
나름 노기를 가라앉혔는지, 다시 하대를 멈추고 경어를 썼다. 허나 왠지 앙금은 남아있는 듯 보였다.
“저희는…….”
“궐주, 저들은 내가 맡아서 본교까지 데려가리다. 이미 한바탕 거세게 싸움까지 해놓고, 저들의 호위를 맡겠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여린의 어깨가 푹 꺼졌다.
“네…….”
확실히, 더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사이다.
공들여 만든 실혼인을 박살 내놓은 사령대장. 그리고 하필 유패가 편을 들어주는 사령대.
저들과 엮여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추태를 부려 죄송합니다.”
“알면 되었소.”
기기아대는 파괴된 강시들을 제각각 수습해서 터덜터덜 돌아갔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설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한 발짝만 어긋나도 크게 경을 쳤을 상황이었다. 아니,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지문도 싸움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할 정도로 확정적인 열세.
하지만, 유패의 등장으로 적들을 모두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저, 운이 좋았던 거야.’
충분히 뿌듯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설휘는 오히려 냉정해졌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최선의 선택이 반드시 최고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최악처럼 보이는 선택을 하고도, 그 안에서 한 가닥 가느다란 구명줄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린 좀 걸을까?”
“예.”
유패는 아직 말할 것이 남은 듯 보였다. 설휘는 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휘이이익.
바람이 불어왔다.
가장 깊은 어둠이 사라지자, 이윽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전투가 치열했던 탓에 잠시 시간의 개념이 없어져서일까.
어쩌다 보니 절벽까지 함께 걸어온 두 남자.
그중 설휘가 물끄러미 하늘만 보고 있는 유패에게 말을 건넸다.
“이번에는 크게 빚을 졌습니다. 나중에 반드시 갚아 드리겠습니다.”
“갚는다라……. 어떻게?”
“……!”
설휘는 살짝 긴장했다.
뭘 이런 걸로 빚을 졌다고 생각하느냐니, 혹은 괘념치 말게 같은 일반적인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유패는, ‘어떻게 갚을 거냐?’고 대놓고 물어온 것이다.
그래서 설휘도 대놓고 물었다.
“제게 뭘 원하십니까?”
“자네.”
“……?”
부른 건 줄 알고 기다렸던 설휘는, 뒤늦게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유패의 말은 말 그대로 설휘를 원한다는 의미였다.
“……그저 마태룡의 안면을 보아 넘어가 주시는 것이 아니었군요.”
“물론이지. 아무려면 아무 이유 없이 아군을 혼내고 자네들을 두둔했겠나? 난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네.”
유패가 피식 웃었다.
그 말끔한 웃음에 설휘는 살짝 속이 메스꺼웠다.
욕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이렇게 대놓고 욕심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하기 더 어려웠다.
설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 제가 거절한다면…….”
“가만있지 않겠지. 자네가 죽거나, 아니면 자네 수하들을 죽이거나.”
너무도 쉽게 날아오는 대답.
설휘는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이제자 마후 세력의 2인자가 하는 말이다.
그냥 못 들은 척 시치미 떼기는 어려웠다.
“설마요. 그러진 않으실 겁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면.”
“그래? 날 어떻게 봤는데?”
“원칙주의자로 봤습니다.”
“원칙? 하하, 원칙을 지켰다면 자네들을 죽였을 텐데. 엄연히 제자분들 간 쟁투가 벌어지는 시기 아닌가?”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갚는다는 신념을 보면, 유패 님은 권력보다 본인의 마음을 더 크게 여기는 분일 거라 여겨집니다. 눈앞의 이익보다, 더 큰 미래의 구상을 두고 움직이시는 것도 그렇고. 제게는 ‘나는 그만한, 그럴만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걸로 들렸습니다.”
“크하하, 푸하하하하하.”
유패가 폭소를 터뜨렸다.
그는 지금이 심히 즐거웠다.
고작해야 은영단의 사령대장. 별 위치도 없는 녀석에게 벌써 두 번이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묘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주제를 모르는 짓거리를 하면서도, 자신의 비위를 맞출 줄 아는 녀석이기도 했다.
“나는, 그다지 인내심이 좋은 사람이 아니야.”
“…….”
설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보통 그 반대이기가 쉬웠다. 자신의 경험으론 그러했다.
반면, 지금의 유패처럼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인내심이 더 있었다.
안도가 되면서도,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자네의 놀라운 성장 속도는, 내 모자란 인내심을 조금 달래 주는군. 다음에 또 보세, 사령대장.”
이런 사람은 끈질기니까.
“그럼, 가시렵니…… 헛?!”
고개를 든 설휘는 헛숨을 들이마셨다.
분명 조금 전까지 앞에 있었던 유패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기함할 일이었다. 움직이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대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야 저런 움직임이 가능할까.
‘이것이 극마고수.’
설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자신은 작았다.
그에 비하면 부족한 부분이…….
정말로, 너무도 많았다.
* * *
설휘가 본교에 도착했을 때, 눈앞이 갑자기 거멓게 변했다.
그리고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때는, 두 사람을 목도할 수 있었다.
장소는 곤마의 집무실이었다.
“……이러했습니다.”
사정을 보고받은 곤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이구나. 나쁘지 않았다.”
이제자에게 정보를 넘겨 적들을 교란시킨 마태룡의 행동.
솔직히, 자존심이 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경쟁자인 이제자에게 정보를 넘겨, 공적을 세우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곤마는 그런 마태룡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돌파구가 마땅히 없었을 터.
곤마 본인이 개입하지 않고도, 일제자의 협력자들에게 타격을 주었으니.
성과가 제법이었다.
“그리고 은영단 사령대에 관한 얘기입니다.”
철군성이 일어난 일들을 천천히 설명했다.
설휘가 마태룡을 구해 나온 것.
그리고 공간이동을 펼친 것까지를 들었을 때, 곤마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하지만 철군성의 명령을 어겼을 때, 그리고 기기아대와 전면으로 싸웠다는 얘기에는, 온몸이 떨리는 듯 보였다.
그러다 유패의 개입으로 사건이 중재되었다는 말에, 곤마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휘가 유패와 접점이 있었나? 언제부터?”
경계심이 담긴 목소리.
이제자 마후의 오른팔이자, 이제자 세력의 2인자.
그와 접촉했다는 것은 그만큼 주의할 만한 일이었다.
“과거 사령대가 기려사대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조우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곤마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기분이 복잡한 듯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을까.
철군성이 넌지시 곤마를 향해 자신의 속마음을 밝혔다.
“주군. 아무래도 이번 건에 대해서…… 문책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왜?”
“사령대장 설휘는 위험한 선택을 했습니다. 천운이 아니었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위험한 선택이라, 어떤 것이?”
“송화란 술사 아이를 저들에게 보냈다면, 아무 잡음 없이 무사히 돌아왔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괜히 위기를 자처했습니다. 이런 자는 주의를 주지 않으면 다음에 더 큰 위험을 부를 겁니다.”
“맞아. 생떼 같은 네 수하를 죽일 테니 내놓으라, 그런 말을 듣고도 넘어가야 하는데 말이지.”
“아니. 그건…….”
“철군성.”
곤마가 그를 나직이 부르자, 철군성은 이내 예를 표했다.
“예, 주군.”
“우리가 가는 길은 꽃길일까, 가시밭길일까?”
“…….”
“대답하기 쉽지 않겠지. 그래, 가시밭길이다.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느냐. 앞으로 너희들에게는 그런 일이 많아질 거다.”
스륵.
곤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리한 임무, 하기 어려운 임무, 그리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임무들도 생기겠지. 그럴 때 운이라도 좋지 않으면 무엇에 기댈 수 있을까.”
“…….”
“난 너희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했으면 좋겠구나. 때론, 명령을 거역해서라도 말이다. 이건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내 진심이다.”
“주군…….”
철군성은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경쟁 상대는 일제자, 이제자, 삼제자.
사방이 모두 적이었다.
도저히 이길 방도가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든 자신의 사후에라도 수하들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마음인 것이다.
“하핫, 그래도 재미있어. 이게 처음이지 않나? 내 휘하의 무사가 둘에게 한 방을 먹인 건.”
“……예.”
애써 웃는 곤마의 모습에, 철군성 역시 쓰게 웃었다.
확실히, 멍청하건 어쨌건 눈에는 띄는 놈이었다.
곤마의 말처럼, 그의 휘하 사람이 다른 휘하 세력을 곤란하게 만든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설휘를 불러주겠나?”
그 말을 끝으로, 눈앞의 시야는 다시금 사그라들었다.
* * *
눈을 떠보니 문 앞이었다.
“음.”
이런 갑작스러운 이동도 설휘에게는 익숙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문을 열려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갑자기 이게 떴다.
저장하시겠습니까?
‘이거 뭔가 느낌이…….’
싸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이게 눈앞에 나타났다는 건, 그간의 경험상 어떤 큰 사건이 발생할 거라는 얘기였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래서 설휘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시간을 기록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8년, 7월 마지막 날.
□ 천력 98년, 본 스토리_첫 번째 탈출 미션(1)
‘세 곳.’
설휘는 고민이 되었다.
첫 번째는 만약을 위해서 남겨둬야 했다.
그도 그럴 게 ‘처음으로 돌아간다.’로 시작해도,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을 받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핵심 물건인 여지도는 이미 태황각주 집무실에 없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도…….’
여기도 문제다. 저기엔 현생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절세병기들이 있다.
나중을 위해 반드시 남겨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설휘는 세 번째로 정했다.
저곳에 기록되어 있는 건, 기기아대가 추적을 막 시작했던 상황.
마태룡을 구하고 송화를 안전하게 데리고 왔으니, 일단은 덮어씌워도 무방했다.
시간을 기록했습니다.
짧은 문구가 떴고, 저장이 되는 순간.
설휘는 눈을 의심했다.
■ 천력 98년, 본 스토리_운명의 날.
‘운명의 날?’
싸한 느낌은 확실하게 맞아떨어진 듯했다.
왠지 모르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이것이 나온 것인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그래. 부딪쳐보자.’
별다른 방법도 없었기에, 설휘는 그렇게 눈앞의 문을 열었다.
* * *
“왔느냐.”
방으로 들어온 설휘는 곤마의 환대를 받았다.
딱히 환대라고 해서 뭔가를 내민 건 아니었지만, 그의 밝은 모습에서 그렇게 느껴졌다.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의 이기심 때문에 위험을 자초한 게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글쎄……. 때론 임무를 수행하면서 곤란한 상황에 놓일 때도 있다. 보통은 임무에 충실하길 바라지만, 그것이 꼭 옳은 길은 아니지. 상황에 따라서 너처럼 행동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감사합니다. 다음엔 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곤마는 태도는 매우 너그러웠다.
진짜 속내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설휘는 그렇게 느꼈다.
“그래, 생각해보니 마음에 들지 않더냐?”
“예?”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내 호위무사가 되지 않겠느냐고.”
“아…….”
설휘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
곤마가 주최했던 대회에서 칠사자를 쓰러트리고 제안을 받았던 그때가.
“허허. 까맣게 잊고 있는 걸 보니, 영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곤마는 그런 설휘의 모습을 보며 활짝 웃어보였다.
불쾌할 수도 있는 상황을, 그는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후후, 괜찮다. 그래서 내 이번엔 확실히 너의 공을 치하하려고 한다.”
설휘는 고개를 들었다.
어떤 의도로 말한 건지, 그의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서.
“오늘부로 설휘 너와, 네가 데리고 있는 휘하의 부하들을 나의 비밀무사로 임명한다.”
“……!”
그리고 이어진 곤마의 말에, 설휘는 당황해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앞으로 너에게 오는 정보는 모두 비밀문건에 해당될 터이고. 또한, 직위도 선별하여 주어질 것이다. 너에게 도움을 주는 인물들, 네가 맡아야 할 임무들도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비밀무사라니.
아니, 그것도 권유가 아닌 임명이라니.
“축하한다. 앞으로 잘해보자.”
하지만 운명의 추는 이미 놓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앞에 문자가 떴고.
축하합니다. ‘곤마의 비밀무사 되기’를 달성했습니다.
이후, 설휘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제야, 곤마가 제시한 삶의 난이도란 게.
어떤 의미인지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난이도 상승으로 인해 3개의 전투방식 중 2개를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셋 중 어느 것을 지우시겠습니까?
▶ 턴제 Lv2
▶ AI제 Lv2
▷ 시뮬레이션제 Lv2
이제껏 자신에게 크나큰 힘이 되어 주었던 전투방식.
선택지는 이제 그것들을 지워야 하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