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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물레이션-152화 (153/379)

152화. 사제자의 입지 (1)

그날 밤.

설휘는 자신이 배정받은 2층 방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저장하기’도 없었고, 무공을 조합하는 물건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전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거라면, ‘현재의 삶’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사소한 개입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설휘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있다는 말에, 눈을 비비며 1층으로 내려갔다.

허연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노인이 해맑은 얼굴로 인사를 해왔다.

“과분하지만 만답서생이라고 불립니다.”

그는 비밀무사가 된 초년생들의 교육을 맡은 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천사령 전부를 담당하는 분이십니까?”

“아니오. 저 혼자가 아닙니다.”

부령주 마태룡에겐 그에 걸맞은 인물이, 그리고 사령대 조장이었다가 이제 천사령 대원이 된 이들에게도 각각 성향에 맞는 교관들이 직접 교육을 맡는다는 설명을 해왔다.

사락.

빼곡하게 써진 인명록이 내밀어졌다.

설휘는 그걸 받아 암기하는 데 한참이나 애를 썼다.

위치가 바뀌었기에, 앞으로는 알아둬야 할 인물이 꽤 많아진 듯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설휘는 만답서생과 함께 뒷산의 산정(山頂)에 올랐다.

휘오오오.

정상의 바람은 거셌다. 그런 정상에 있는 큰 바위 옆에는 길게 장막이 걸쳐져 있었다. 가끔 이곳에서 머물다 가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박.

적당한 크기의 바위에 만답서생이 앉았다. 설휘 역시 그의 맞은편에 있는 적당한 바위를 찾아 앉았다.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내 입을 연 만답서생. 그 주제가 뜻밖이었다.

“령주께서는 천마 제자분들의 후계자 쟁탈전이 왜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거야 교주께서 은퇴하시기 전에, 미리 차기 교주를 선발하겠다고 공표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공식적으로는요.”

공식적? 썩 미묘한 어감에, 설휘가 곧장 물었다.

“혹,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애초에 쟁탈전이 일어난 것 자체가 이상한 일입니다.”

만답서생이 설명했다.

본래 살마, 교주의 첫째 제자인 그가 차기 교주가 될 거라는 점은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마교의 수많은 단체가 먼저 손을 내밀고, 그의 휘하세력이 되기를 자처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일제자의 확장력이 줄어들었다.

살마의 간택을 받지 못한 이들이 이제자 마후의 세력에 붙으면서 대결 구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삼제자 아령 님 세력의 급성장이었지요.”

은둔 고수들, 현직에서 물러난 마교의 원로들이 난데없이 삼제자에게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삼제자의 부족했던 세력이 채워졌고, 제자들 간의 후계자 쟁탈전은 자연스럽게 삼파전으로 변했다.

“저는 이것이, 천마께서 개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천마께서……. 그럼, 왜 개입하셨을까요?”

듣고 있던 설휘가 물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듣고 있자니 이상하긴 했다.

은둔 고수가 달리 은둔 고수인가. 현직에서 물러서서 자기 수련에만 힘쓰던 무인들이다.

그런 그들이, 그간의 생활을 접고 삼제자를 지지한다? 갑자기 권력투쟁에 왜 참전한단 말인가.

“몇몇은 힘의 균형이 너무 한쪽으로 쏠리는 걸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내놓긴 했지만…… 소인은 그것과는 다르다고 봤습니다.”

“만답서생께서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놀이를…… 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놀이?”

설휘의 미간이 꿈틀 움직였다.

“예. 서로 죽이고 죽이는 모습, 이간계와 반간계 같은 술책이나 이이제이나 차도살인 같은 전략들. 제자들이 그런 아귀다툼에서 과연 어떻게 타계해 나갈지…… 그걸 보고 싶어 하시는 거겠지요.”

고독(蠱毒)이라는 술수가 있다.

뱀, 두꺼비, 전갈 등의 독충을 잔뜩 모아서 한 항아리 안에 집어넣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눈치를 보던 독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결국 점차 싸움이 붙기 시작해 서로서로를 잡아먹는다.

그런 끝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녀석은, 독기와 살기가 농축된 가장 지독한 녀석이 된다.

“…….”

만답서생의 말을 들은 설휘는, 순간적으로 말이 막혔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지금껏 수없이 목숨을 걸고서 싸웠던 자신의 행위가, 누군가에겐 놀이가 될 수 있다?

상상이 가지 않았다. 심장을 철로 두른 사람이나 그런 것이 될까.

“사람의 죽음을, 놀이로 본다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설휘는 버럭 소리치며 일어섰다.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요. 까마득히 높이 솟은 절대자란, 그런 존재입니다.”

만답서생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천마께서는 드높은 하늘과도 같은 분이니, 그분의 생각은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감히 재단하기 힘듭니다.”

붕새는 한 번 날갯짓하면 천리를 간다고 했다. 천마, 마교의 교주쯤 되는 인물이 기존의 후계 쟁탈에 끼어들었다면, 분명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분에게 저희 범인들의 생사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투고 전력을 다하는 모습에서, 그분께서는 신선한 영감을 떠올리실 수도 있지요.”

‘빌어먹을…….’

설휘는 구역질이 났다.

죽고 죽이는 걸 보는 관음증 병자 같은 놈이 이곳의 주인이라니.

그것도 한쪽이 지리멸렬하지 못하게 이런 세력 구도를 만들어두고서 말이다.

“교주님의 뜻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아니, 그저 추측만으로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신 건 아니겠지요? 근거는 뭡니까?”

설휘는 격분을 가라앉히고서 한번 반문해보았다.

이제껏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정치적인 싸움을, 만답서생의 말만 듣고서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이상했으니까.

“세력 구도가 어느 정도 자리 잡혔다고 알려진 게 셋째 제자를 뽑고 일 년 후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얼마 되지 않아 천마께서는 굳이 곤마 님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왜일까요?”

“그거야 곤마께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니…….”

“그게 이유인 겁니다. 사제자의 존재는, 그 자체가 새로운 변수가 되는 거지요.”

단 한 번.

천살성의 잠재력을 가진 곤마는, 상대가 극마의 고수일지라도 척살이 가능했다.

가위바위보처럼 서로 맞물린 삼파전.

세 제자들의 세력이 안정되어, 서로 대치하는 상황만 지속되었다.

여기에 사제자 곤마의 등장은 기껏 수그러든 싸움에 다시 한번 불씨를 던져 넣는 격이었다.

“하…….”

설휘는 머리를 짚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대체 천마란 놈의 정신머리는 어떻게 생겨먹은 것일까. 본인이 직접 가르친 제자들이 서로를 죽이도록 등을 떠밀다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천마의 제자들이 서로 싸우게 되면 그들만 죽고 다치는 게 아니다.

휘하에 거느린 세력들이 있다.

그런 세력과 세력 간에 다툼이 벌어지면, 천마신교에는 피바람이 불게 된다.

뜻하지 않게 싸움에 휘말려 죽는 이들이 무수할 것이다.

“천사령주께서 보시기에, 현 상황은 어떤 것 같습니까? 제자분들의 상황 말입니다.”

“…….”

설휘가 침묵하자, 만답서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제자가 제일 우세합니다. 제자들의 모든 힘을 숫자 열(十)이라 쳤을 때, 살마는 사(四)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요?”

“이제자는 삼(三), 삼제자는 이(二). 그리고 사제자는 일(一)입니다.”

‘확실히 열세구나.’

곤마의 힘은 십 중에 일. 아니, 사실은 그보다 더 적을지도 모른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휘하에 극마고수가 있는 상황.

사제자 곤마에겐 초마의 고수가 전부였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비록 사제자께선 열 중 하나의 힘을 가지고 계시나, 상황에 따라선 넷, 다섯도 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스스로가 교주 자리에 오르진 못해도, 누굴 떨어트릴 정도의 힘은 있다는 겁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곤마는 천살성. 그 힘이 폭주하면 절대고수가 된다.

상대가 초마든 극마든 상관없이, 함부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간 자신도 목숨을 내놔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이런 구도가 짜여 있을 줄이야.’

“그리고 곤마께서는 다른 제자분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그 계획도 이미 가지고 계십니다.”

“……!”

“그것이 제가 여기에 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천사령주 설휘 님.”

만답서생의 눈이 우묵하게 깊어졌다.

* * *

한편, 그 시각.

사제자 곤마는 정갈한 남의로 차려입고, 유원궁 내부를 걷고 있었다.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1급 호위무사 중 하나인 천광이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해가 뜬 지금 시간은 사시(巳時 : 오전 9시).

본래 사형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진시(辰時 : 오전 7~9시)였으니, 곤마가 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뭐, 어떠냐. 날도 좋은데.”

곤마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는 모처럼 대단히 기분이 좋았다.

이제껏 무조건 참고 지내기만 했던 그였다.

말이 사대 제자 중 하나지.

일제자, 이제자, 삼제자 모두가 그를 무시하고 멸시했다.

그 본인만 숙이고 사는 것이 아니라, 곤마 휘하 세력의 모두가 다른 제자 세력들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했었다.

허나 이번에.

뜻하지 않게 얻은 새 수하 녀석이, 콧대 높던 일이제자의 세력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이제껏 쓰린 속을 달래며 인내만 곱씹던 곤마에게, 이는 진정 막힌 속을 뻥 뚫어주는 통쾌함이 된 것이다. 곤마의 발길은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큰일이 없어야 할 텐데.’

다만, 그런 그를 보는 천광은 걱정이 더 앞섰다.

두 사람은 얼마 후 인공연못이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곤마는 먼저 도착해 있는 사형사저를 볼 수 있었다.

“너는 떨어져 있거라.”

곤마는 천광에게 주의를 준 뒤, 그곳으로 걸어갔다.

“조금 늦었습니다.”

사제자 곤마가 인사를 하자, 적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사실, 그가 오기 전부터 분위기는 쭉 싸늘했던 모양이었다.

바라보는 곳이 각자 다른 것을 보면.

“…….”

정자 기둥에 기대고 있는 살마.

정자의 난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는 마후.

그리고 어디서 따로 구해 왔는지, 정자 옆 의자에 앉아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아령.

사형사저 중 누구도 대꾸를 하지 않자, 곤마는 자연스럽게 정자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러자.

“건방진 놈.”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던 살마가 입을 열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구나. 서열상 가장 마지막인 네가, 감히 사형들을 기다리게 하나?”

꾸중과 질책이 섞인 음성.

그는 평소와 비교해 매우 거친 목소리였다. 뭔가 단단히 심사가 뒤틀린 듯했다.

“죄송합니다. 잠깐 딴 일을 하다 보니…….”

곤마는 몸을 다시 일으키며 예를 표했다.

“무슨 일을 했지?”

“그것이…….”

곤마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살마의 싸늘한 시선은 사유를 묻고자 함이 아니라, 어떻게든 트집을 잡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걸 깨달은 곤마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뭐라?”

살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곤마는 그에 그치지 않았다.

“그냥 가끔은 늦을 때도 있는구나, 하고 이해해 주시지요. 저 역시 한 무리를 다스리는 몸. 아무리 대사형이시라곤 하나, 제 모든 사정을 다 말씀드려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호오.”

한순간, 분위기가 급격하게 변했다.

살마의 눈은 쫘악 찢어졌고, 이제자 마후, 삼제자 아령의 눈에는 흥미가 감돌았다.

곤마. 이제껏 말대꾸나 반박은커녕, 그저 순응하기에 바빴던 사제자.

그런 그가 지금 같은 행동을 보이니, 그들로서도 의외일 수밖에.

“이 녀석이……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정말 죽고 싶은 게냐!”

곤마에게 생각도 못 하게 들이받히자, 살마는 노골적으로 화를 표출했다.

들썩들썩.

그의 주위 지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형태 없는 살기가 모여들어 반응하기 시작했다.

무형지기.

극마에 오른 고수의 살기는, 손도 대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초마의 고수도 위축될 정도의 거대한 압박감이 사제자에게 쏘아진 것이다.

“허어. 진정하시지요, 대사형.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간 매번 늦었던 건 우리들이었지 않습니까?”

마후가 끼어들었다.

말 내용은 분명 말리는 듯한 투였는데, 그의 표정이나 목소리는 잔뜩 즐기는 것 같아 보였다. 거기에 아령 또한 가세했다.

“맞아요, 오라버니. 처음 있는 일이기도 하니……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지요. 항상 말 잘 듣던 사제 아니에요?”

“이…….”

다른 두 제자의 반응 때문일까. 살마는 천천히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그에 맞춰 아령이 곤마에게 말했다.

“곤마, 너도 지나쳤다. 사형께 정중히 사과해.”

“…….”

곤마는 시선을 살마에게로 돌렸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제 언사가 거칠었습니다, 대사형. 용서를 구합니다.”

“흥.”

슬쩍 그 모습을 쳐다본 살마.

마치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겠다는 듯, 노기를 접고 이내 본연의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약간 분위기가 풀어졌을 때, 삼제자 아령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사형, 화산파 놈들이 그곳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게 사실인가요?”

기껏 진정된 분위기에, 다시 불씨를 던져 넣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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