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마를 뛰어넘는 경지 (5)
그믐달이 보이는 시각.
비가 올 듯 먹구름이 끼어 있어서 그런지, 하늘에 별은 보이지 않았다.
서재 안에서 창호(窓戶) 밖을 바라보는 곤마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그의 뒤로, 수하 하나가 조심히 다가왔다.
“모두 도착했다고 합니다.”
“들라고 해라.”
수하가 나가고, 곧 세 명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곤마는 여전히 창 앞에 선 채로 입을 열었다.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스윽.
셋 중 가장 키가 큰 노인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만답서생이었다.
“천사령주는 준비를 마쳤습니다. 기초는 이미 가지고 있었고, 지형과 변수도 숙지한 상황입니다. 또한 적지 않은 소득을 얻었으니, 이제는 언제 명령을 내리셔도 충분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정말입니까?”
놀란 얼굴로 뒤돌아서며 묻는 곤마.
천사령주가 이렇게 빠르게 태황각주를 노릴 수준까지 오르리라곤 그 역시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예, 제가 보기엔 그러했습니다.”
그 말에 곤마는 더는 의심치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만답서생의 말이라면 틀림없을 것이다. 자신의 수하 중, 실질적인 참모 역할을 맡은 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곤마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에 백유와 우금이 예를 표했다.
“저희는 조금 미흡한 상황이긴 합니다만…… 안배해주신 물건이 있으니 어떻게든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소.”
곤마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창 밖의 어둠 속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던 그는.
“정황을 살펴, 빠르면 내일 투입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은 돌아가 쉬시지요.”
“알겠습니다. 주군.”
세 남자는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뒤돌아 나갔고, 곧 문이 닫혔다.
달칵.
곤마는 이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직 할 말이 남으셨습니까?”
백유, 우금과 달리 만답서생은 아직 방을 나가지 않았다.
“그게 말입니다…….”
노인은 잠깐 뜸을 들였다.
곤마가 천천히 그를 응시하자, 그는 헛기침을 한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천사령주에 관한 일입니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문제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보고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
계속 빤히 쳐다보자 만답서생이 입을 열었다.
“천사령주께서 큰 깨달음을 얻었는데……. 아무래도 그 방향이 정종무공 쪽인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곤마의 표정에 미미한 변화가 일었다.
갑자기 정파의 무공이라니,
곤마의 반응을 본 만답서생은, 이 괴사가 일어난 연유에 대해 천천히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은영단에게 사사된 무공 중에 일원소마공이란 무공이 있지 않습니까?”
“일원……. 예, 그렇습니다.”
“그 일원소마공은 본래 근본이 전진파의 무공이었습니다. 곤마께서도 아실 테지요.”
“예. 압니다. 도가문파의 무공임에도 투기와 살기가 강해서, 정작 정도에서는 사도로 취급받는 무공이지요.”
“예. 본래는 일원공, 도가의 원류에서 특정 부분을 삭제하고 본교에 맞게 개량한 무공입니다. 그런데 그 무공의 연원을 천사령주가 깨달은 것 같습니다.”
“네?”
곤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만답서생이 다시 설명했다.
“아마도…… 소실된 원류의 이치. 소마공이 아닌, 일원공을 재현해 낸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삼분의 이가 날아간 무공을, 그 편린에서 원류를 찾아냈다고요?”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바로 오늘 오후, 천사령주는 그 무공으로 경지 상승을 이루었으니까요.”
“……!”
곤마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일원소마공은 대성해 봐야 절정의 경지까지밖에 오르지 못한다.
전진파가 멸문하며, 전승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너진 터전에서 채 반도 남지 않은 일원공의 비급을 발견했고, 마교는 제법 쓸 만하다고 여겨 실용적인 기초무술로 쓰기로 했다.
하지만 여러 번 개조를 거치는 동안, 본류의 성격은 더더욱 옅어졌다. 그렇게 삼분의 일도 남지 않은 무공의 조각을 스스로 통달해서 경지 상승을 이룰 줄이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천재입니다. 십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그런 부류가 아닌, 천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그런 천재. 마치 사제자님처럼 말이지요.”
“…….”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상승의 무학은 가르쳐 주어도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자가 많다. 그래서 옆에서 가르쳐주며 길을 바로잡는 스승이 필요하다.
그런데 원류를 가려내기도 힘들 만큼 변형된 무공을 스스로 터득해서, 실전되었던 고대의 무공을 재현해 내다니.
이건 천재가 아니고선 설명이 되지 않았다.
“흐음……. 놀랍기는 한데, 이렇게 제게 따로 말씀하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곤마가 묻자, 만답서생은 고개를 숙였다.
“너무도 이치에 맞지 않는 상황이라서입니다. 천사령주는 가진 무력에 비해 경지가 모자랐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기본공이었던 일원소마공에 몰입하더니, 갑자기 통달하여 경지가 상승했습니다.”
“흠.”
마도와 정도는 완전히 다른 길이다.
익히는 무공에 따라 성질과 경지도 다르다.
특히 초절정부터 그 방향이 확실히 갈리기 시작하는데, 마교는 마를 뛰어넘는 첫 단계가 초마이며 또 한 번 뛰어넘으면 극마가 된다.
정도무림에서는 초마를 입신의 경지라 부르고, 극마는 화경에 견주었다.
“마성이 몸에 스며든 이는 정도 문파의 무예를 익힐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헌데 어찌 이런 괴사가 일어났는지……. 혹, 일원소마공에 다른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 것입니까?”
비유하자면, 허약한 사람에게 짐승의 피를 수혈하는 격이다. 마공은 정파의 심공에 맹렬하게 반응한다. 그 거부반응은 수련자를 죽게 하거나, 혹은 지독한 주화입마에 빠뜨린다.
그런데 마공으로 대성한 설휘가, 고대의 것이라고는 하나 전진파의 정종무예에 통달하게 되니, 만답서생으로서는 당연한 의문이 드는 것이다.
“아, 그건 그대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본래 천사령주는 마성에 적합한 자가 아니었으니까요.”
“예?!”
이번엔 만답서생의 눈이 커졌다.
마교인이 마성에 적합하지가 않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나도 그게 처음에는 의아했지요. 마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체질로 저 정도의 마공을 익히고 있었으니. 하지만 천미려 님의 제자라는 말에 수긍했습니다.”
“천미려……. 아, 천사령주의 스승이 냉철마녀님이셨습니까?”
만답서생은 그제야 뭔가 풀리는 듯했다.
마교의 역사는 길었다.
마성에 적합한 체질이 아니더라도, 몇 가지 편법으로 마기를 다루는 방법도 연구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음기를 부리는 소수마공이다.
양기, 음기의 양극단에 있는 성질을 충돌시켜, 그 반발력을 마공처럼 적용해서 쓰는 것이다.
다만, 이제까지는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인데…….
“만답서생 님.”
“예.”
“내 시간은 별도로 지시할 테니, 내일 아침까지 준비를 마치도록 하시지요.”
“예, 주군.”
만답서생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오각의 수장들을 제거하는 일.
그 준비는 모두 마쳤다. 이제 결행의 시간만이 곤마에게 남아 있었다.
“이제야 보겠구나.”
곤마는 몸을 돌려 다시 창호 앞에 섰다.
때마침 노란 그믐달 사이로 시커먼 먹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대사형의 당황한 얼굴을 말이야.”
예상 못 한 일격에 일제자 살마는 놀랄 것이다.
어쩌면 극노하여 전력을 이끌고 달려올 수도 있다.
그건 또 그것대로 좋았다.
그 전쟁의 장을, 다른 제자들도 불러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사제자. 이제껏 경쟁상대로도 여겨지지 못했던 자신이 말이다.
***
설휘는 실로 오랜만에 방에 들어왔다.
최근 사색에 잠긴다는 이유로 며칠 동안 방을 비우기도 했기에, 방은 사람의 손길이 크게 닿지 않아 깨끗했다.
“후우.”
목욕을 하고 들어온 설휘는 한쪽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잠깐 쉬었다.
그리고 방 안을 슬쩍 돌아보며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깨끗하고 정갈한 방. 태어난 이래,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그는 원래 자주 씻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실력이 미천할 때는 목욕 같은 사치스런 일이 허락되지 않았고, 여건이 허락될 쯤에는 생존을 위해 뛰어 다니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있던 설휘는 곧 자리에서 일어서며 한쪽에 비치된 면경 앞에 섰다.
전투방식인 턴제가 사라져서일까.
‘Coin 2’란 문구는 더는 보이지 않았다.
‘두 번의 기회라.’
재수 없게 죽는다 해도 한 번의 삶이 더 남아 있다.
그게 설휘에겐 위안이 되었다.
근래 들어 꽤 오랫동안 죽음을 겪지 않아 그런지 더 마음이 편안했다.
‘내가 태황각주를 죽일 수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해봐도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그는 초마의 경지 중에서도 중급, 초입을 넘어 통달의 수준에 맞닿아 있었다.
비록 설휘 자신이 초입이라 하더라도, 특수 기술을 활용한다면 잡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그게 끝일까?
태황각주를 죽이고 난 뒤에는, 어떤 상대가 나타날까. 다음에 상대해야 할 적은 누굴까.
“계십니까?”
때마침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설휘가 이내 들어오라고 명했다.
문틈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하하. 사부, 아니 령주님.”
음무기였다.
그는 환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인사했다.
“그래, 여기 앉거라.”
설휘는 한쪽 의자로 안내했다. 그리고 구비된 주전자에서 차를 한잔 따르며 물었다.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이냐?”
“뭐, 령주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왔습죠. 요 며칠 거의 보이지가 않으시던데요?”
“……일이 좀 있었다.”
“그래 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거, 정말로 경지가 오르신 것이죠?”
“그런 것 같긴 하나……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몸이 좀 가벼워진 것 외에는 큰 느낌이 없으니.”
“그걸로도 충분하지요. 사부님이라면 태황각주 정도는 한 번에 제압하실 겁니다.”
그렇게 몇 마디를 나눈 뒤.
설휘가 화제를 돌려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그것이 말입니다.”
음무기도 어느새 썩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요 며칠 생각해 봤는데……. 중원으로 가서 몇 달간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무사에겐 휴식도 필요한 것입니다. 지친 몸을 달래주고, 견문도 쌓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러다 보면 더욱 심기일전하여 수련에 매진…….”
“너구나?”
“……예?”
음무기의 말에 설휘가 혀를 찼다.
“최근 창고에서 병기와 약재가 많이 없어졌다는 얘기가 있더군. 누가 그걸 팔아서 돈으로 바꿨을까 싶었는데……. 범인이 여기 있었군?”
설휘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음무기는 그런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조, 조금입니다. 많이는 아니고…….”
“그건 됐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알아서 이실직고했기에, 설휘는 그를 더 책망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다른 것이 걱정이었다.
“네가 중원에 가면 또 채음보양한답시고 나댈 것이 아니냐. 얼마나 많은 규수들을 죽이려고?”
“아, 대장은 소식 못 들으셨군요. 저 흡정공엔 완전히 손을 뗐습니다.”
“네가?”
“예, 예전 갈염 장로께서 전수해주신 무공을 사용합니다. 이제 양기가 폭주하는 현상은 충분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예! 대원들에게 물어보십쇼. 다들 대단하다고, 아주 그냥…….”
혼자서 크게 떠들던 음무기는, 침묵하는 설휘를 보며 이내 풀이 죽어버렸다.
“역시 안 되겠죠?”
“뭐, 안 될 것은 없긴 하지.”
“……정말이십니까?”
“그래, 대신에…….”
입가가 찢어질 듯 좋아하는 음무기를 향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 혼자 보내긴 그러니, 적송을 붙여주마.”
“안됩니다! 적송 형님과 같이 다니기는 좀 그렇습니다.”
“왜?”
“재미가 없다니까요. 말수도 없고. 같이 다니다간 제가 질식할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
뭔가 말을 할 듯 말 듯 머뭇거리던 음무기는, 결국 힘들게 털어놓았다.
“못생겼습니다.”
“…….”
“생긴 걸 보십쇼. 여자들이 꼬이지를 않는다고요? 정 붙여 주시려면, 차라리 요림 형님이 좀 더…….”
“역시 그 버릇을 못 버린 것 같은데?”
“아, 그게 아니라 제 말은…….”
그런 음무기를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본 설휘는.
“그래. 일단 생각해볼 테니 들어가거라.”
“예, 령주님! 부디 좋은 쪽으로 생각 부탁드립니다!”
각 잡으며 일어나는 음무기. 그는 곧 빠르게 사라졌다.
그런 모습을 보던 설휘의 얼굴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이어 시선을 천장 쪽으로 들었다.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전투방식 <자유제>
“자, 그럼 이제 불러내 볼까.”
초마에 오르면 가장 먼저 해보려고 했던 것.
자신이 여기까지 오는 데 큰 도움을 줬던 그 녀석을 만나는 것이었다.
이제껏 기다리던 녀석을 만날 생각에, 설휘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