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태황각 침투 (2)
다음 날 아침.
설휘는 늘 다니던 산정 아래 숲속에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분명 초마에 오르긴 올랐다.’
그럼에도 소신수마공과 화온마공, 그리고 사대극마공의 특수 기술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마도 마태룡의 말처럼, 마공으로 초마가 된 게 아닌 정종무공으로 입신에 오른 것이 맞는 듯했다.
기대했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력에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일원소마공의 특수 기술.
마태룡이 쏘아 대던 초검기류조차 되돌리는 기묘한 공능을 얻었으니까.
‘그리고 몸도 예전과 다르다.’
전반적으로 신체 능력이 대폭 상승했다.
내기의 양이 크게 늘었고, 근골도 단단하면서 유연해졌다. 거기에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졌고, 반사신경까지도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말 그대로 한 단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다만, 전투방식 중 AI를 선택했음에도 그를 불러낼 수 없다는 게 아쉽다면 아쉬웠다.
지금 설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였다.
이종의 진기가 이리저리 온몸에 꼬여 있는 상황이라, 앞으로 어찌 될 것인지, 어찌할 것인지를 알려 줄 사람이 절실했다.
“령주님을 뵈옵니다.”
“음.”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구나, 송화야.”
설휘는 돌아 인사를 하고서는 조금 민망해졌다.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느냐?”
한창 수련을 받는 기간 동안, 송화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당장 본인의 경지 상승에 몰두하다 보니, 송화가 어떤 수련을 받았는지, 힘든 일은 없었는지, 도통 신경을 쓰질 못한 것이다.
“네, 잘 지냈습니다. 그러니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얼굴에 그런 태가 난 걸까. 송화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더욱 미안했다.
“앉아라. 오랜만이니 이야기나 들어보자꾸나.”
설휘는 터럭 바위 한쪽을 안내했다.
송화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묻기도 전에 먼저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요즈음 우도 기문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기문법에는 좌도 우도가 있는데, 좌도는 흔히 보는 주술이나 사술이고, 우도는 천지조화와 인간의 길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호오, 그래? 얘기만 들어도 대단하구나.”
신묘 3수.
기문둔갑, 태을, 육임으로 부리는 역술로, 다른 역술에 비해 월등히 높은 적중률을 가지고 있다.
사주보다 한 수 위라고 불리는 것이 기문둔갑이라고.
“천지조화와 인간의 길이라니…….”
무예로 치면 좌도 방문은 기예나 투술이고, 우도는 내공이나 내력에 해당한다.
근본적인 술수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수련이라고.
설휘는 뭔지 잘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린 것이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는 게 대견했으니까.
“그런데 령주님. 어젯밤에 주화입마에 들 뻔하셨다는 얘길 전해 들었습니다.”
“어? 어, 그랬지.”
설휘는 조금 당황했다. 마태룡이 이걸 또 왜 말했나 싶어서.
“제가 무인이 아니라 함부로 판단하긴 어렵지만……. 아마도 기운의 조화가 일어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기운의 조화? 무슨 말이냐?”
“술사든 무인이든, 결국 다루는 것은 자연의 기입니다. 그중 무인들은 축기라 하여, 자연의 기를 몸에 받아들여 쌓은 후 필요할 때 터뜨리는 방식을 사용하지요.”
하지만 뜻밖에도, 송화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녀석은 아이답지 않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공은 이런 천지의 기운 중 가장 강하고 거친 기운을 모으는 것. 반면 정종무공은 정순하고 맑은 기운을 다루는 것입니다. 한데 령주께서는 이 두 기운을 함께 다루고 계시니, 언제고 사달이 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허.”
설휘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현 상황을 이리 정확히 짚어 내다니.
술법가들은 다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놀라웠다.
“허면, 너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아느냐?”
“물론입니다. 사능선(射能線)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능선?”
투욱.
송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극음이 극강하여 스스로 분열하기 시작할 때, 분열로 통하는 냉기 중에 온기가 합쳐져서 하나의 선을 이루는 것을 말하지요. 이론상 대주천을 천겁(劫)이상 행했을 때 일어난다고 합니다.”
“천겁…….”
“예. 무한히 많은 기의 흐름이지요. 그리하려면 우선 천지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야 되겠죠.”
“흐음.”
천지의 기운을 받아들인다.
일단 기본적으로는 운기행공이다. 꾸준한 행공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라는 것이다.
“고맙다. 큰 도움이 되었구나.”
“별말씀을요. 그럼 저는 이만…….”
송화는 예를 갖춘 뒤 조심히 자리를 떠났다.
얼굴이 붉어진 것이, 아무래도 누구에게 뭔가를 가르쳐준다는 게 적응이 되질 않는 듯했다.
“송화를 데려오길 잘 했구나.”
덕분에 설휘도 크게 마음이 놓였다.
대주천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운공을 하다 보면 언젠가 다스려진다.
그런 해답을 얻은 것만으로도 심히 기뻤다.
“천겁이라…… 대충 천 번 정도 하면 되려나?”
다만.
술사들이 말하는 단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
“곤마 님의 지시네.”
그날 저녁, 임무가 내려졌다.
개시 시간은 유시(酉時오후 5~7시). 기습하기 좋은 한밤중이 아닌, 사람들이 적당히 다닐 저녁 시간에 맞춰 시행하라는 지시였다.
‘애초에 보여 주기 위한 것도 있으니까.’
설휘는 그 의도를 이해했다.
굳이 기습이 아니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걸 각인시키고 싶은 것임을.
그가 문밖으로 나오니, 대원들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병기는?”
“잘 챙겼습니다.”
“다른 준비는?”
“완료했습니다.”
설휘는 간단히 절차를 확인한 뒤, 마태룡을 보고 말했다.
“같이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그렇습니다. 그럼.”
마태룡은 짧게 예우를 하고서 급히 몸을 날렸다.
그는 이미 오천각주를 제거하는 별도의 임무를 받은 상태였다.
설휘는 수하들을 천천히 일별하다 짧게 말했다.
“태황각은 이곳과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빠르게 이동할 테니 뒤처지지 마라.”
처억.
수하들이 왼쪽 가슴에 손을 대며 고개를 숙였다. 긴장과 예기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오각의 경계는 별로 삼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찌 보면 천마신교의 대문이나 다름없는 곳.
등용문의 마인들이 마교로 입관하면서 가장 먼저 배정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
딱히 경계를 세우지 않아도, 오가는 모든 사람의 눈이 몰리는 곳.
물론 경계가 있긴 했지만, 그건 적습에 대한 방비가 아니었다.
‘상급자에 대한 방비, 그런 의미가 더 컸지.’
과거의 설휘처럼, 태황각에 정식으로 소속되지 않은 무사들.
그들에겐 오지도 않을 적의 습격보다, 언제 들이닥쳐서 호통을 칠지 모르는 총단의 높은 사람이 더 무서웠다.
설휘도 그런 시절을 겪었기에, 태황각 내부로 침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볍게 제압만 해라.”
그는 태황각 외각의 성루로 들어가는 수하들에게 지시했다.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었다. 외곽 무사들의 수준은 크게 대단하지 않았으니까.
슈슈슉!
적송, 용진과 소령이 한순간에 달려들었다.
성루에 서 있던 무사 둘은 이미 음무기가 혼절시켜 놓았다.
타닥.
쓰러진 이들을 적당히 숨기는 걸 기다린 뒤, 설휘는 태황각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 령주님? 거처로 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요림이 놀라 물었다.
이제껏 태황각 침투 작전은 거처를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이 오갈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헌데 정작 실전에 들어서자 설휘가 사전에 연습한 곳이 아닌, 태황각주의 집무실로 향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기습을 통해 제압할 정도로 만만한 자들은 아니다. 그리고…….”
설휘는 그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직접 물을 것도 있고 해서.”
“알겠습니다.”
요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휘가 갑자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중에 돌아보면, 그때 설휘가 내린 결단이 최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가 가속법을 걸어드리겠습니다.”
때마침 뒤따라오던 송화가 술법을 썼고, 다들 한결 가벼운 기분을 느끼며 지붕 사이를 넘으며 빠르게 달려나갔다.
***
“흐음…….”
태황각주 사마귀는 집무실에서 꽤나 오랫동안 서류를 보고 있었다.
대부분이 중원 내 중소문파와 관련된 서류였다.
태황각에서 차출된 병력들이 중원 일대를 들쑤시고 다니며 살인, 방화를 저지른 구역이 어느 곳인지.
그리고 제압된 피해 숫자가 몇 명인지가 소상히 적혀 있었다.
“피해가…… 상당하군.”
“예. 아무래도 이름 있는 중소문파 몇 군데를 건드린 게 화가 되었나 봅니다.”
그의 오랜 심복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약속했던 것과 너무 다르지 않나! 우리 태황각 마인을 무려 오십이나 죽이다니!”
사마귀가 짜증을 냈다.
칼에는 눈이 없다.
싸움이 벌어지면 예상했던 것과 상이한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쳐도, 이번에는 희생자가 너무 많았다.
“이번에 화산파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조금 더 과하게 손을 쓴 것 같습니다.”
강호에 마인들을 풀어 활개를 치게 만든다.
저잣거리 사람들을 죽이는 건 물론이고, 중소문파를 급습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난입한 마인들을 화산파가 쫓아내며 처단한다.
마교는 실리를 갖고, 화산은 명성을 갖는.
서로 이득을 얻는다는 밀약으로 이루어진 관계다.
“젠장. 그 망할 넷째 제자만 아니었어도…….”
태황각주는 한탄했다.
싸움을 통해 서로서로를 챙기는 관계였다.
정파의 손에 처단되는 본교의 인원들이 있을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많은 피해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몇 달 지나지 않아, 태황각 내 무사들이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올해 천향소는 언제 선발하지?”
“그게…… 계획이 없다고 합니다.”
“왜?”
“아무래도 총단이 적극적이지가 않아서…….”
“하.”
태황각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각의 병력이 줄어들면, 원래라면 당연히 본교에서 인원을 충원해야 했다.
하지만 어찌된 게, 그 당연한 조치가 계속해 늦춰지고 있었다.
아마도 교내 쟁투, 천마 제자들 간의 견제 때문에 여력을 내지 못하는 듯했다.
“할 수 없지. 이번에 강호로 보내는 인원은 서른으로 해라. 우리 태황각도 더는 인원이 없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태황각주 사마귀는 일단 이렇게 일을 매듭지었다.
그렇게 손짓을 하고 그만 내보내려 하는데.
“헌데 각주님, 일제자께서 하신 말씀은 기억하고 계시지요?”
“곤마가 손을 쓸지도 모르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말?”
“그렇습니다.”
피식.
그 말에 태황각주가 입꼬리를 올렸다.
“신경 쓸 거 없다. 천살성이란 이름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버텨 온 겁쟁이가 겁박질이라니. 장담컨대, 사제자의 수하들 중 어떤 놈도 나를 해칠 수는 없어.”
“그럼 다행입니다.”
심복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이어 천천히 문밖을 나섰다.
투욱.
태황각주는 문이 닫히자마자 서류를 놓고서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작금의 상황을 더듬으며 혀를 찼다.
“이거야 원, 앞으로도 계속 손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화산파와 일제자 휘하 세력은 이제껏 암암리에 서로에게 이득을 주던 관계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밀약. 조용히 물 밑에서 이루어지던 거래다.
그걸 이번에 사제자가 다 까밝히면서 들고 일어났다.
공론화.
일제자의 세력이 크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론 마교의 세력이다.
같은 교인들을 적의 화살받이로 쓴다는 소문이 돌면, 아무래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진다.
“골치 아프군. 화산파에 별도의 보상도 해 줘야 할 텐데…….”
게다가 이번 일로 화산파는 매우 분개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예상 못 한 대출혈이 있었던 것이다. 자그마치 셋이나 되는 원로고수가 살해당했으니까.
사실 그들을 죽인 자는 사제자 소속의 설휘였지만, 화산파는 그 직후 쳐들어온 이제자의 가세로 알고 있었다.
본산 전력의 2할 가량이 날아간, 궤멸에 가까운 피해.
화산파는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터. 그것 때문에 머리가 더욱 복잡했다.
“응?”
침침한 눈을 비비며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문 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잘 처먹으며 지내고 있구만.”
“……!”
태황각주는 일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눈앞에 있는 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가 맞는지, 몇 번이나 눈을 껌뻑일 정도였다.
“왜,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
놈이다. 건방졌던 그 잡놈.
태황각주는 눈앞에 있는 자가 설휘라는 걸 그제야 알아보았다.
“허허허.”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대체 왜 여기에 왔는지, 어이가 없어서.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는군. 이제껏 찾아다녀도 꽁꽁 숨어서 보이지도 않더니, 새삼 여길 무슨 생각으로 온 거냐?”
“그건 네가 알 것 없고.”
설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시선을 돌렸다.
“예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말이야. 왜 사군자지?”
“……?”
“매난국죽, 군자의 기상을 보여 준다는 그림이잖아. 그걸 왜 너 같이 뒷구멍 더러운 놈이 가지고 있는지, 그 이유를 오늘 좀 물어봐도 되겠나?”
“…….”
태황각주는 대답이 없었다. 굳은 얼굴로 설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 빤히 쳐다보지 말고, 사람이 말하면 대답을 하는 게 예의 아닌가?”
“크큭.”
웃음이 터졌다.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오히려 웃게 된다는 걸, 너무 어이가 없으면 유쾌해질 수도 있다는 걸.
태황각주는 처음으로 알았다.
그는 이제 재롱이라도 볼 요량으로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죽이지는 마라.”
씨잇!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호위, 흑비의 검이 그림자처럼 설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쨍강.
“……!”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머리 위 사각에서 자신을 기습한 흑비의 검을, 설휘는 너무도 쉽게 잘라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쾅!
발차기 한 번으로 그녀를 문밖으로 날려 버렸다.
외벽을 부순 뒤, 신음과 함께 흑비가 땅에 나뒹굴고.
“다시 묻지.”
무표정한 얼굴로 설휘가 다시 물었다.
“네가 왜 그걸 들고 있느냐고. 뒷구멍이 더러운 태황각주 네가.”
“…….”
자연히, 태황각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