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태황각 침투 (3)
침묵이 흘렀다. 아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번 침묵은 이전과는 달랐다.
태황각주의 눈은 믿기 힘든 장면을 목도한 사람처럼 커져 있었고, 얼굴도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 녀석…… 보게?”
드르륵.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서는 태황각주.
동시에 그의 몸에서 강렬한 열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화온마공.
쳐다만 봐도 숨이 멎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만든다는, 그 마기를 상대에게 쏘아 낸 것이다.
“이, 이 잡놈이…… 대체 뭘 처먹은 게야?”
태황각주 사마귀는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설휘는 자신이 쏘아 낸 화온마공의 기세를 너무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감히 마주하지도 못할 이 기운을.
“언제까지 네놈의 개로 살 수는 없지 않나?”
설휘는 그런 그를 향해 비웃어 주었다.
과거와 달라진 자신을 증명해 보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찌릿찌릿할 정도의 쾌감이 전해져 왔다.
“아주 기가 살았군. 그래서…… 뭐 한 가닥 배운 재주가 생겨서, 이제 나름 해볼 만하다고 여긴 거냐?”
“어디 그뿐이겠나.”
촤르르르르.
설휘가 손바닥을 펼치자, 화공(火功) 한 가닥이 흘러나왔다.
“엇?!”
그로 인해 태황각주의 표정이 급변했다.
상대가 끌어올린 것은 다름 아닌 화온마공이었다.
성질을 조금 더 살펴봐야겠으나, 형체는 매우 흡사했다.
백탄 같은 새하얀 재에서 피어나오는 정염(瀞炎)의 불꽃.
그것이 바로 극양을 이루는 화온마공의 뿌리였다.
“뭘 그리 놀라나? 이걸 너만 쓸 수 있다고 생각했어?”
“이놈이 어디서 이런…….”
이미 쌍심지를 켤 정도로 분노한 사마귀.
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애써 냉정을 되찾았다.
예전에 아무리 하등한 인간으로 보였더라도, 화온마공이라는 고도의 무예를 펼쳐 보였다는 건, 그 자체가 이미 만만치 않은 실력자임을 증명한 것이기에.
“그러니까. 정리를 좀 해 보자면…….”
태황각주는 긴 머리를 한차례 크게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복수를 꿈꾸던 버러지 하나가 사제자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운 좋게 기연을 얻어 이렇게 나를 죽이러 왔다는, 뭐 그런 건가?”
“하나는 빼지. 난 단순히 죽이러만 온 게 아니야. 네놈 낯짝을 아주 지근지근 밟을 생각이라고.”
“크흐흐흐. 그래.”
태황각주는 대놓고 비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크게 신이 났나 보군. 그런데 말이야. 네놈이 어떤 수련을 거쳤는지 모르나…… 실전이라는 건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그래? 그런 자신감이라면, 다행이군.”
치치치칙.
태황각주의 발아래로부터 불꽃이 고리처럼 이어지기 시작했다.
향하는 곳은 설휘 쪽이 아닌, 집무실 내부.
벽 가장자리에 붙어 이윽고 집무실 내부를 완전히 감싸기 시작했다.
“침지대열폭(沈地大熱暴)이라. 처음부터 화끈한데?”
태황각주는 설휘가 무공명을 입에 담자,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기연을 얻었다 한들, 여기까지 파악할 거라곤 생각 못 했기에.
하지만.
“이미 늦었다. 네놈 따위가 이걸 파훼할 수는…….”
콰직!
그때였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벽을 부수며 한 신형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동시에.
화아아아아악!
거대한 범위로 생성된 화공이 천장을 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감히 설휘가 벗어날 수 없는 광역 불길. 그리고 이내 폭발적인 화염 공격을 펼쳐졌다.
콰아아아아앙-!
화온마공의 진수라는 침지대열폭.
그것은 태황각주가 서 있는 자리를 제외한, 거처 일대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
그는 자신의 가신인 흑비의 생사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 눈앞의 상대를 격살하는 데만 집중한 것이었다.
솨아아아-
목재와 뿌연 흙먼지가 흩날리는 가운데, 태황각주가 냉랭하게 말했다.
“근본도 없어 버림받은 잡것이, 어디서 건방지게…… 어?!”
하지만 그의 득의양양한 목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먼지와 연기가 가시자, 곧 주변이 드러났다.
그러자 놈이 보였다.
삼 장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저것 때문인가.’
태황각주는 설휘의 몸 주위로 피어난 소용돌이를 보았다. 저건 단순한 폭풍이 아니었다.
지직. 지직.
뇌전의 성질을 띤 폭풍의 운무가, 강력한 폭발 속에서도 주인을 보호했던 것이다.
“미친놈인 줄은 진즉에 알았지만…….”
물론 설휘에게도 피해는 있었다.
옷가지가 죄다 불에 탔고, 피부에는 불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했다.
하지만 그 일격을 맞고서도 그의 기백은 여전했다.
“제 가신까지 죽이다니.”
태황각주의 예상대로, 설휘가 펼친 것은 초풍신이었다.
침지대열폭이 펼쳐지는 순간, 설휘는 초풍신을 바닥에 대고 발현시켰다.
그러자 지면에서 생성된 강력한 소용돌이가, 사방에서 터지는 폭발과 열기를 밀어냈다.
그러고도 남은 여력으로는 호심공을 펼쳤고, 더욱이 소신수마공의 빙원결갑까지 펼쳐 3겹의 보호막으로 막아냈다.
“대체…….”
당연히 그걸 알 길이 없는 태황각주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당혹감이 자리를 잡았다.
설휘는 검을 들어 손등을 살짝 베었다.
“명색이 태황각주란 놈이 이런 장난질이 통하리라 생각했다는 게 우습군.”
툭툭.
검신을 따라 흐르는 피.
그걸 눈에 비비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럼, 이제 내 차롄가?”
“글쎄…….”
태황각주가 뭔가를 떠올린 듯, 갑자기 여유를 되찾았다.
“멍청한 놈. 네놈이 먼저 상대해야 하는 건, 노부가 아니다.”
그 모습에 설휘가 의아한 눈빛을 내보이자.
“태황소록비. 들어봤을 텐데. 이미 지금 여기에 와 있을 것이다.”
이제껏 굳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대화를 계속 끌어 나갔던 이유.
그건 바로 자신을 보호하는 열 명의 초절정 고수가 이곳에 오기까지의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놈들, 안 와.”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
설휘는 겨우 그거냐, 하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내 수하들이 맡고 있거든.”
태황소록비의 구역은 각주 거처로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태황각 내부에는 곳곳에 감시소가 있었고, 누각으로 보이는 곳이 있었는데, 태황소록비 인원이 그곳에서 대기를 하곤 했다. 주변의 인물들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일리(一里) 간격으로 지어진 여섯 개의 누각이 태황각 내부를 완벽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퍼억!
흑비가 집무실에서 나뒹굴었던 그 순간.
소록비 인원 하나가 수신호로 빠르게 정보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최종적으로 들은 대장 손소동(孫少動)은 곧장 몸을 움직였고.
보고 체계로 인해 폭발이 터지기 전부터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집무실이냐?”
이미 누각에서 벗어나 마중 나와 있는 평원천(平員川)을 보고서 물었다.
“예.”
“모두 날 따라오도록 해라.”
그렇게 이동하는 중에 감시하던 인원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무실 근방에 다다랐을 때는, 소록비 열 명이 모두 모였다.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삼 리 정도 남겨 두고, 먼발치에서 폭발이 이는 것을 목도한 손소동이 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전력으로 간다.”
타다닥!
그때부터 신법을 펼치며 건물 지붕을 밟고서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쇄애액! 쇄액! 사아아악-!
퍼억! 퍼억!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류에, 수하 넷이 몸을 뒤집으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그중에 둘은 툭툭 털고 일어났지만, 둘은 반응이 없었다.
죽은 것이었다.
“적이다!”
“경계하라!”
평원천은 수하들을 향해 소리치며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도 없이 쏘아진 기공.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적들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사사삭!
그래서 나름 초절정 고수로 불리는 이들답게, 수하들의 죽음에도 매우 조직적으로 반응했다.
“아쉽네.”
그때였다.
건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
바로 그는 요림이었다.
“두 명은 쓰러트린다고 장담하더니…… 겨우 한 명이잖아?”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이는 소령이었다.
요림이 신병이기의 특수 기술로 소록비 한 명을 처리했고, 남은 한 명은 그녀가 제거했던 것이었다.
“처음부터 너무 숫자를 줄이면…… 우리가 훈련한 이유가 없어지잖아.”
“나 역시.”
그 이후, 바로 옆 건물 지붕을 밟으며 존재를 드러내는 자들.
음무기와 용진, 적송과 송화였다.
***
스윽.
태황각주가 소매 안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큰 칼을 꺼내 들었다.
‘저건 뭐지?’
그걸 본 설휘는 곧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생전 처음 보는 자그마한 칼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가 사용한 건 장도(粧刀)였다.
작은 칼로 불리는 이것은 몸에 차거나 지니고 다니기에 편리한, 멋을 내는 장신구로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낭도라고도 불리는 것이었다.
“이건, 처음 보는 것일 거다.”
태황각주는 설휘의 반응이 이해된다는 듯 말을 이었다.
“세상은 넓고, 병기들은 많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또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상황을 겪는지에 따라서 특정한 병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그는 장도를 앞으로 들어 보였다.
“이건 그 결과물 중 하나다. 너처럼 허접하게 단련하여 강해진 놈들과는…….”
고오오오.
태황각주의 기운이 변했다.
화온마공이 아닌, 전혀 다른 형태의 암경(暗勁)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른 것이다.
“질적으로 다르단 말이다!”
외침과 함께 쏘아진 탄도신공(彈刀神功).
쐐애액!
초인적인 속도로 설휘의 눈앞까지 당도하던 바로 그때.
[빙공극저하를 사용합니다.]
빙공극저하가 발현되었다.
설휘도 가만히 있지 않고 특수 기술을 펼쳤다.
사아아아아.
설휘는 눈으로 보고서 탄도신공을 피해냈다.
하지만, 하나가 아니었다.
그 짧은 사이, 몇 번이나 쏘아낸 탄도신공이 각각의 방위를 점하여 날아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설휘는 손쉽게 피해냈고.
파파팟.
오히려 그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쩌어엉! 쩌어엉!
검탄과 흡사한 이 기공을 상대로, 설휘는 태황각주와의 거리를 극단적으로 좁혔다.
‘아!’
하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시간을 결박한 것일까.
시간이 흐름이 예고 없이 본래대로 이어졌고.
쇄액!
태황각주의 장도가 설휘의 허리로 향했다.
캉!
허나, 설휘는 검을 아래로 세우며 공격에 대비했고,
촤악.
이어 남은 손으로 태황각주의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아래로 내리찍으려 했다.
‘흡!’
하지만 쉽지 않았다.
설휘는 곧장 반격하려는 태황각주를 보며, 마지막까지 그의 머리통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 없었다.
콰당탕!
결국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으로 마무리하며 뒤로 물러났다.
“크…….”
하늘을 보고 있는 태황각주.
그의 표정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치욕, 수치심, 모멸감.
그런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오자, 그의 얼굴은 터질 듯 붉게 물들었다.
“거 참, 발로 지근지근 밟아 줬어야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아쉬워하는 설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분노를 더욱 자극하여, 이내 표정이 짓이겨졌다.
“미안하군.”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설휘를 보며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인정했어야 했는데 말이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는 걸.”
투욱.
태황각주는 장도를 집어던졌다.
“그러니, 이젠 확실히 보여 주마.”
철컥.
이제야 전력을 다하려는 요량인가.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패도를 집어 들었다.
“너와 나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말이다.”
즈으으으.
태황각주의 어깨에서 두 가지 기운이 동시에 폭주하고 있었다.
하나는 화온마공. 또 하나는 암경의 기운이었다.
‘어?’
왠지 모를 두려움이 엄습했다.
상대가 두 가지 무공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다는 건,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