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태극(太極) (1)
설휘의 눈앞에 뜬 세 가지 선택지는 그 어떤 때보다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목숨…….’
이번이 마지막이다.
지금까지와 달리, ‘다음’을 대비할 여력 같은 것은 없다. 그러니 모험은 안 된다.
그럼 첫 번째가 답인 걸까?
두 번째는 어차피 세 번째 지문에 귀결되는 상황이니.
‘그것 역시 확실할 수 없어.’
설휘는 이제까지의 상황을 다시 한번 짚어 보았다.
첫 번째로 돌아간다면 곤마가 세 가지의 삶을 제시할 것이고, 그중 선택하지 않았던 ‘호위무사 되기’나 ‘비밀무사 되기’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생존 확률이 더 높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비밀무사는 애초에 위험한 직위다.
기밀이 요구되고, 정상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만큼 보상이 후하고 권한이 커질 테지만, 그 대신 까다롭고 복잡한 임무에 투입될 공산이 높았다. 죽을 확률도 높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호위무사는…… 최측근이다.
곤마의 가까이에서 활동하니 위세가 더욱 높고, 이전에 보지 못한 중요한 기밀을 접할 기회가 많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곤마의 위치는 불안정하다.’
측근이라 해도, 천마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힘이 없는 넷째 제자.
혹 그를 노리는 기습이나 공격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매사에 주의해야 하고, 곤마의 지척에 있어야만 한다.
위기 자체가 많지는 않겠지만, 그 위기가 왔다 하면 죽을 위험이 높았다.
또한, 호위무사라는 건 주군을 대신해서 먼저 목숨을 던져야 하는 존재.
만약 습격에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정작 호위 대상인 곤마가 큰 부상을 당하기라도 하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닐 것이다.
“후우.”
결국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나는 어떤 앞길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자신의 주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선택지.
또 하나는 극도로 위험하지만, 미래를 알고서 대비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여건이 좋은 선택지.
전자냐, 후자냐.
어떤 것이 더 나은 선택인지 알 수 없으니, 이렇게 계속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아니지. 어차피 둘 다 위험할 수 있다면…….’
설휘는 그 순간 선택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짐을 느꼈다.
바로 신병이기.
다른 선택지를 고른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신병이기를 다시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떨어진 지점으로 달려가면 건질 수야 있겠지만, 그건 설휘의 것일 뿐.
수하들의 것까지 새로 구해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 정작 거기서 또다시 앞길이 막힌다면? 그땐 어찌할 것인가?
‘지금 상황에서 구종명만 피하면 되는 거 아닐까?’
되살아나는 선택을 하기까지 시간제한은 없다. 그래서 설휘는 이참에 조금 길게 생각을 해 보았다.
애초에 피할 수 없는 죽음, 절대고수 구종명과 왜 마주치게 되었던가.
‘너무 시끄럽게 일을 벌였기 때문이지.’
구종명이 태황각 내에 있긴 했겠지만, 그는 화산파의 인물이다.
비밀리에 태황각주에게 따지러 온 몸이고, 공공연히 얼굴을 내비칠 수 없는 몸.
설휘가 태황각주에게 가진 악감이 아니었다면.
이번처럼 정면으로 붙어 주변 건물을 다 박살내는 엄청난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구종명은 분을 참으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고, 굳이 그와 마주치지 않고 빠져나올 수도 있다.
‘아니면, 태황각주를 죽이는 걸 조금 늦춰도 된다.’
설휘는 거기서 생각을 조금 더 했다.
이번에 죽기 전, 태황각이 아수라장이 되고 구종명과 싸움이 일어났을 때도 홍마원에서는 별도의 무사들을 투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곤마의 다른 작업들.
태황각만이 아니라, 다른 오각에 동시에 투입된 비밀무사들이 곳곳에서 활개를 쳤을 것이다.
홍마원은 당연히 가장 가까운 오천각부터 병력을 투입했을 터.
구종명이 아무리 절대고수라 해도, 마교의 최중심에서 본교의 인물들이 대거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로서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될 것이고, 설휘는 그 틈을 타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래. 제대로 준비하고 움직인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 거기다가…….”
생각해 보니, 잃은 목숨을 다시 얻을 수 있는 방법도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한참을 심사숙고한 뒤, 설휘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천력 98년, 본 스토리_운명의 날.’의 기록을 불러옵니다.>
새하얀 빛과 함께.
그는 시간을 기록했던 지점으로 이동했다.
***
시야가 밝아지고 문이 보였다.
‘곤마의 거처다.’
설휘는 지금이 어느 시기인지 곧 알아차렸다.
송화를 데리고 마태룡을 구출한 뒤, 임무 수행에 대한 보고를 하던 그 시점.
드르륵.
방으로 들어오자 곤마가 이전처럼 자신을 환대했다.
“사령대장. 이번에도 고생이 많았다.”
곤마는 이전처럼 위로와 함께 격려를 해주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엔 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역시나 이전처럼 형식적인 인사를 한 뒤, 곤마가 입을 열려고 할 때.
“호위무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닙니다.”
“……?”
“지난번에 말씀하신 것 말입니다. 그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
곤마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하려고 했던 말을 빼앗겼으니 일순 당황했을 터.
“그런가. 그럼 진즉에 찾아오지 그랬나.”
“아직 제가 해결하지 못한 난제가 있어서 말입니다.”
“난제?”
“예.”
기존의 실패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지난 회차에서 얻을 것은 이미 얻은 처지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 얻은 것을 적극 활용할 생각이었다.
“실은, 제 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경지의 상승에 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경지의 상승?”
“예. 제 사부께서는 화공과 빙공을 조화롭게 운용하면, 더 높은 경지에 오르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그 말씀을 따라왔고요. 하지만 은영단 무공 중 일원소마공의 원류를 이해하다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상한 일이라.”
곤마의 눈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경지의 상승, 빙공과 화공의 조화, 거기에 일원소마공의 원류라는 말까지.
무인으로서, 자신이 모르는 경지에 대해 흥미가 일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저는 분명히 마인입니다. 그러니 몸에 마기가 쌓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정종무공의 입신의 경지에 올라 버렸습니다.”
“……뭐라고?”
“쉽게 말해서, 마공과 마공을 서로 섞다가 정순한 기운이 생겨버린 겁니다. 심지어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상단전을 통해 자연의 기류와 소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단전에 쌓인 마공을 더는 확장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겁니다.”
“…….”
곤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만큼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잠깐 손을 줘 보겠나?”
“예.”
설휘는 순순히 그의 말대로 손을 내밀었다.
턱.
곤마는 그의 맥문에 자신의 내공을 투사했다. 손목 어림이 근질거리고 따끔거리기를 한참.
곤마가 진심으로 놀라 탄성을 내질렀다.
“허! 이런, 이게 무슨……!”
일원공은 전진파, 고대 도가의 무공이었다.
그 요체가 소실되어 일부만 남은 일원공에, 마공의 강맹한 성격을 넣어 개량한 것이 바로 일원소마공.
비유하자면 부서진 나무 의자를 주워 와서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전체적으로 크기를 맞춰 삐걱대지만 적당히 앉을 수 있는 작은 의자를 만든 것이다.
헌데 설휘는 그 작은 의자를 다시 분해해서 예전의 더 큰 의자로, 심지어 썩은 부분을 다시 되살려서 예전 형태로 새로 만들어낸 격이다.
“믿어지지가 않는군. 사령대장, 자네 대체 뭘 어떻게 한 겐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당연히 그렇겠지. 허, 참.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군.”
곤마가 실소했다.
꼬리가 잡힐까 봐 대충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기실 아는 대로 모든 것을 말했다고 해도 곤마로서는 이런 기현상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마공과 마공을 섞었는데 정종무공이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만큼 전대미문의 일이고, 기이한 현상이다. 눈앞의 설휘가 아니었다면, 아마 웃기는 농담거리로 듣고 넘겼을 터였다.
“사제자께서 주신 제안에 바로 답을 드리지 못한 까닭은 이 때문입니다. 저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요.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지금의 답보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더군요.”
어쨌든, 기왕에 일이 복잡해진 것을, 설휘는 변명거리 삼아 내밀었다.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내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고. 적당히 그렇게 치장하면 말이 되기도 했으니까.
“해서 이제야 말씀드립니다, 사제자님. 지금의 제 몸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난 공과 같습니다. 이런 몸으론 주군께서 내리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요.”
“그래……. 자네도 고심이 많았겠군. 혼자서.”
곤마가 납득했다는 듯, 안쓰러워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에 설휘는 한발 더 나갔다.
“예. 기왕 말씀을 드린 김에, 혹 가르침을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간 제가 백방으로 알아본 바, 사능선이란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사능선…….”
음양을 조화롭게 운용하여 내기를 더욱 키우는 방법. 그것으로 마성을 더욱 크게 만드는 방법이다.
하지만, 난이도가 대단히 높은 게 문제였다.
음양의 조화는 주로 정파에서도 절기로 분류되는, 신공이라는 이름이 붙는 초상승의 내공.
하물며 조화보다는 상충을 더 많이 겪는 마교에서는 깊이 연구되지 않은 분야였다.
음양을 다 쓰며 조화를 추구하는 까다로운 수련을 할 바에야, 그냥 한쪽에 극한으로 힘을 싣는 것이 훨씬 효율이 좋았으니까.
“흐음.”
마교의 다른 고수들이었다면 분명 그렇게 하라고 권했을 것이다. 하지만 곤마는 조금 달랐다. 그는 설휘의 말을 듣고서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역시나.’
설휘는 자신이 의논할 상대를 잘 골랐음을 인지했다.
곤마는 천살성을 타고난 자다.
무재라는 말은 단순히 절대적인 무공을 쓴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외에도 몇 가지 설이 있다.
무공에 관해서 한번 본 것은 잊지 않고, 어떤 무공이든 한번 보면 그 원류를 꿰뚫어본다는 것.
해서 혹여나 하여 해결법이 없을까 기대를 걸어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태극(太極)을 말하는 것이구나.”
“예?”
“만물의 근원. 음과 양이 서로 분화되지 않고 맞물려 있는 상태를 말한다. 기운의 흐름을 한데 묶는 것. 태극을 통해 하나로 융합할 수 있는 것이다.”
“아…….”
“마공이 부족한 상황을 그런 식으로 타개하려 하다니. 그래,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는 생각이다. 거기에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 바로 무당의 태극이다.”
답을 알려줬지만, 그 무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곤마는 조금 굳은 얼굴로 변했다.
설휘의 표정 역시 굳어 있었다.
마공을 익히기 위해 무당의 무공을 익혀야 한다니.
어쩌면, 이건 불가능에 가까운…….
‘어?’
때마침 곤마가 뒤돌아섰다.
그리고 수납장을 열더니, 이내 뭔가를 내밀었다.
“받거라.”
“이건…….”
“태극심공(太極心功)이다.”
“……!”
설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정파의, 그것도 무당의 무공을.
놀랍게도 곤마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