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태극(太極) (3)
"천사령주라고......"
만답서생은 새로 받은 임무를 되새기며 숲속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비밀무사들의 거처는 은영단 내부에서도 가장 외곽 쪽에 위치한다.
거기다 이동 중에도 몇 번의 심문을 받을 만큼 나름대로 경계가 잘 이루어져 있었다.
전각에 들어서니 시비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천사령주는 어디 계시느냐?"
"2층의 거처에 계십니다"
"그래. 내가 오늘부터 그 분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가서 모시고 오도록 해라."
"네."
시비는 그렇게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얼마 후, 난처한 얼굴로 내려왔다. 함께 와야 할 천사령주 없이 혼자.
"어찌 혼자 오느냐?"
"그게...... 용무가 있으면 본인이 올라오시랍니다."
"뭐? 허......"
만답서생에겐 뜻밖의 반응이었다.
아무리 새 부대의 지휘관이 될 사람이라고는 하나, 고작 1일 차의 비밀무사 교육생이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내 거처로 올라갔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나른한 표정과는 완전히 달랐다.
“큼큼. 계십니까?”
문 앞에서 인기척을 냈음에도 아무 대답이 없자, 만답서생은 결국 본인이 직접 문을 열었다.
드르륵.
방 중앙에 한 사내가 보였다.
하의만 입은 채로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척 봐도 운공 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음?’
그런데 그의 몸에서 풍겨 오는 기운들이 이상했다.
강한 열기와 냉기가 서로 뒤섞여 순환하듯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말없이 그런 현상을 이각가량 지켜보았을 때.
“오셨습니까.”
설휘는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아는 체를 해왔다.
만답서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선제압, 자신이 누군지 확실히 알려줄 생각으로 입을 열려 했다.
“제 교육을 맡아주신 만답서생이시군요.”
“아, 예? 뭐, 그렇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선수를 빼앗겼다.
상대가 자신의 별호를 알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만답서생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스윽.
이내 기를 갈무리한 설휘가 일어서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앉으십시오.”
손님 접대용의 의자와 탁자, 찻잔과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만답서생은 자리에 앉으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헌데 무슨 수련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기운을 한데 묶는다고 할까요.”
“기운을 한데 묶는다고요?"
“설명하자면 좀 복잡합니다. 이리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제가 좀 하루하루 시간이 빠듯해서....... 지금 당장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까?"
“.......저도 시간을 많이 뺏지 않을 생각입니다.”
뭔가 만만치 않다.
만답서생은 그렇게 생각하며 두꺼운 인명록을 설휘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비밀무사로 임명되신 이상, 알아두셔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기초적인 정보 숙지가 되지 않으면 일을 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는 법이지요.”
“정보라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
“제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라면,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만답서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 그가 가져온 인명록은 얼마 전에 갱신된 것이다.
마교는 중원 무림만큼이나 거대한 단체이고, 그 안에서 매번 새로 생겨나는 파벌이나 정세 변화.
그리고 거기에 연관된 인물들의 변화가 잦다.
그래서 정보 관련 업무를 맡은 이라 해도 수시로 확인을 해야 하건만.
“그렇게 자신하고 계신다면 몇 가지 확인을 좀 하겠습니다.”
만답서생은 여기서 한 번 상대의 기를 눌러줄 필요를 느꼈다.
사실, 신입으로 들어오게 된 이들은 이런 행태를 종종 보인다.
나름대로 비밀무사에 임명될 만큼의 무공을 익혔으니, 자존심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자신은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해줄 교육자다.
교육자를 전적으로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무위가 뛰어나도 어긋날 뿐.
그는 책 안에서도 뒤에 나오는 부분을 짚어 물었다.
“백련총주(百鍊塚主)가 누군지 아십니까?"
“감숙 명사산(沙山)에 터를 두고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12대 총주는 손소환(孫素煥). 무공수위는 화경. 그를 따르는 수하들은 3만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신입 비밀무사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
만답서생은 조금 놀랐다. 그는 다시 대상을 본교로 정하고 질문했다.
“일제자님의 오른팔이 누군지 아십니까?"
“척의의(戚意義), 극마고수로 서열 10위라고 들었습니다. 외부활동은 거의 하지 않지만, 근처에서 따르며 호위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삼제자님을 따르는 은둔고수 중에 반용(潘用)이란 자를 아십니까?”
“머리가 부서지지 않는 한,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불마공(不癒功)을 쓰는 자이지요. 십 년 전 총단에서 언급될 정도의 극마고수였지만, 현재로서는 더 강한 무공을 연마하기 위해서 은둔하고 계십니다.”
만답서생은 몇 가지를 더 질문했고, 그리고 답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자신이 가져온 인명록은 총단의 장로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따르는 인물들을 총망라한 것이다.
더욱이 마교뿐만 아니라 강대한 세외세력의 인물들까지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것인가.
이걸 모두 아는 이라면,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거늘.
“령주께서는 천마 제자분들의 후계자 쟁탈전이 왜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이제 만답서생은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자잘한 정보를 습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좀 더 먼 곳에서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본래는 일제자 이제자의 싸움이었지만, 어느 날 삼제자 아령 님의 세력이 급성장하게 되어 삼파전의 양상으로 변했지요.”
“......!”
“그 구도가 다시 안정적으로 접어들게 될 때쯤 교주께서 사제자님에게 후계자 자격이 있다고 공표하셨습니다. 싸움이 계속되어야 제자들이 더욱 노력해서 역량을 쌓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요.”
“........령주께서는 이 모든 일이 교주의 개입이라고 생각하신다는 말입니까?”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당장 삼제자 아령 님께 붙은 은거고수, 그들은 그 누구의 말에도 따르지 않던 본교의 장로들입니다. 그들에게 가세하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교주님 외에 더 있습니까?”
만답서생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이런 자가 어디서?
세밀한 정보는 손금 들여다보듯 꿰고 있고, 큰 틀에서 벌어지는 정세판단까지 하고 있는 인물이다.
곤마는 이런 자를 어디서 찾아냈을까. 그리고 이 정도 능력을 가진 이가, 왜 하필 제자 간 쟁투에서 가장 약한 곤마의 세력에 들어온 것인가.
그렇게 만답서생의 머리가 복잡해질 즈음.
“음. 죄송합니다만 시간이 됐군요. 저는 수련하러 나가봐야겠습니다.”
“뒷산 산정에서 우측길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절벽이 나오는 곳이 있습니다. 제게 할 말이 있으시다면 그곳으로 오시지요. 궁금한 게 더 있으십니까?"
"......... 아닙니다.”
“그럼.” 설휘는 그렇게 뒤돌아섰다.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만답서생의 눈빛을 보지도 않은 채.
“아. 참!”
아, 아니 보기는 했다.
상대가 질문하면서 시선을 돌렸으니까.
“겁(劫)이라고 아십니까?"
그런데 그건,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것이었다.
“겁이라면, 아주 많은 기간을 말하는...... 그 겁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되묻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줘야 할지 한참을 생각했으니까.
“횟수를 치면 대체 몇 번 정도일까요? 만 번? 백만 번?”
“........”
의외의 곳에서 허술하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만답서생은 대답했다.
"4만 번의 횟수를 숫자 일이라 했을 때, 숫자 만 번쯤 될 것입니다.”
"......"
기분 탓일까.
왠지 그 대답을 들은 상대가, 삐끗하는 것처럼 보였다.
***
“흐음. 설휘는 뒷산 산정 아래. 이전과는 달리,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의 어느 중턱 즈음에 앉아 있었다.
“거의 무한한 숫자란 말이군."
대략적인 숫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횟수.
사실상 세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가능한 횟수일지 모른다.”
하지만 설휘는 그런 절망적인 대답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떠올리고 있었다.
바로 몸속을 대주천하던 기류의 흐름.
처음엔 한 번을 돌 때만 해도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나중에는 겨우 한 호흡 정도로 순식간에 기맥 사이를 한 바퀴 돌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태극심공을 운용할수록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다는 것이다.
가속도가 붙는다. 하루 종일 하면 나중에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질 터.
그럼 삼 일은? 오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일 것이다.
이게 가능한 것인지, 몸속에 진기가 태극처럼 빠르게 돌면 당연히 기력이 소모되는데, 그때 정수리의 백회혈에서 타고 기운이 들어와 소비된 기운을 보충해준다.
그로 인해 태극심결은 좀 더 빨리 진기를 일주천하게 만드는 것이다.
“좋아. 해보자.”
그렇게 시작한 태극신공은 하루, 이틀을 훌쩍 넘겼다.
투툭. 투툭.
삼 일째쯤 비가 왔다.
설휘는 비를 맞으면서도 가부좌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은 한 달.
그 안에 어떻게든 초마에 올라야 했다.
'숫자는 이제 무의미해.'
단전을 통해 일주천하는 것이 눈 한 번 깜빡하는 속도보다 더욱 빨랐다.
가속에 가속이 붙다 보니, 이제는 수를 세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통제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 와 버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변화를 만들어내려면, 아직은 턱없이 부족했다.
십 일째인가.
도중에 나타난 만답서생이 뭐라 뭐라 얘기한 것 같은데,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신했다.
그런 반응이 답답했는지 뭐라 뭐라 또 애기하더니, 이내 입을 쭈욱 내밀고 사라졌다.
보름이 조금 넘었을 때. 배고픔 때문인지 조금 정신이 흐려졌다. 그때 차가운 비가 내려 입을 적실 수 있었다.
단전의 기운의 흐름은 이제는 자신이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계속 놓아두었다.
언제고 태극의 묘 앞에서 기류의 흐름은 변화를 일으킬 거고, 그 지점을 잡으면 되는 것이니.
이십 일 하고도 며칠이 지났을 때일까.
설휘는 몸에 변화가 있음을 실감했다.
거의 원 없이 돌리는 가운데서 갑자기 기류의 변화가 느꼈다.
이거 설마?'
그 순간 온몸이 터지는 변화가 보였다.
이전에 임독맥이 뚫린 듯한 변화가 또다시 있었고, 무려 서너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리고 한순간.
사아아아아~
주변의 흐르던 찬 기운, 더운 기운이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설휘의 몸에서 흐르는 여러 기운이, 자연에 흐르는 기운과 동화된 것이다.
“이 무슨........”
설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십여 일 동안 먹지 못해 온몸이 깡마른 몸으로 변해 있었지만, 눈빛은 매우 청청했다.
그가 자신의 몸속을 더듬은 결과는.......
정확히 모르겠다였다.
그의 몸을 채운 기운은 정순한 기운도, 마성도 아닌 뭔가 좀 다른 기운이었다.
“초마에 오른 게 맞는 걸까.”
해서 의심했다. 그냥 화경으로 간 건지. 그것도 아닌 극마에 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경지 상승으로 인해 특수 기술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천어빙화폭(天固水火暴)을 익혔습니다.]
[생지멸절공(生地滅純功)을 익혔습니다.]
[무극초풍신(無極超風神)을 익혔습니다.]
“아 ....”
빙공극저화와 수라폭열공. 그리고 사대극마공인 초풍신이 사라지고 나타난 능력.
모두 한 단계 더 높은 능력으로 진일보된 것이 표시되었다.
“정녕 오른 건가..........”
설휘는 잠깐 특수기술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더욱 위쪽으로 올려보고 있었다.
전투방식 <자유제>
순간, 그의 얼굴이 흔들렸다.
이제야 드디어 그를 불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선택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마 이전처럼 위기 상황이 되어야 할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스윽.
허리춤에 찬. 두 개의 칼.
풍운극마검과 태황각주의 도다.
예전에 설휘는 이걸 던져 자신의 몸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휙휙!
이번에도 그렇게 위로 두 자루의 칼을 던졌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뭐지?'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압박감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시간의 밀도도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그 지점부터 신경이 쓰였다면, 지금은 떨어지는 와중에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툭툭.
몸을 스치고 나가는 검에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피부를 스치고 지나간 두 칼을 보면서 설휘는 생각에 잠겼다.
“이게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웬만해서는 위험을 감지하지 않는 몸.
거기다 경지가 오름으로 인해서 웬만해선 정신적인 면도 상당히 달라진 것 같았다.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고민하던 설휘이 절벽 밑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않는 아래.
아래에 강이 있지만, 높이상 떨어지면 그냥 죽을 높이.
“이건 좀 위험한 것 같긴 한데.......”
잠깐 고민하던 설휘는 이내 결심했다.
한 달이란 시간이 거의 다가온 상황에서, 더는 뭉그적거릴 여유가 없었다.
“그럼, 어디 안 나오고 배기는지 보자.”
파파팟.
말과 함께 자리에서 도약한 설휘.
천길 낭떠러지 그 아래로 몸을 내던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느꼈다.
'이거 진짜.......’
점점 빨리지는 몸뚱어리를 보며 정말로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이 느껴진 것이다.
그리고 점점 밝아지는 지면.
아니. 지면? 강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곳의 위치가 자신이 알고 있는 장소와 달랐다.
전투방식
그것이 주요했던 걸까.
기다렸다는 듯 전투방식이 바뀌며 설휘의 몸을 소유한 대상이 달라졌다.
곰처럼 오랫동안 잠을 자던 그를 드디어 깨울 수 있었던 것이다.
“야이이이이--- 씨바새끼야야야~!"
거침없는 욕설.
몸이 분리되며 드러나는, 자신을 죽일 것 같이 구는 인상.
그였다.
언제 들어도 흥겨운 AI 설휘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