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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물레이션-172화 (173/379)

172화. 잘못 찾은 길 (4)

“하겠습니다!!!”

목청껏 소리치자 달려들려던 왕모력이 움찔했다.

“뭘 해?”

“선배께서 세 수를 양보해 주신다고 했으니, 후배된 도리로서 당연히 감사하게 받아야지요. 하겠습니다. 대련!”

“.......어? 음, 그럴래?”

“예.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하려면........”

“오야. 기다려주마.”

상대가 흔쾌히 승낙하자 설휘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노인은 극마의 고수다.

다짜고짜 달려들었으면, 개박살이 날 것이 뻔했다.

피할 수 없다면, 선수의 양보라도 확실히 받아놔야 했다.

'초장에 박살낸다.'

호흡을 가다듬고, 왕모력을 주시하며 설휘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생각해 보면 이 싸움, 그리 답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상대가 극마고수라고는 하나, 자신 역시 극마를 바라보는 수준까지 오르지 않았는가.

또한 초마에 오르면서 얻어낸 최고의 기술이 존재한다.

적의 양보로 얻어낸 세 번의 기회를 잘 살리면.

어쩌면, 해볼 만한 싸움이 될 것이다.

“자, 드루와.”

한편, 왕모력은 썩 즐거워 보였다.

조금 전까지 느긋하게 책을 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엉덩이를 이리저리 흔들고, 손을 머리 위로 들고 몸을 비트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스윽.

경망스러운 행동에 설휘는 순간 주먹이 나갈 뻔했다.

'저건 전략이다. 흔들리면 안 돼.'

뻔한 격장지계에 피 같은 한 수를 잃어버릴 수는 없다. 마음을 다잡고, 상대와 일 장 정도 거리에서 내기를 끌어올렸다.

무극초풍신.

설휘의 첫 수였다.

“하압.”

기합과 함께 싸움은 시작되었다.

고개를 숙임과 함께 빠르게 거리를 좁힌 설휘.

그는 순간적으로 느려진 왕모력의 복부를 향해 그대로 손을 뻗었다.

퍽.

하지만 닿지 못했다. 노인이 재빨리 두 팔을 교차시키며 공격을 차단했으니까.

그래도 무극초풍신을 펼치기에는 충분했다.

“끝이다.”

쿠와아아아앙!

설휘의 손에서 수십 개의 뇌전이 뻗어 나갔다.

동시에 생성되는 검은 폭풍.

태황각주를 죽일 때조차 기파를 조절했던 힘을,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개방시켰다.

쿠쿠쿠쿠쿵!

검은 폭풍은 왕모력의 몸보다 몇 배나 커지며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다.

그의 몸을 밀어내고 후려갈겼다.

콰콰콰쾅!

왕모력은 벽에 부딪히고 천장에 찍혔다가, 바닥에 쑤셔 박히며 계속해서 밀려나갔고.

구구구구궁.

검은 폭풍은 단단한 돌벽에 몇 개의 동혈을 만들고서야 겨우 사그라들었다.

'이겼어.'

설휘는 흥분에 사로잡혔다.

극마고수를 이겼다. 무극초풍신은 정말이지 너무도 강력한 기술이었다.

장법으로 써도 이 정도인데, 검을 써서 펼쳤다면 이보다 훨씬 더 가공할 위력이 나올 것 같았다. 이 천일관을 통째로 무너뜨릴 만큼.

스스스스.

그런데, 연기와 먼지가 가라앉는 순간.

갑자기 동혈 안에서 괴성이 들렸다.

“우오오오.”

울음소린지 웃음소린지 분간이 가지 않는 소리.

그리고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노인.

'아!’

그에 설휘는 기겁했다.

상대는 살아 있었다. 그것도 멀쩡했다.

몸에 걸친 옷 절반이 찢어져 드문드문 상처가 보이긴 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피륙을 긁은 정도.

부러지거나 심각하게 내상을 입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 할 수가 있기는 했군! 정말 대단해! 방금 그 공격은 극마는 되어야 펼칠 그런 공격이었어!”

“두 번 남았지? 자, 빨리 들어와. 다음이 기대되는군!”

크허허허 웃는 왕모력을 보며 설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역시.......

이놈은 미친놈이 맞다.

아니, 사람 새끼가 아니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저 가공할 위력을 처맞고도 멀쩡할 수가 있단 말인가.

“뭐야? 안 할 거야? 그럼 내가 갈까?"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는 왕모력.

그 말에 설휘는 기겁하여 정신을 차렸다.

“합니다! 아직 두 번이 남았지요?"

일단 지른 뒤 고민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무극초풍신이 통하지 않는다면, 더 강한 기술을 펼쳐내야 해.'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천어빙화폭.

이것으로 그냥 단칼에 박살내 버릴 수밖에.

“........너 뭐하냐?”

상대가 갑자기 신발을 벗기 시작하자 왕모력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공을 펼치다 말고 갑자기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곧 됩니다. 잠시만요......”

설휘는 허둥지둥 신을 고쳐 신었다. 그러면서 눈앞에 보이는 특수 기술표 중 '↕'을 지웠고.

[천어빙화폭] :

→←↑↓↓↑↓ A 또는 B

기술표에 나타난 동작을 한 번 확인하면서 생각했다.

'이건 절대 막지 못할 것이다.

확실하다. 아니, 단언한다.

지난번 시험해 본 결과, 이 기술은 과거 수라폭열공보다 더욱 강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맞기만 하면, 그게 누구든 얼음 가루로 만들어 버릴 어마어마한 무공.

더욱이 이렇게 한 수를 받아주겠다고 버티는 놈에게는 최적의 무공이었다.

“자 갑니다.”

“어. 드루와.”

철컥.

설휘는 이번에 검을 빼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일순, 빠르게 달려나가며 앞뒤. 위. 아래. 아래. 위. 아래까지 그대로 동작을 구현했고.

“하압!”

외침과 함께 검을 뻗었다.

'.......?’

동시에 왕도력의 눈이 커졌다.

그의 안력에 미세한 기공이 잡혔다.

헌데 처음 날아들 때는 평범한 기공의 형태로 보이다가, 갑자기 기이한 색으로 바뀌자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건 위험하다라고.

이미 신체가 금강불괴에 달한 그가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다. 왕모력은 즉각, 자신의 몸속에 흐르던 기력을 한데 모았다.

사아아아-

점차 새하얗게 변하는 기공을 보며 그는 모은 기력을 일시간 발출했다.

그리고 보았다.

차디찬 빙정의 기류와, 그걸 터뜨리며 뻗어나오는 화공의 포악함을.

콰아아아아앙-!

검기처럼 뻗어 나간 천어빙화폭은 벽을 뚫었다.

사방을 얼려가는 빙하의 기운, 이후, 뒤따라 간 화공이 거대한 충격을 전해주었다.

드드득, 드드드득.

설휘가 검을 내지른 주변은 막대한 기의 파동으로 요동치기 시작했고, 천일관의 지하 천장도 무너질 듯 흔들렸다.

“아......!”

그리고 밝아졌던 설휘의 안색이 변했다.

폭심지에서 일 장 거리.

상대는 거기서 자신의 무공을 감상하듯 묘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

“와! 이건 정말 대단한데? 막았으면 죽었을 수도 있겠어!"

“피, 피하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설휘는 적반하장으로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상대는 자신이 기술을 펼치자마자 피해낸 것이다. 분명 맞기만 하면 죽일 수 있었는데!

“아니, 이놈의 새끼가 상도덕이라곤 밥 말아 먹었네? 야! 그럼 저런 걸 무조건 처맞으라고?"

물론, 왕모력은 어처구니가 없어 일갈했다.

딱 봐도 죽일 기세로 날려놓고 피하면 어쩌냐니. 그럼 칼 날아오는데 모가지 똑 하고 내놓을 것인가.

애초에 세 수를 양보해 준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일이거늘.

“자, 마지막.”

다시 맞은편에 선 왕모력이 이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

설휘는 침묵했다.

무극초풍신은 막혔고, 천어빙화폭은 피해냈다.

지금의 그로서는 할 수 있는 공격 수단이 없었다.

남은 특수 기술이라곤 생지멸절공이 있기는 하나, 어찌해야 발동하는지 감도 안 잡히는 지경.

그렇다면.

“자, 들어오라고.”

왕모력이 또다시 외치자, 설휘는 두 손을 바짝 허벅지에 붙였다.

정말이지 이런 수는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최후의 수는 이것뿐이었다. 설휘는 이를 사려 물고 허리를 숙였다.

정중하게.

“사과드리겠습니다!”

"......뭐?”

왕모력의 눈이 댕그래졌다.

“제가 눈이 있어도 고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굴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이제껏 죽이려고 들던 애송이가 다시 한번 외쳤다.

무릎까지 꿇으며.

“너, 지금 뭐하냐.......”

이글이글.

왕모력의 눈에 살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흥이 깨졌다. 오랜만에 뜨겁게 끊어오르던 피가 확 식었다.

차라리 끝까지 발악할 것이지, 이제 와서?

처음부터라면 몰라도, 한참 쏟아붓고 나서 도망가려고?

“늦었습니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배웠습니다. 이 설휘, 진심으로 어르신께 대한 무례를 사과드리고......”

“늦었다고 생각했을 땐 대부분 늦더군.”

“아, 어르신.......”

“음. 그럼 삼 수 양보한 것으로 하고, 이제 내가 갈게.”

왕모력은 팔을 걷어붙였다.

기왕 흥도 깨지고 옷도 걸레짝이 된 이상, 상대를 자근자근 밟아줄 생각이었다.

설휘는 모골이 송연해 졌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직감했다.

“사, 살고 싶습니다! 이제 제 목숨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죽으면 저는 끝난다니까요!”

“뭐라는 거냐. 원래 사람 목숨은 하나야.”

스스스스.

그의 장심에 기운이 모여들었다.

녹기가 팽창하여, 선명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설휘로서는 손도 닿지 못할 높은 차원의 마공이었다.

'무격신장.'

설휘는 알아차렸다.

저건 무엇이라도 뚫을 수 있는 권법이다. 맞으면 죽는다. 검으로 막으면 부러질 것이고, 팔로 막으면 터지면서 날아갈 것이다.

'아!'

검강에 버금간다는 권강이었다. 강기를 두른 주먹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었다.

구종명에게서 느꼈던, 초월적인 움직임.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자.”

왕모력의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죽음을 예감한 설휘의 생존 본능이 반사적으로 장도를 휘두르게 했다.

[기공소멸을 발휘합니다.]

퍽! 탱그랑!

신병이기의 권능은 확실했다. 날아드는 권강을 다른 방향으로 비틀어버렸다.

부우웅.

그럼에도 설휘는 뒤로 날아갔다.

권강은 어찌어찌 막았지만, 그 뒤에 따라온 충격파는 막지 못한 것이다.

쾅! 우당탕.

벽에 처박힌 설휘는 고스란히 앞으로 쓰러졌다.

“사, 살려.......”

“자. 이번 건 좀 더 매울 거다.”

설휘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왕모력의 주먹에서 녹빛의 기운 다발이 몰려 들어왔다.

하나하나가 초검기보다 월등히 강한 기운.

닿기만 해도 그대로 잘려나가는 힘의 결정체.

방법은 없었다.

[일원소마공을 사용합니다.]

설휘는 어설픈 건곤대나이.

기류를 끌어모아 반원을 그렸다. 그걸로 강기 다발을 돌려보내려 했지만.

퍼퍼퍽 퍼억! 퍼퍼퍽!

그 순간 눈앞이 번쩍였다.

주먹이 난무했다. 발차기와 내려찍기 같은 기술도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한 건 잠깐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눈앞에 돌아왔을 때.

바닥에 처박힌 자신과.

“끌끌. 안쪽으로 주먹을 더 찔러 넣었어야 아픈 것인데......”

주먹을 흔들며 자신을 조롱하는 왕모력이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맞은 건지, 온몸이 엄청난 격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야이...... 씨발 늙은이 새끼야!"

결국 참다못한 설휘가 욕설을 내뱉었다.

왕모력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연신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만 연신 내뱉던 자가 갑자기 태세를 전환한 것이다.

“이놈 봐라. 노부가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을 고마워할 생각을 하지도 않고...... 뭐라고?”

치잉!

하지만 설휘는 이판사판이었다. 온 얼굴이 퉁퉁 부은 그는 칼을 빼들었다.

“넌 뒈졌어! 대머리 새끼. 내가 널 가만히 안 둘 것이다!”

오른손엔 풍운극마검. 왼손에 흡괴장도.

상황이 이리된다면 자신도 비장의 무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대, 대, 대, 대머리?"

놈의 반응도 좀 이상했다.

갑자기 콧김을 씨익 뿜더니 얼굴도 시뻘겋게 변한 것이다.

'뭔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린 건지도........’

설휘도 꺼림칙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다시 사과하기는 힘들었다.

본인 자존심은 둘째치고, 어차피 상대는 듣지도 않을 것 이었다.

“크으으읍!”

왕모력의 기운에서 녹광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뭔가 다른 기운, 설휘는 저것이 극마에 오른 자만이 쓸 수 있는 초강기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이제는 선택해야 했다.

더는 늦으면 시간이 없기에.

전투방식

엄청난 위험이라 직감했을까.

전투방식이 곧장 반영되었다. 순식간에 나의 몸이 날아가고, AI설휘가 그 자리에서 복귀했으니까.

"음."

AI는 눈앞에 있는 왕모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너라면 가능하겠지.'

속으로 생각하는 나는 그의 움직임을 보았다.

그러던 중 AI가 말을 걸었다.

“너...... 저분께 사과는 드렸냐?"

- ......?

나는 가만히 있었다.

갑자기 사과라고?

“이봐, 지금 이 몸 상태로는 못 이긴다고, 덤볐다가 사정없이 두들겨 맞을 뿐이야.”

- 야 인마! 네가 동수 수준이라며? 저번에는 할 만하다고 말해 놓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이 씨발 병신아. 처음에 저 녀석이 삼수 양보할 때 완전히 반병신으로 만들었어야지.”

-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무극초풍신에도 연속기라는 게 있다고, 3번 연속으로만 때리면 다 끝나는 문제였다고!”

설휘는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상대가 삼 수를 양보해 준다고 했을 때 너무 안이했다.

더욱이 상대가 무조건 막겠다 판단하고 허점을 노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AI는 다시 한번 그를 향해 예를 표했다.

“하하하! 그럼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이전보다 더욱 진심을 담아서 완벽하게 사과를......!”

“이번엔 확실히 죽여주마.”

그오오오-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왕모력.

온몸에 녹광을 두른 그는, 전투의 화신처럼 보였다.

그러자 AI설휘는 급히 화제를 바뀌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발모제조법(發毛劑造法)이거 한번 보시지 않겠습니까?"

- 야...... 저놈. 눈이 이미 뒤집혔는데?

내 말에 AI는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그 역시 또라이 중에서도 상또라이라는 걸.

“시발, 그럼 한번 해보자고, 와라, 머머리 새끼야! 남은 머리털을 죄다 뽑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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