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또 다른 선택 (1)
‘이거, 진짜 위험해.’
왕모력의 무위는 상식을 벗어나고 있었다.
드드드득.
흐르는 기파만 해도 지하가 내려앉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고, 뿜어져 나오는 녹광은 실명할 정도로 밝았다.
극마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경지인가를 다시 한번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설휘에겐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
바로 AI의 눈빛이 변했다는 것.
휘리릭. 철컥.
그는 자신만만하게 풍운극마검은 검집에 넣어놓고, 흡괴장도만 오른손으로 잡고 있었다.
온몸을 녹광으로 두른 왕모력을 상대로 어떤 대처를 할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온다.’
파아아아-앗.
적이 움직였고, 동작은 정말 빨랐다.
거기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방향이……?’
왕모력은 사선 방향으로 이동하며 움직였다. AI가 피하는 반경을 좁히기 위한 전략이다.
쩌정!
거기다 지척까지 접근하지 않고, 기공을 쏘아내기까지 했다.
견제였다. 그럼에도 상대방이 피하기 힘든 간격과 속도, 그리고 정확한 틈을 노린 공격이었다.
[기공소멸이 활성화됩니다.]
하지만 상대는 AI.
신병이기로 권강을 소멸시켰다.
물론 그 여파까지 막지는 못해, 몸이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어 보였다.
그 순간.
추가로 왕모력이 발출한 권강이 연속적으로 쏘아졌고.
[기공소멸이 활성화됩니다.]
한 번은 흘려냈지만.
[기공소멸이 활성화됩니다.]
퍼엉!
추가적인 권강을 연거푸 막아내자마자, AI는 힘에 밀려 벽을 그대로 들이박았다.
그 순간.
“잡았다. 이……!”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힌 왕모력.
하지만 바로 제압하지 않고 한마디 하려 입을 여는 그때, 틈이 생겼다.
퍼억!
AI는 상대에게 흡괴장도를 던져버렸고.
까앙!
왕모력은 단숨에 장도를 부숴버렸지만, 거기서 또 틈이 생겼다.
그리고 그 시간은 AI에게 천금과도 같았다.
[무극초풍신을 사용합니다.]
- 아!
콰르륵!
기막힌 순간에 발동시킨 무극초풍신.
휘릭!
그렇지만 왕모력의 움직임은 상상 이상이었다. 설휘가 손을 내밀자마자 방향 전환에 성공했다.
‘이건?’
그 순간 나는 AI가 펼치는 게 조금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일원소마공을 사용합니다.]
곧 그 이유가 드러났다. 대체 뭘 어찌한 건지, AI는 그 와중에 일원소마공을 같이 섞었다.
구르르릉.
그러다 보니 뇌전과 검은 폭풍이 한 번에 날아가지 않고 그의 손에 머물렀다.
방향 전환을 한 왕모력의 위치를 다시 노렸고, 순간 덤벼들려 자세를 취하는 그를 향해, 아니,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사방 일대를 향해 그 힘을 발출시켰다.
콰와아아앙! 콰지직! 콰쾅! 쿠와아앙!
끔찍한 기파가 천일관 지하를 뒤흔들었다.
책장은 죄다 부서지고, 가벽은 일시에 주저앉고,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단 일격을 주고 받는 것만으로 천일관 자체가 무너질 정도의, 어마어마한 파괴력.
쿵. 쿵. 쿠궁!
‘……계속 싸우는 중인가?’
분진과 모래가 가득한, 시야가 완벽하게 차단된 그곳에서 계속해서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AI는 풍운극마검을 이용해 소신수마공의 해무를 발현시켰고.
솨아아악!
흙먼지가 가득한 시야에서 차디찬 냉기를 주변에 뿌렸다.
흐드득.
그 와중에 해무와 냉기가 한 지점에 엉켜 들었고, AI는 그곳을 향해 재빨리 빙백검기(氷白劍氣)를 쏘아냈다.
쿠와아아앙!
주위의 얼음이 부서지고 충격파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빙백검기를 막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십 개의 빙정이 쏘아지는 가운데서도 또다시 주먹을 뻗었다.
절대적인 기공인 권강이 AI에게 쏘아진 것이다.
그 순간, AI의 기지가 빛났다.
[절세풍검을 사용합니다.]
보이지도 않았던 권강을 피하며 발현된 모래 폭풍.
아무리 넓다 한들 천일관 지하는 한정된 공간이다.
거기서 소용돌이가 나타나 주변을 온통 뒤흔들어 버리니, 이번엔 왕모력도 피하지 못했다.
“크으읍!”
온몸으로 모래폭풍을 견디고 있었지만, 버티기에도 급급해 보였다. 그리고 그 틈에 AI는 왕모력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나는 그가 어떤 걸 쓰려는 지 직감했다.
사방에 뻗어나가 응결된 냉기. 좁은 범위. 이 두 조건이 만족될 때.
‘천어빙화폭!’
그 기술은 최대의 파괴력을 발휘한다. 아니나 다를까, AI는 검을 회전시키며 모든 기운을 뿌렸다.
[천어빙화폭을 사용합니다.]
-----꽈앙!
대폭발이 일어났다.
소신수마공의 극의인 해무. 그걸 기반으로 펼친 천어빙화폭.
폭풍을 일으킨 힘이 왕모력을 향해 산발적으로 날아들었다.
쿠쿠쿠쿠쿵-
지붕 일부가 무너졌고. 자욱한 먼지만 가득했다. 거의 지하를 다 뒤집어놓은 장관에 나는 감탄했다.
- 야, 너 정말 대단한데?
“조용히 해. 놈은 털끝만 한 피해도 입지 않았어.”
- 뭐?
믿어지지 않는 말인데, 그건 곧 사실로 드러났다.
무극초풍신, 절세풍검에다가 천어빙화폭까지 연달아 펼친 연격을 맞고도, 상대는 너무도 멀쩡히 자리에 서 있었다.
“오. 이 녀석, 방금 움직임은 상당한데? 뭐냐. 너도 극마의 벽을 뚫은 거냐?”
그의 예상대로였다.
멀쩡하게 걸어나온 왕모력이 갑자기 칭찬을 해왔다.
아마도 AI의 무공 수준이 높아서, 한참 집중해서 치고받고 하다 보니 분노가 가라앉고 이성을 찾은 모양이었다.
“극마의 벽? 거기까지 안 가도 너 같은 대머리는 상대하기 쉽지.”
“대머리…… 크큭. 아쉽군. 그 발언만 안 했어도 살 수 있었을 텐데…….”
“누가 살 수 있다고? 네가? 아님 내가?”
“허허허.”
왕모력의 눈빛이 서서히 달라졌다.
지이이잉.
진동하는 기운도 더욱 거칠게 요동쳤다.
정말이지 무시무시하다. 지금까지도 강했지만, 앞으로 더 강해질 거라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 너, 저거 감당되겠냐?
“새끼야. 이 형님에겐 불가능이란 없어. 그리고 예전의 나였으면 저런 놈은 상대조차 안 해 줬다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하긴, 애초에 몇 번의 환생을 겪었는지도 모를 놈이다.
당장 나만 해도 열 번도 안 되는 환생으로 이렇게 강해졌는데, 저 녀석이 고작 저 노인에게 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이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스스스스.
갑자기 시야에서 왕모력이 사라졌다. 몇 번을 둘러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빨라서 보이지 않는 게 아닌, 완벽하게 사라진 것이다.
“이젠 쥐새끼처럼 피하거나 벗어나지 못할 거다.”
그런 가운데 목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나는 직감했다.
‘천마잠형술(天魔潛形術)!’
형체과 완전히 사라져, 오로지 기감으로만 느낄 수 있다는 환영신법.
오로지 극마에 올라야만 펼칠 수 있는 절세신법이었다.
‘망할.’
상황이 심각한 걸 인지했는지, AI의 표정 역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왕모력이 움직이자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드문드문 보이긴 했다는 것.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모습이 환영으로 작용하게 되니 더 눈이 어지러웠다.
쩌어엉! 쩌어엉!
그런 가운데서 충돌이 일어났다.
AI는 상대의 공격 몇 번을 빠르게 방어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저항은 고작 서너 번에 그쳤다.
뻐억!
번쩍하며 날아든 주먹 하나에 잠시 흔들렸고. 다시금 날아온 발차기에 몸이 부웅 떴다.
[절세풍검을 사용합니다.]
도저히 방법이 없는지, AI가 나름 회심으로 다시 펼친 절대무공.
하지만 한 번 당했던 만큼, 왕모력은 몸을 웅크리며 기류를 버텨냈다.
그리고 AI가 설휘가 다시금 움직일 때, 기다렸다는 듯 손바닥을 펼치며 장공을 격발시켰다.
AI 역시 그런 상황에도 기어이 특수 기술을 발현시켰다.
[무극초풍신을 사용합니다.]
두 기운이 대치되는 그때.
훗!
왕모력이 사라졌다.
또다시 천마잠형술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그 움직임엔 AI도 반응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퍼억!
옆으로 다가온 왕모력이 발차기를 시작으로.
퍼퍽! 퍼퍼퍽! 퍼퍼퍽!
주먹으로 엄청난 유효타를 끼얹었고.
퍼퍼퍽! 바박! 퍼퍼퍼퍼퍽!
그때부터 셀 수도 없는, 수많은 공격이 펼쳐졌다.
투웅!
AI의 몸이 부웅 떠서 날아가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퍽. 우당탕!
창졸간에 피떡이 된 그는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더니 이내 대 자로 뻗어버렸다.
왕모력은 실실 웃었다.
“새끼. 좀 치는 줄 알았더만, 별거 아니네.”
비아냥이 담긴 웃음과 조소.
그 모습에 나는 걱정을 담아 AI에게 물었다.
- 너, 살아 있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 얻어맞았어. 저놈에게.
“내가? 천하의 이 몸이?”
- 진짜다. 너, 엄청나게 셀 수도 없이 두들겨 맞았어. 지금 거의 피떡이 돼서 바닥에 누워 있는 거야.
“…….”
AI는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뭐라 중얼거리더니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 모습을 보던 왕모력은 재밌다는 듯 지켜봤다.
“실성한 건가? 뭐, 어쨌든 상관없지. 일어서거라. 무력감이 뭔지 확실히 느끼게 해 줄 테니.”
상대의 계속된 비아냥에 나는 재차 AI를 향해 물었다.
- 너 괜찮아?
그 말에 AI가 웃음을 딱 그치더니.
“정말이지. 너무 오랜만이었어. 누가 상상이냐 했겠냐. 천하의 이 몸이 얻어맞는다는 거 말이야.”
- 우리, 이길 수 있을까?
“크큭. 모자란 놈. 그래, 너에게 선택권을 주마. 셋 중 선택해. 선택에 걸맞게 어울려 줄 테니까.”
- 갑자기 무슨 소리야.
“고르라고.”
그때였다.
활자가 눈앞을 가렸다.
▶ 평소보다 좀 더 진지하게 싸움
▷ 조금 더 집중해서 싸움
▷ 진심으로 싸움
솔직히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어이가 없었지만, 따질 여유는 없었다.
어떻게든 저자만 쓰러트려주길 바라면서.
<‘진심으로 싸움’을 선택했습니다.>
“후훗. 진심으로 싸운다라.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선택하는 건가?”
- 뭐라는 거야? 병신처럼 계속 처맞지 말고 좀 이기라고!
투욱.
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에 왕모력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 일어나면 처바르고, 일어나면 처바르는 이 맛에 내가 싸우지.”
실실 거리며 웃는 왕모력.
하지만 AI의 분위기는 좀 달랐다.
“이봐. 머머리. 아까 내가 머리카락 자라게 하는 발모 제조법이 있다고 했잖아.”
“……?”
“사실 그거 구라였어.”
“뭐?”
왕모력의 이마에서 실금처럼 그어지는 힘줄.
그걸 본 AI가 냅다 소리쳤다
“그런 게 있겠냐, 병신아! 너는 평생 머머리로 살아야 해, 이 새끼야!”
으득.
이빨 가는 소리와 함께 왕모력의 눈빛이 변했다.
잠시나마 웃음을 떠올리던 그의 표정도 점점 표독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 ……놀린 게 좀 과했던 게 아닐까.
“어, 괜찮아. 이 본좌께서 진심으로 싸울 마음이 들었으니까.”
‘그게 뭔데, 이 또라이야.’
나는 속마음을 숨기며 생각했다.
계속 녀석과 쓸데없는 말을 주고 받았다는 사실도 그렇고, 절대고수를 앞에 놓고 저리 태연하게 장난치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저 몸은 사실 마지막 목숨이 남은 내 몸이지 않은가.
그런데.
[사대극마공 지(地)를 익혔습니다.]
‘뭐?!’
나는 눈을 의심했다.
사대극마공? 내가 알던 그 무공, 거기서 궤를 달리한다는 지를 익혔다는 말인가? 어떻게?
[사대극마공 수(水)를 익혔습니다.]
[사대극마공 화(火)를 익혔습니다.]
‘이건 또 뭐야…….’
계속해서 눈앞에 떠오르는 활자들.
사대극마공의 다른 유형의 무공들이었다.
기존의 풍에 더해, 나머지 세 가지의 속성들. 지풍화수 모두가 충족된 순간.
[지풍화수를 모아, 절대극마공을 완성하셨습니다.]
사대극마공이 하나로 합쳐져 전혀 다른 이름이 되었다.
나는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 이것도 쓰일 것 같으니까. 몇 가지 더 추가하는 게 낫겠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서 AI는 더욱 무공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태극혜검을 익혔습니다.]
[무당면장을 익혔습니다.]
무당파의 최상승 무공이 더해지고.
“땡중이도 적절히 섞어 줘야겠지.”
[소림오권을 익혔습니다.]
[달마십팔수를 익혔습니다.]
소림의 최상승 무공도 합쳐지고.
“화산은 이게 좋겠고.”
[독고구검]
[양의추월도법]
화산파의 극의라는 무공까지 추가되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이제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더욱 기함하게 만든 건.
“대비를 하기 위해서는 이놈을 꺼내야 하겠고.”
[무격신장(武擊神掌)을 익혔습니다.]
방금 드잡이질을 한, 왕모력의 무공에다.
[천마잠형술(天魔潛形術)을 익혔습니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를 익혔습니다.]
천마의 무공까지 꺼내 드는 경악할 짓까지 벌였다.
물론.
[현재 경지로 인해 습득한 무공 일부는 제약을 받으며, 그중 몇 개는 구현 자체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
구현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 뒤따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