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또 다른 선택 (3)
건물이 무너진 잔해는 대략 3층 높이로 쌓여 있었다. 처참하게 주저앉은 부스러기 사이로 누군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와, 씨……. 빡빡이 새끼, 그 와중에도 끝까지 저항하네.”
AI였다.
옷은 죄다 뜯기고, 머리는 쥐가 파먹은 듯 곳곳이 그슬리고 산발이 되어 있었다. 흙더미에서 기어 나오는 몰골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인정했다. 녀석은 전투에 관해서 절대자라는 것을.
왕모력의 지척까지 다가갈 때, 녀석은 소림오권과 태극권을 사용했다. 그건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함도 있었지만, 바로 생지멸절공.
그 특수 기술을 펼치기 위해서 초석을 깔아두려던 것이었다.
왕모력은 극마의 고수답게 마지막 순간까지 반격했고, 설휘의 몸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버렸다.
하지만 그것 역시 녀석의 계산에 들어가 있었다.
동귀어진이나 다름없는 반격에 반격을 가하며, 주저 없이 황금 벨트에 있는 영약을 사용했다.
그렇게 과감하게 달려들어 얻어낸 승리였다.
조금이라도 주저했다면, 죽은 것은 왕모력이 아니라 이쪽이었을 터.
- 몸은 좀 괜찮냐.
“괜찮겠냐? 망할 자식. 대체 몸이 왜 이렇게 비실비실하냐고…….”
투덜거리는 걸 보니 AI다웠다. 나는 쓰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 웬일로 시간을 늘리면서까지 나와 대화하려는 거야?
“네 녀석이 워낙 모자라고 미련하니, 이 몸이 친히 중요한 것 몇 개를 알려주려고. 왜, 꼽냐?”
- ……아니. 나야 좋지.
말투는 사납고, 뻑하면 도발을 해오지만.
나는 그가 딱히 나를 낮게 보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제껏 그가 해준 조언들 중에, 도움이 됐으면 됐지 피해를 준 것은 없었으니까.
다만 인지하고 있기로, ‘초’라는 개념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다음에 그를 만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게 우려스러웠다.
“걱정 마라. 지금 상황에 내 얘길 듣는 게, 나중에 날 불러내는 것보다 훨씬 좋을 거다.”
-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우선 하나 물어봐도 될까?
“어, 말해봐.”
- 넌 대체 누구야?
나는 그동안 이것이 제일 궁금했다.
저 녀석의 존재, 그리고 선택 지문. 왜 이런 것들이 내 앞에 떴는지.
“내가 누구냐라……. 이거 꽤 설명하기 복잡하긴 한데. 뭐, 이렇게 말하면 되겠지. 나도 너의 처지와 다르지 않은 적이 있었다.”
- 처지가 다르지 않다면…….
“뭐, 그런 셈이지.”
조금은 예상했던 답이었다.
사실 이제껏 많이 오간 문답에서도 그가 나와 같은 삶, 같은 상황을 겪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 그런데 넌 어쩌다 AI라는 것이 되어있는 거지?
“그만한 위치에 도달했으니까. 네가 지금 겪고 있는 시스템의 끝에 도달하면,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거기서 난 AI가 되는 것을 선택했지.”
- 지금 내 삶의 끝이 AI가 되는 거라고?
“정확히 말하면 AI가 아닌 다른 것도 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거의 모든 이들이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었지.”
- 그게 무슨 말이야?
“너처럼 선택받은 자를 우리는 ‘플레이어’라고 부른다. 이 시스템에 들어온 자들은 대략 5천만 명. 그것도 내가 들어오고 나서 알게 된 숫자야. 그 많은 이들 중 AI까지 도달한 사람은 둘뿐이다. 나와 그를 제외한 다른 녀석들은 그 근처까지도 못 갔어.”
5천만 명.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자들이 그렇게나 많았다고?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끝의 근처조차 도달하지 못했다니.
- 다른 한 명은 누구지?
“미안하지만 그건 얘기해 줄 수 없다. 이건 순전히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 그게 무슨 말이야? 나를 위해서라니.
그 말에 AI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인상만 잔뜩 찌푸리고 있을 뿐.
화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 그 5천만 명 모두가 태황각 수하가 되어 시작하는 거야?
“아니. 플레이어마다 시작점은 조금씩 다르다. 일제자 살마의 휘하에서 시작한 이들도 있고, 이제자의 밑에서 시작한 자들도 있지. 너처럼 사제자 곤마 밑에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고.”
- 그럼 혹시 조금 전 부러진 흡괴장도는…….
“그래. 네 풍운극마검처럼 일제자가 제시하는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얻는 신병이기다.”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다.
그리고 이제야 유패를 만났을 때 보았던 ‘이제자가 제시하는 두 가지의 길’의 의미도 정확히 알 것 같았다.
플레이어들은 제각각 시작하는 위치가 다르며, 자기만의 길을 걷는다는 것을.
- 넌 어디서 시작했는데?
“너와 같은 사제자 곤마. 다만, 난 너처럼 바닥이 아니라 은영단에서 시작했지.”
그제야 내가 가는 길의 미래를 손금 보듯 아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애초에 시작점부터 달랐으니, 내 무능력한 모습을 보고서 그가 욕설을 내뱉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딴에는 제법 열심히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괜한 미련 두지 마. 다시 한번 말하는데, 다음 생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가야 할 테니.”
- 다른 방식?
“지금 이 상황. 너는 처음이겠지만, 나는 무려 열 번을 넘게 겪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때마다 무공 수준은 좀 다르긴 했지만……. 여하튼 지금 실력으론 넌 여기서 죽는다.”
- 왜? 구종명이라도 오냐?
“아니. 그놈은 소란통에 다른 곳으로 빠졌어. 하지만 오각 중 제일 중요한 곳이 태황각이고, 천일관이 무너지는 난리가 났으니, 상당한 놈이 움직인다. 구종명을 태황각으로 오게 만든 녀석이기도 하지.”
- 설마, 일제자의…….
“그래. 일제자의 오른팔이며 공식 서열 10위인 향개(向開)다.”
- ……!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조금 전만 해도 극마고수 왕모력의 절대적인 능력을 보지 않았는가.
그런데 극마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그의 능력은,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번 생은 포기하라는 거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다음 생은 이전처럼 악착같이 살지 말고, 멀리 떨어져서 오랫동안 지켜보라는 거.”
- 멀리서 지켜보라는 게 무슨 뜻이야?
“마교의 영향력이 발휘되지 않는 중원으로 가라고. 다행히 너는 특이 체질이라, 잘만 숨기면 마인이라는 게 발각될 일은 없을 거다.”
- 이봐, 미안한데 내 목숨이 그리 많지는 않아.
“아니, 이제 충분해. 난이도 조정 때문에 네 눈엔 안 보였겠지만, 왕모력은 목숨 여덟 개를 준다. 여덟 개를 얻었으니 두 개 정도는 미래를 알기 위해 투자한다고 생각해.”
목숨 여덟 개?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했다.
애초에 극마의 고수이지 않은가. 초마를 겨우 넘긴 자신은 이기는 게 불가능했을 상대다.
- 헌데, 중원으로 가서 나보고 뭘 하라고?
“지켜봐. 마교 후계자 쟁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싸움이 끝나면 누가 교주의 자리를 쟁취하는지. 그리고 중원으로의 침략은 언제쯤 되는지. 우선 지켜보란 말이다. 미래를 알고 싸우는 것만큼 유리한 게 없지.”
- 아…….
전혀 생각도 못 한 접근법이었다.
그동안 매번 목숨이 간당간당했으니, 그런 생각을 할 여유 따윈 없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래, 맞는 말이다.
자신을 향한 이 저주, 그리고 이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언제 위기가 올지,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든 게 모르는 것투성이다.
이 상황에서 목숨 여덟 개를 얻었다면, 그중 한두 개는 충분히 소비해도 된다.
멀리서 마교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앞으로 사제자의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
‘그래서 AI를 불러낼 수 없는 시간이 늘어나도 상관없다는 거였구나.’
어차피 다른 삶을 살다 보면 AI를 불러낼 일이 거의 없어진다. 다른 생에서 몇 년, 아니 몇십 년이 지나면 AI를 다시금 불러낼 수 있을 터.
“그런 다음 다시 시작하면, 지금 이 길은 선택하지 마라. 지금 상황은 일반적인 길이 아니다. 너무 암울해.”
- 내가 더 강해지면 안 되나?
“자식아. 난 열 번 넘게 향개하고 싸웠고, 이겨도 봤어. 근데 어찌 되는지 아냐? 점점 더 심각하게 틀어져. 구종명이 깽판 치는 게 다가 아냐. 얼마 가지 않아 압도적인 벽에 부딪치게 된다. 네가 백 배로 강해져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일 거다.”
- 설마…… 교주? 천마라도 오는 건가?
“……대답 못 해. 알면 괴롭기만 하고. 여하튼 이 길은 아니라고.”
- 알겠어. 그러면 어떤 길로 가야 하는데?
“그걸 알았다면 내가 AI가 되지는 않았겠지.”
- 대체 무슨…….
반박하려던 나는 곧 입을 닫아버렸다.
그가 무슨 의도로 말했는지 대충 짐작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더라도 죽지만, 지금 내가 택한 길은 그중에서도 최단 거리로 죽는다는 의미일 터.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막막하고 답답했다. AI는 싸움 하나는 믿을 수 있는 녀석이다.
그렇게 믿을 수 있는 녀석이, 암울하고 가망 없으니 이번 생을 버리라고 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불편한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AI가 말을 걸어왔다.
“너, 대충 느끼고 있지?”
- 응. 건물이 무너지고 너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온 것 같다.
긴가민가했는데, 그가 구체적으로 말하니 확신하게 되었다.
향개.
절대적인 고수의 기세가 스멀스멀 느껴졌다.
“내 친절히 도구함에 신발이랑 검, 그리고 황금 벨트를 넣어뒀다. 나중엔 쓸모없지만, 지금은 나름 중요한 것들이지. 그리고 이건 좀 걱정스러워서 하는 말인데…….”
AI는 여기서 잠깐 뜸을 들인 후 말했다.
“그냥 지금 죽는 게 어떠냐?”
- ……어?
“여기서 계속 진행하다 보면 상당한 충격을 받게 될 거다. 아마 여러 번 자살하고 싶어질 거다.”
-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냐면……. 음, 아니다. 어쩌면 이것도 네게 필요한 경험일지도 모르지.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해라.”
뭔가 의미심장한 말투다.
나는 그냥 네가 알려주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욕만 바가지로 먹고 말 터.
AI는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말을 들어 먹지 않는다.
600…… 601……
시간의 흐름이 보이는 사이, 나는 다시금 말을 걸었다.
- 그런데 말이야. 넌 왜 이렇게 내게 자세히 알려주는 건데?
“……뭔 말이야?”
- 이렇게 자세하게, 본인의 존재뿐만 아니라 내가 가야 하는 길까지 미리 언급해 주는 것. 내 생각이 지나친 건가. 넌 플레이어들에게 AI로 계속 적용되는 것 같은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나는 대화를 나누던 중 이 부분이 궁금했다.
이렇게 손수 친절히 가르쳐주는 그의 마음을.
분명 그는 수많은 플레이어의 AI로 반복된, 어찌 보면 지옥 같은 삶을 살았을 게 뻔하지 않는가.
나는 그의 입술을 한참 동안 바라봤고.
“그냥. 너에게 낭만이란 게 있어 보여서.”
- ……낭만?
“그래,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지.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생존을 위해 목숨부터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그런데 넌 수하들을 꽤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
- …….
“특히 목숨에 여유도 없는데 송화를 구한 거. 사실 그간 많은 플레이어를 보면서도 그런 상황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어. 나도 3천 번이 넘는 환생, 같은 상황을 겪는 게 질려서 개판 쳐보자 하고 구한 거였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 ……?
“넌 플레이어들 중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했다. 태황각에 소속도 없는 잡졸. 그런데도 성장 속도는 제일 빨랐어. 특히 마기와 정종무공을 합일시키는 태극으로 가는 건 좀 충격이었다. 난 수천 번의 삶을 겪으면서도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간 적은 없었거든. 거기서 난 네게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 AI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다음에 만날 땐 극마이길 바란다. 그리고 네게 알려줄 건, 아무리 시스템이 개입한다고 해도 우리는 현생을 사는 사람이란 거다. 우리의 삶 전부를 그들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러니 넌 시스템에 사로잡히지 않고, 반드시 시스템을 뛰어넘길 바란다. 그래야…….”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쯤 날 뛰어넘을 수 있을 거다. 그게 왜 중요한지는 다음에 만날 때 또 알려줄게.”
그렇게 미소를 짓던 AI의 모습이 천천히 흔들렸다.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본래의 몸으로 돌아갑니다.>
AI가 떠났음을 알리는 창이 뜬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알림창이 정보를 전해왔다.
[731일. 이 기간 동안은 AI를 부를 수 없습니다.]
AI를 불러낼 수 없는 시간이 2년 하고도 하루라고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