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176화 (177/379)

176화. 주화입마 (1)

본래 몸으로 돌아온 설휘는 몽롱한 기분에 잠깐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긴 꿈을 꾼 느낌이 이러할까.

잔해더미 위에 서 있던 그는 얼마 후 주변 상황을 인지하고서 몸을 움직였다.

“아…….”

휘청.

하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멈췄다.

AI가 지금 상황에 왜 이렇게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는지 알게 되었다.

저 멀리서 이곳으로 다가오는 이들이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령주!”

“여기 있었군요.”

“한참을 찾았습니다!”

용진과 적명, 요림과 소령, 음무기와 송화.

모두 자신의 수하들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그들은 사제자 곤마의 은신처로 되돌아가지 않고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태황각주는 어찌 됐습니까.”

“너희들은 어떻게 이곳으로 왔느냐?”

용진과 요림이 다시금 물어왔지만, 설휘는 전혀 다른 질문을 했다.

“그게…… 태황각 호위무사들을 전부 제거하고 돌아가는데, 천일관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혹여 이런 소란에는 령주께서 계시지 않을까, 도움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고 온 겁니다.”

“하아.”

그 말을 끝으로 설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기야 이 정도 소란이 났는데, 수하들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쪽이 아니라 저기 서쪽이다.

자신을 주시하던 흑발의 남자, 일제자 살마의 오른팔인 향개가 도착했으니까.

‘어?’

다시 시선을 돌렸는데, 그 자리에는 향개가 없었다.

오싹!

설휘는 주변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AI의 말대로라면 이곳에서 살아나가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어차피 죽을 위기에 처할 거라면 자신이 죽는 게 맞다.

최소 수하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선두에 나서야만 했다.

“내가 길을 열 테니 전력으로 달려나가야 한다. 이유는 묻지 마라.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적들의 칼날이 우리 목을 겨눌 테니까.”

“……!”

“……!”

“……!”

수하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당황했을 터다. 하지만, 감정은 둘째치고 현 상황이 어떤지는 인지한 듯 보였다. 그사이 설휘는 곧장 발을 교차하며 두 손과 발에 힘을 주었다.

[기 모으기를 발동합니다.]

츠츠츠츠츠.

한순간 발끝에서 몰아친 기류들이 설휘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몇 번 숨을 들이켰을 때쯤.

[신체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체력이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내공이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몸 상태가 왕모력과 싸우기 이전으로 돌아왔다.

깨달음의 상향으로 인해 빙공극저화와 수라폭열공의 특수기는 사라졌지만, 기 모으기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덕분에 단번에 힘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 방금 뭐하신 겁니까?”

“혈색이 돌아오셨는데요?”

설휘의 얼굴에 변화가 생기자, 음무기와 적송이 물어왔다.

하지만 설휘는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여력이 없었다.

언제 이동했는지, 무너진 잔해더미 위에 흑발의 남자가 서 있었으니까.

“……!”

그리고 이번엔 수하들도 알아챘다.

“참으로 방자한 놈들이로고.”

등에 걸친 피풍의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기운.

바짝 마른 얼굴에 도드라진 광대뼈가 인상적이다. 빼빼 마른 얼굴의 한쪽 눈은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태황각주를 죽인 것도 모자라, 오각의 상징이자 자랑으로 여겨지는 천일관을 부수다니! 이런 대역죄를 저지르고도 살아나갈 성싶으냐!”

분명 체구는 왜소한데도 목소리는 사자가 울부짖는 것처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등장에 수하들은 단숨에 얼어버렸다.

“뭣들 하는 거냐! 따라와라!”

팟.

설휘는 반대편으로 달려 나갔다.

살 수 있을지 없을지는 하늘에 맡기고, 일단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파파파팟.

그러다 설휘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일까. 향개는 여전히 잔해더미 위에 서 있었고, 멀어져가는 자신을 계속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곧 이유가 나타났다.

다다다다닥.

기다렸다는 듯 설휘의 앞을 막는 인물들.

건물 사이를 뛰쳐나온 이들은, 무려 두 겹에 걸쳐 주변을 에워쌌다.

“태황각의 무사들입니다.”

요림이 한마디 알려왔다.

설휘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

흠칫했다. 맨 앞쪽, 낯익은 얼굴을 확인했던 것이다.

“너, 너는…….”

설휘는 눈을 의심했다.

상투를 튼 머리에 각진 턱을 가진 사내.

그는 자신이 너무도 잘 아는 이였다.

주명(州明), 자신을 따르던 태황각 비객조원이 아닌가.

“……분대장님?”

그리고 그도 자신을 알아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옆에 있는 이들도 말했다.

“맙소사. 설휘 분대장님?”

“……맞지요?”

이숙(利肅)과 유암(柳暗).

한 명은 깡마른 체격에 짙은 눈썹을 한 사내로 입교 5년 차, 다른 한 명은 들창코에 둥근 얼굴형을 한 사내로 입교 3년 차.

모두 집역소(集役小)에서 동고동락한, 과거의 비객조 수하들이었다.

아니다. 3년이 지나서 만났으니 연차는 그만큼 더 쌓였을 거다.

“너희들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태황각주가 임무를 주지 않던가?”

“아, 그때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갑자기 임무가 취소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계속 쭉 이곳에 있었지요.”

“……!”

주명의 말에 설휘는 상황이 어찌 된 건지를 이해했다.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 삶.

그걸 받기 전 자신은 태황각주 집무실에 있는 운수산 지도를 얻었다. 그리고 환생하자마자 곧바로 그에게 그것을 가져다주었다.

그걸 태황각주가 미리 파악했다면, 운수산으로 굳이 보내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최근 희망이 생겼습니다. 중원으로…….”

“그런데 분대장님, 이제껏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이숙과 유암이 해맑게 웃으며 묻자 설휘는 머뭇거렸다.

“령주!”

그때 음무기가 빠르게 설휘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다가가지 마십시오.”

“왜?”

“보이지 않습니까? 저자들…… 이성이 마비되어 있습니다. 저기 눈을 보십시오.”

“뭣…….”

설휘가 다시 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이들의 눈 한쪽이 녹색을 띠고 있다는 걸.

“설마 너희들…… 최근에 무슨 무공을 익혔느냐?”

“예, 수라마공(修羅魔功)입니다.”

“그건 내가 익히지 마라 하지 않았느냐! 마성에 인성이 절어버린다고!”

설휘가 반사적으로 버럭했다.

하지만 그들은 뭐 대단한 거냐는 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분대장, 마인이 마공을 익히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이번 임무만 끝나면 중원으로 파견 나가서 편히 살 수 있게 해준다고 약속 받았습니다.”

“중원으로 파견? 그 임무라는 게 설마…….”

설휘는 눈앞이 아찔했다. 이 시국에 중원으로 파견을 내보낸다니. 그게 이들이라니.

일제자와 태황각주가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툭. 투투툭. 투투툭.

하지만 놀랄 틈도 없었다.

때마침 느껴지는 인기척. 흑풍의를 걸치고 나타난 12명의 인물들. 척 봐도 태황각 무사가 아닌, 일제자 살마의 수하로 보였다.

피이이이-

그리고 이어지는 마기.

스스스슥.

마기가 주변을 휘몰아치자 태황각 무사들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음무기가 신음하며 말했다.

“마기로 수하를 부리는 거지?”

“아마도.”

용진이 대답했다. 그리고 태황각 무사들이 물러난 자리에 검은 무복의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척. 척. 척.

일사불란한 움직임. 저들은 아마, 일제자 살마 수하. 향개 직속의 무사들일 터.

좍. 좍. 좍. 좍.

흡사 군대와 같은 일괄적인 움직임이다.

동시에 내려밟히는 발소리에, 저마다 긴장들을 하고 있었다.

***

한편, 이 모든 이들이 한눈에 보이는 건물의 처마 위.

향개가 냉랭한 눈으로 아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여인이 자연스럽게 옆에 섰다.

“저들이 사제자의 수하들이겠죠?”

이전에 나선 적 없는 젊은 여인이었다.

얼핏 보기엔 평범한 차림으로, 가슴에는 흑묘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암기에 매우 능하고 한번 문 상대는 결코 놓지 않는 집요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혈혈단신으로 움직이며 향개를 돕는 여인. 특히 그녀가 품은 흑묘는 거의 영물취급을 받으며, 원하는 대상을 찾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생포하실 생각인가요?”

“상황을 보고…….”

“흐음……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기 저 사내는 쉽지 않을 텐데요. 보아하니 본교의 사람인데도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건 정종무공을 배웠다는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님…….”

여인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극마일지도요.”

“사제자 곤마의 휘하에 극마 고수는 없다!”

“그건 예전 이야기죠. 그 사제자가 근래 들어 이빨을 드러냈잖아요? 어쩌면 극비리에 키우던 패가,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

향개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간 파악된 사제자의 정보는 대략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소홀했다. 이제껏 너무 약해서, 어떤 변수를 만들 역량이 있다고 보지 않았기에.

“수하들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시네요.”

향개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지금 투입된 이들은 무령십이호법. 전부 초마의 극에 오른, 향개 직속의 가장 강력한 부대였기 때문이다.

***

“으음.”

새로 등장한 이들은 하나같이 실력이 범상치 않았다. 특이하게도 이들 모두가 쌍검을 사용하는데, 죄다 몸들이 흐물흐물거렸다.

엄청나게 패도적인 공격에, 설휘를 제외한 수하들은 곧장 수세에 몰렸다.

[무극초풍신을 사용합니다.]

허나, 이것 한 방으로 다시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호법 하나가 부상을 입고 나가떨어지자, 여섯을 제외한 다섯이 설휘에게 붙었다.

“하아. 하아.”

설휘는 자신 주위에 있는 여섯 복면인을 보고 있었다.

그냥저냥 시선을 끌면 상대가 가능하겠다고 했지만, 이들은 연합술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전력을 다했음에도 설휘는 자칫 여러 번 손해를 볼 뻔했다.

‘방법이 없다. 어쨌든, 내가 길을 열어야 해.’

카카카캉!

설휘는 연거푸 검을 막으며 주변을 훑었다.

퇴각해야 하지만, 그냥 도망가다간 무조건 잡힌다.

충분히 적의 예기를 꺾은 다음, 건물의 구조와 비밀통로로 적을 주춤하게 한 다음 빠져나가야 한다.

적지에서의 은밀 행동.

보통은 불가능하지만…… 여긴 태황각이다. 설휘는 무려 십 수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곳에서 살아왔다.

그가 알기로는, 태황각 인근에는 만일을 대비한 비밀통로가 분명 존재했다. 문제는.

‘삼 년 이상 지나서 분간하기가…….’

시일이 너무 오래 되었다는 것.

그가 떠난 삼 년 동안, 태황각도 여러 번 개축을 했던 모양이다. 건물들 곳곳이 달라졌다.

덕분에 원래 있던 비밀통로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먹기가 힘들었다.

“하압!”

카카카캉!

가까이에 있던 복면인이 예리하게 초검기를 쏘아냈다.

피하기를 반복하던 설휘의 눈에 뭐가 하나 보였다.

놀랍게도 서북쪽 떨어진 건물에서 사내들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아! 주명!’

과거의 수하들. 그들이 자신들 쪽을 가리키며 오라고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태황각의 비밀통로,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저들일 터.

[무극초풍신을 사용합니다.]

[무극초풍신을 사용합니다.]

[무극초풍신을 사용합니다.]

펑! 펑! 펑!

일순간에 무려 세 번의 검은 폭풍이 터져 나왔다. 저 멀리서 지켜보던 향개와 여인의 표정이 변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이용해 복면인들을 몰아냈다.

“어서 따라와!”

설휘는 손짓했다.

이에 송화를 비롯한 모든 대원이 일시에 따르기 시작했다.

조금 앞서갔지만, 복면인들은 다시금 정렬하며 뒤쫓았고.

[절세풍검을 사용합니다.]

또 다른 폭풍으로 그들을 모두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그 여파는 떨어져 있던 향개와 이름 모를 여인에게도 쏘아졌다.

팔락.

향개는 한 손을 내밀며 여인을 보호했다. 그리고 거대한 힘으로 바람을 밀어냈다.

그렇게 잠잠해졌을 때, 달려가던 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호오라. 설마 도주에 성공한 건가요?”

여인의 말에 향개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빠르진 않았다. 아마 이 주변에 나있는 비밀통로를 이용해서 몸을 숨긴 모양이다.”

“재미있네요.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니. 대체 뭐하는 자들이죠?”

여인이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야옹.

그리고 이어진 향개의 시선을 느끼며 그녀가 흑묘에게 말했다.

“자. 우리 꼬마야. 저 발칙한 놈들을 찾아주렴?”

그 눈가엔 교태로움과 살기가 함께 어려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