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주화입마 (2)
태황각 내부로 들어가려면, 경계초소를 거쳐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야 한다.
하지만 각 내에서 오랫동안 잡다한 일을 하던 무인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다.
개구멍. 외부에서 내부로 이어지는 통로들이 몇 개나 있다는 것을.
사실 이건 애초에 태황각이 지어질 때부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설계된 것으로 보였다.
다만, 지금 걷고 있는 이 통로. 천일관 주변에 있는 내부 통로는 설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저 안입니다!”
설휘를 건물 안으로 불러들인 주명이 구석진 바닥을 가리켰다. 그곳엔 이숙이 바닥문을 열고서 손짓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이들은 이미 설휘와 그의 수하들을 빠져나가게 하려고 움직인 듯 보였다.
타다닥.
천사령 대원들이 먼저 들어갔고.
설휘, 그리고 주명이 들어간 뒤 이숙이 문을 닫았다.
달칵.
그러자 나무로 된 바닥문이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게 완벽하게 사라졌다.
파파팟. 파팟.
칠 척 정도의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높이. 너비는 사람 서너 명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수하인 유암. 과거 설휘의 분대원이었던 그는, 맨 앞에서 달려나가며 천사령 대원들을 안내했다.
비밀통로라 해도 중간에 갈림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하들 뒤를 쫓아가는 설휘. 그는 이내 다가온 사내의 말에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주명…….”
“다들 많이 보고 싶어 했습니다.”
설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벌써 삼 년이 지났음에도, 이들을 보니 마치 지난 세월이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
주명과 이숙, 유암.
오랫동안 함께 동고동락해온 이들이었다.
언제고 힘을 길러, 본교를 떠나 중원으로 가자고 쑥덕거렸던 적도 있었다.
“……미안하다.”
“예? 아니오, 우린 서운하지 않다니까요?”
“너무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누구라도 기회가 생기면 먼저 나가는 게 맞지요.”
뒤이어 따라오던 이숙이 말했다.
“…….”
좋게 받아들이는 수하들의 말에, 설휘는 오히려 더 자책했다.
자신은 그들을 버렸다. 그대로 두었다간 죽을 줄 알면서도 살기 위해 혼자 길을 찾았다.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상황이 안정되고 난 뒤에 부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들의 처지에서 본다면 배신이라 욕할 수도 있었다.
“주명, 이숙. 난 말이다. 난…….”
“분대장. 늘 말씀하셨지요?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강해져야 한다고.”
“…….”
“저희도 그렇습니다. 누구라도 기회가 생기면 먼저 나갔을 겁니다.”
주명이 말을 이었다.
“분대장이 먼저였고, 저희들도 이제 강해지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냥 그뿐입니다.”
“주명. 그 마공은…….”
“압니다. 하지만 이건 우리 선택입니다. 더욱이, 언제고 상승의 무공을 익혀 마성을 극복한다면 아무 문제 없지 않습니까?”
“마성은…….”
‘그리 쉽게 다뤄지는 게 아니다.’라는 그 말이 설휘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이내 삼켰다.
지금 이들에게 남은 희망, 그것을 굳이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곧이어 주명과 이숙이 다시 말해왔다.
“분대장. 절강(浙江)의 항주 아시지요? 강남원림(江南園林) 중 하나이며, 화려함의 도시라는 그곳 말입니다. 이번에 우리가 그곳으로 발령 났습니다.”
“동파육(東坡肉)이 그리 맛있다면서요? 분대장이 나중에 잘 되신다면, 우리 모두 중원에서 한번 만나는 게 어떻습니까?”
파견. 그리고 발령.
그 말에 설휘는 뭔가가 심장을 강하게 움켜쥐는 것 같았다.
‘이런 개자식들…….’
윗선의 이해관계에 따라, 화산파에 마교인의 목숨을 헌납하는 것.
그것이 태황각주의 업무였다. 지금 이들, 과거 설휘의 수하들이 그곳에 간다면 필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그러자꾸나. 내 일이 잘되면 꼭 한번 들를 것이다.”
하지만 설휘는 속마음을 숨겨야 했다.
적어도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 왔습니다!”
조금 더 앞서 달려가던 이숙이 말했다. 그와 함께 칠흑처럼 어두웠던 시야가 밝아졌다.
펄럭.
흙이 덮인 가죽 천막을 펼치자 바깥이 드러났다. 작은 냇물이 보이는, 약간 언덕이 있는 풀숲이었다.
설휘는 이 둥근 통로가 하수구라는 걸 알아챘다.
“령주님.”
그리고 그곳을 빠져나오니, 천사령 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주명이 하수구 입구에 서서 입을 열었다.
“분대장님, 그럼 어서 이분들과 떠나십시오. 지체하다간 놈들이 또 나타날 겁니다.”
“떠나십시오.”
“어서요.”
차례로 이어진 이숙과 유암의 말에, 설휘는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이리 되자 더 할 말이 없었다.
과거 자신의 행동이 더욱 미안했다.
“형님.”
그렇게 한 발을 떼려던 그때.
다시 그가 불렀다. 둘이 있을 때 건넸던 대화를 언급하면서.
“고맙습니다. 우리 같은 놈들도 강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너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주명아. 난…….”
“이제 그만 빨리 가십쇼. 더 말하면 낯 뜨거워지는…… 컥?!”
실실 웃으며 말하는 주명. 그때였다.
갑자기 그의 가슴팍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몸이 바닥에 엎어졌다.
“주명!”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한 사내의 몸이 바닥에 엎어질 때까지, 세상의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설휘는 급히 그에게로 달려갔다.
언뜻, 시야 저편에서 무언가 번쩍이는 것이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슈슈슈슉!
하수구 안의 어둠 속에서 검기가 또다시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천사령 대원들이 빠르게 반응했다.
“령주님을 보호해!”
“놈들이 못 나오게 막아!”
그간의 훈련 덕인지 모두 기민하게 움직였다. 적송은 재빨리 검기를 쏘았고, 소령은 하수구 내부를 향해 암기를 쏘았다.
그리고 요림은 특수 기술을 발동시켰다.
슈슈슉 사사삭 파앗!
수많은 검기가 요동치듯 하수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서 동물의 울음소리처럼 괴이한 소리와 흘러나왔다.
“주명…… 주명! 눈을 떠라.”
설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제껏 숨죽이며 조절하던 감정이 손끝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컥…… 분대장…… 제가…… 지금 어떻게 된…….”
“괜찮다. 별것 아니다. 걱정 마라.”
설휘는 급히 도구함을 열어 황금 벨트를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익!”
전투 중이라 그런지 도구함이 열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열려도 황금 벨트를 쓸 수 없었다.
그 안에 있는 영약은 이미 다 썼으니까.
“쿨럭. 쿨럭.”
“주명! 정신 차리거라!”
피를 토하며 점점 초점이 흐려지는 주명의 눈.
설휘는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이게 아니었다. 이런 만남을 원한 게 아니었다.
과거의 조원들을 만나면 분명 해주고 싶은 게 있었다. 무공을 가르쳐주고,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외면했던 동료가, 자신을 구해주다 목숨을 잃어가고 있었다.
“대장…… 사십……시오.”
“마, 말하지 마라.”
“이 지옥에서…… 벗어나……십시오.”
“말하지 말래도!”
울컥 울컥 쏟아지는 핏물은 설휘의 머리를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그런데 머리가 돌아가지를 않았다.
“이 지옥…… 우리 같이…… 버려진 사람들…… 반드시…….”
투욱.
주명의 한쪽 손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설휘의 가슴속에서도 뭔가가 툭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
“막아!”
천사령 대원들은 필사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하구수 안으로 계속해서 수많은 기공을 쏟아내고 있었다.
여기서 한 놈이라도 나오면, 바로 수세에 몰린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각! 스스스. 파방!
그렇게 한참 퍼붓던 중이었다. 퇴로를 살피던 음무기에게 송화가 다가와 말했다.
“큰일입니다. 음무기 형님.”
“뭐!”
“저길 보십쇼.”
송화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이제껏 자신들을 안내했던 이들이 온몸을 비틀며 괴로워하고 있는 게 보였다.
“왜 저래?”
“하수구 안에서 갑자기 마기를 흘려보냈습니다. 그 이후부터 이들이 점점 이상해졌습니다.”
“마기? 광마……!”
음무기가 신음했다.
이숙, 유암. 령주의 옛 부하라고 했던 이들. 그들은 태황각 소속이다. 더욱이 얼마 전에 새로운 무공을 배웠다고 했다.
마인에게 마공은 힘인 동시에 족쇄.
아마도 추적자들 중에 태황각 내 조력자가 있는 것을 안 이가 일부러 마기를 흘려내어, 광마로 발동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송화. 저 기운을 차단할 수 있냐?”
“늦었습니다. 이들은 벌써 도화선을 건드린 상태, 마성이 점점 폭주하려 하고 있습니다. 강제로 눌렀다간 숨이 끊어집니다!”
“익…….”
음무기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껏 안면 한 번 없었던 이들이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도와준 이들이기에.
무엇보다 저들은 천사령주의 옛 수하들이다. 그런데.
“크크크크!”
“크아아아!”
그런 그들, 이숙과 유암이 흉성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수구에 공격을 쏟아붓던 다른 이들도 그걸 알아차렸다.
“이것들이 함정을……!”
용진이 그들을 향해 다가섰다. 단번에 목숨을 끊으려고 기를 모으자.
“안 돼! 죽이지 마! 그들은 과거 령주님의 수하들이야.”
“……!”
용진의 몸이 굳었다. 그의 시선이 재빠르게 돌아갔다.
“령주! 령주님!”
설휘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쓰러진 사내를 붙잡고 있었다.
“제길. 충격을 받으셨어.”
“이런!”
상황은 최악. 그런데 거기서 더욱 점입가경이라 할 일이 일어났다.
“키키킥.”
“크큭.”
완전히 마성에 절어버린 두 광마가, 누렇게 된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팟. 파팟.
음무기와 용진 쪽으로 빠르게 달려들었다.
***
- 반갑습니다. 주명이라고 합니다.
그건 낯선 일이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가 생긴다는 게.
- 선택받지 못해도 열심히 하면 희망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주명. 그는 성격이 급하고 매사에 꼼꼼하지 못했다.
하지만 항상 모든 일에 열정적이었고, 늘 희망을 품고 다니던 녀석이었다.
- 드디어 저희에게 기회가 온 것입니까?
우리들 비객조는 사실상 있어도 없어도 되는 조직이었다.
어쩔 때는 몇 달 동안 방치되다시피 해서 오각 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적도 있었다.
그러다 태황각주의 눈에 들어 직접 임무를 받았고, 그 이야기를 들은 주명은 몇 년을 낙방하던 서생이 합격 통보를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기회 따윈 없었다. 마주친 현실은 달랐다.
그리고 설휘는 수하를 버렸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수하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 사실이, 변치 않는 그것이 목에 걸려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주명아. 혼자만 탈출해서 뭐하려고 했는지…… 내가 아직 말을 하지 못했다.”
아직 숨은 붙어 있다.
말을 할 기력은 사라졌음에도,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혼자 탈출해서 나 혼자 잘 먹고 잘살려고 했다고 네게 말하지 못했다. 네놈들을 버리고 철저히 이용해서 내 살길 찾으려고 했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어.”
벌겋게 부어오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용서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아니면, 이런 나를 미워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망설였다.
“……?”
그때였다.
주명은 아직 할 말이 있는지, 미약한 숨이 커졌다. 회광반조. 마지막 한마디를 할 기력을 내는 듯 보였다.
그런데.
<주명이 죽음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에게서 듣고 싶은 말을 선택하세요.>
▶ 즐거웠던 추억들. 안고 갑니다.
▷ 다음 생에는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 당신이 증오스럽습니다.
‘이게 뭐냐.’
설휘의 머리가 싸늘히 식었다.
이제까지와 달리, 그는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았다.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저 눈앞에 있는 글귀를 한참이나 바라볼 뿐.
5…… 4……
시간이 점점 흘렀다. 하지만 설휘는 아무런 선택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시간 종료로 인해 자동으로 선택됩니다. ‘즐거웠던 추억들. 안고 갑니다.’를 말하게 됩니다.>
“즐거웠던 추억들. 안고 갑니다.”
글귀와 똑같은 대답. 주명의 입에서 시스템이 지정한 그 말이 정확히 튀어나왔다,
“…….”
설휘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봤다.
“뭐냐. 이게…….”
크아아아!
광마가 된 두 수하 녀석들이 보인다. 그런데 친밀했던 그들의 모습이, 괴물로 변한 그들의 모습이 매우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람이 죽었다.
아끼던 사람이, 목숨을 바쳐 자신을 도와주다 죽었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시스템이란 게 개입했다.
이건…… 명백한 조롱이었다.
한 사람의 삶을 짓밟는, 절대자가 내린 비아냥 섞인 조롱.
죽음과 삶을 멀리서 바라보는 관음증 변태처럼, 시스템은 주어진 내 삶에 개입하고 있었다.
- 그냥. 너에게 낭만이란 게 있어 보여서.
불현듯 AI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의 감정을 희롱하는 글. 내 진실된 감정을 유도하고 만들어내며, 그것을 즐기는 것.
저들이 만들어낸 판의 놀이처럼, 나는 그들의 놀이에 이용당하고 있었다.
유언.
죽음 직전 내뱉는 주명의 소중한 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천금 같은 말 한마디에도 그 개새끼가 개입한 것이다.
“천하의 찢어 죽일 새끼들…….”
설휘는 그제야 알았다.
자신의 적은, 단순히 눈앞에 있는 적이 아니란 걸.
자신을 비웃었던 적명도, 죽을 위기에 빠트렸던 태황각주도, 자신을 죽였던 구종명도 아니다.
자신의 적은 그들보다 더 깊이, 그리고 가까이에 있었다.
설휘의 시선이 이숙 쪽으로 향했을 때였다.
<이숙이 죽음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에게서 듣고 싶은 말을 선택하세요.>
시스템.
내 삶을, 내 인생을 한낮 ‘놀이’로 망가트린 녀석의 이름이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