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주화입마 (3)
음무기의 손길이 빨라졌다. 단번에 제압하려 했는데, 상대의 광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크아악!”
괴성을 터트리는 이숙. 그의 움직임은 비상식적으로 빨랐다. 분명 일류에 못 미칠 정도였는데, 갑자기 절정 이상으로 빨라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기의 힘.
선천지기는 곧 수명이다. 그 수명을 깎으면서 거대한 힘을 사용하는, 마공 자체의 무서움이었다.
“이거 어찌해야 하나…….”
용진 역시 적당히 제압하려다가, 오히려 쫓기는 상황이 되었다.
신병이기의 능력으로 위협에서는 벗어났지만, 문제는 이 녀석들의 처리였다. 죽일 수도 없고 제압할 수도 없는 상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었던 것이다.
“죽여야 해요! 어서요!”
음무기와 용진이 위험에 빠지자, 송화가 외쳤다.
그리고 펼친 술법 하나.
송화의 읊조림이 끝나자마자, 효과가 대번에 나타났다.
미친 듯 날뛰던 두 광마의 움직임이 멈춘 것이다.
“할 수 없지. 령주께는 죄송하지만…….”
음무기는 곧바로 결단했다.
도 끝에 기를 응축시킨 뒤, 한 사내에게 곧장 쏘아냈다.
패애애액.
검기가 이숙의 가슴팍에 내리꽂혔다.
‘그르륵’대던 그의 몸이 천천히 뒤로 쓰러졌고, 곧 눈에 흰자를 보이며 나직이 읊조렸다.
“분대장…… 고맙……소이다.”
마지막 유언.
하지만 음무기의 굳어진 표정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의 머리를 팔로 받치고 있는 설휘 때문이다.
“미안하구나, 이숙. 편히 쉬거라.”
설휘는 눈을 뒤집고 있는 그의 눈꺼풀을 내려주었다.
무덤덤한 표정을 지어서 그런지, 음무기에겐 령주의 감정이 오히려 더 절절해 보였다.
“크아아악!”
때마침 송화의 결박이 풀린 유암.
그는 주변을 다시 훑었다. 그러다 가까이에 있는 설휘를 발견하고 곧장 달려들었다.
“령주님!”
“피하십시오!”
“령주!”
빠르게 다가서는 광마를 보고 음무기와 용진, 송화가 차례로 소리쳤다.
설휘가 조금 늦게 반응했고, 손을 쓰는 것도 늦었다.
괴이하게 일그러진 유암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고, 상대가 장법으로 마기를 뿌려대는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오히려 반대로 나타났다.
콰직!
장법이 출수되는 지점에서 설휘의 몸은 환영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바로 그의 등 뒤에 나타나, 유암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미안하구나.”
짧은 한마디와 함께 ‘퍽!’하고 피가 튀었다.
상대의 두개골을 박살내자, 설휘의 온몸이 피로 물들었다.
“아…….”
“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음무기와 용진이 신음을 내뱉었다.
령주가 옛 수하를 직접 죽일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해해다오. ‘시스템’이 만든 판에, 더 이상 너희들이 놀아나게 할 수 없었다.”
설휘가 손을 쓴 건, 유언을 선택하라는 시스템 글자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가지는 마지막 의지. 그조차 누군가에게 조종당한다면, 그 사람의 존재 의의는 대체 무엇이 되는가.
그래서 그를 일격에 죽일 수밖에 없었다. 꼭두각시의 마지막이 아니라 유암으로서의 마지막을 위해서.
“윽!”
“모두 물러서!”
때마침 하수구 쪽에 모여 있던 대원들이 소리쳤다.
쉭! 쉬쉬쉬쉭!
광범위하게 쏘아져 나오는 검기 다발.
결국 적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빠르게 몸을 뺐던 것이다. 철벅철벅 물소리와 함께 곧 걸어 나오는 인물들이 보였다.
제일 앞에 나선 검은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향개. 마지막으로 처음 보는 여인과 그녀를 뒤따르는 복면인 12명이었다.
“정말 상당한 실력자들이군요? 태황각주와 그를 따르는 소록비가 왜 죽었는지 알 것 같네요.”
대원들의 시선이 여인에게로 집중되었다.
절세미녀.
하지만 청초한 느낌이 아닌, 관능적이고 뇌쇄적인 미가 강했다. 마교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미녀였다.
그럼에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향개와 같이 다니는 여인이라면…….”
요림의 말에 소령이 곧장 답했다.
“시아영(施我英)이야. 이백여 명의 여인들을 거느리는 옥녀관(玉女館)의 수장. 저기 저 고양이는 적의 냄새를 맡으면 천리 길도 추적한다는 사향흑묘(麝香黑猫)인 것 같군.”
“에헤, 그럼 우린 도망치긴 틀렸다는 거지?”
음무기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네. 그럼 죽자 사자 싸울 수밖에 없군.”
사실, 천사령 대원들은 일제자의 오른팔인 향개를 보고서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걸 짐짓 가볍게 말함으로써 사기가 꺾이는 걸 스스로 막아낸 것이다.
투욱.
무리에서 향개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설휘를 보며 말했다.
“네가 이들의 수장이냐?”
“그렇다.”
“처음엔 생포할 생각이었으나…… 별것도 아닌 것들이 너무 날뛰었다. 모두 죽음의 동행길로 안내해 주마.”
“…….”
그의 겁박에도 설휘는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서는 오직 한 가지만이 남아 있었다.
시스템.
어차피 살아나가기도 힘든 판국에 이 녀석을 어떻게 하면 엿 먹일 수 있을지를.
“요림.”
설휘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실질적인 대원들의 수장을 불렀다.
“예, 령주님.”
“내가 폭주하기 시작하면 너희들은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거라.”
“령주님. 지금 말씀을…….”
“다른 답은 듣지 않겠다. 알겠느냐?”
그 말에 요림은 잠깐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잠깐의 침묵 뒤 고개를 숙였다.
“대원들을 잘 이끌겠습니다.”
***
설휘는 주명의 죽음을 겪고 여기서 결단해야 함을 느꼈다.
지금 이 상황이 시스템이 의도한 판이라면, 과연 녀석에게 어떻게 해야 한 방 먹일 수 있을까?
지금 당장 자신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다. 눈앞의 극마고수 하나를 이길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향개가 이끄는 수하들을 천사령 대원들로 상대하기도 힘들었다.
“왜 말이 없지? 이제 와서 두려운 것이냐?”
설휘가 대답이 없자 향개가 재차 되물었다.
거기에 옆에 있던 시아영이 후훗 웃으며 한마디를 더했다.
“이제 와서 깨달은 모양이군요……. 절대적으로 넘을 수 없는 격차, 그런 것을요.”
“너…….”
그 말에 설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곧장 그녀에게 물었다.
“네년이 마기를 흘려보냈군.”
“……네?”
“이숙, 유암, 주명. 이제껏 이성이 살아있던 이들이야. 그들에게 마기를 뿌려서 광마를 끌어내 버렸지. 아닌가?”
그렇다면 그녀다.
설휘 자신이 아닌, 그녀가 수하들의 죽음의 원인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설휘의 눈이 파랗게 타올랐다.
“그렇다면요?”
시아영이 웃어 보였다. 그 몸으로, 혼자서, 자신들에게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냐는 의미였다.
“어쩌긴. 이렇게 해야지.”
투투툭.
설휘는 자신의 혈도를 짚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짚어가는 모습을 보던 향개의 미간이 좁혀졌다.
“너, 지금 그건…….”
“그래. 마혈(魔血)이다.”
몸에 내재된 마공을 폭주시키는 수법. 어찌 보면 광마와 같다. 기존의 몇 배 힘을 얻을 수 있는 대신, 죽음을 맞는 결말.
설휘는 스스로 폭주하는 것을 선택했다.
지금의 시스템이 잘 짜놓은 이 판을 완전히 깽판으로 만드는 것, 그건 자신이 미치는 것이다.
똑똑한 놈을 머리를 써서 이길 수는 없다.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존재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닌 광기.
그게 자신이 유일하게 시스템에게 할 수 있는 저항이었다.
츠츠측.
바로 효과가 일어났다.
태극으로 잠재워놓았던 마기가 통제를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서 가!”
주화입마 전조현상을 경험한 설휘는 수하들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그 말을 들은 요림이 다른 대원들에게 재차 전달하며 빠르게 도약했다. 그들은 설휘의 말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크아아아악!”
증폭된 마기가 이성을 뒤덮는 건 순식간이었다.
일순 반응이 잠잠해진 그의 눈은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피곤해졌군요. 스스로 주화입마에 빠지다니…….”
“쯧.”
시아영의 말에 향개는 한쪽을 보며 눈짓했다.
그러자 복면인 셋이 설휘의 수하들을 쫓았고, 다섯은 설휘를 향해 날아들었다.
피익.
접근한 복면인들이 곧장 검기를 쏘아냈다.
팔랑.
그 순간 설휘의 몸이 환영으로 변했다.
신법의 극의라는, 이형환위를 펼친 것이다.
“……!”
설휘는 자신의 수하들을 쫓던 세 명의 복면인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설휘를 발견하자마자 반격을 하려 했는데, 이미 늦은 상태였다. 수십 개의 초검기가 그들의 온몸을 덮쳐버린 것이다.
투욱. 툭. 투툭
단번에 고꾸라지며 목숨을 잃은 복면인 셋.
그사이 설휘를 향해 추가로 두 명의 복면인이 달려들며, 이번엔 그들이 초검기를 뿌려댔다. 나름 대비를 한 것이다.
그런데.
“……!”
“……!”
또다시 환영과 함께 두 명 사이에서 설휘가 모습을 드러냈다.
터덕.
동시에 잡혀버린 두 복면인의 머리.
그곳으로 강력한 내기가 뻗어져 나갔고.
퍼퍽!
설휘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복면인 두 명의 두개골이 박살 났다.
“그만! 너희들은 물러서라!”
더는 지켜볼 수 없었는지 향개가 직접 나섰다.
그는 조금 지켜보려고 했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상대가 이미 극마에 다다란 무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실질적인 경공술은 이미 극마라 해도 손색이 없다는 걸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사용하는 무공의 연원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스르릉.
“하압!”
향개는 허리춤에 찬 애병을 꺼내 곧장 기공을 발산했다.
광마로 변한 설휘는 손쉽게 피해냈지만, 상관없었다.
휘익!
두 번째로 다시 검을 휘둘렀을 때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기파가 휩쓸었다.
쩌저저저적!
뇌전격류.
설휘가 펼친 소용돌이의 뇌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류 자체가 뇌전인 공격이었다.
이는 사대극마공의 지(地). 극마에 오르면 사용한다는 뇌전마기였다.
“그그극!”
이번엔 설휘도 피하지 못했다. 뇌전으로 인해 온몸이 감전된 듯 가만히 서 있었고.
“끝이군.”
향개가 검을 찔러 넣자, 뇌전에 실린 검강이 설휘의 몸을 꿰뚫었다.
투욱.
그렇게 반쯤 무릎을 꿇은 설휘.
하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마기가 가득했다.
‘이놈 봐라?’
심장을 꿰뚫었음에도, 여전히 마기가 흩어지지 않는다는 것.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향개가 아예 목을 벨 요량으로 다시금 검에 기운을 주입하던 그때였다.
쉬쉬쉬쉭!
사방에서 몰아치는 창기와 검기, 도기가 있었다. 그가 급히 피풍의로 몸을 감싸며 호신강기를 펼치자.
“대장을 구해!”
“몰아쳐!”
놈의 수하들이 다시금 나타나 소리를 질러냈다.
보아하니, 주화입마에 빠진 대장을 구하러 온 것 같았다.
“이번엔 제가 하죠.”
시아영이 나섰다.
“편한 대로.”
향개가 대답했다.
그녀의 평소 성격을 생각해 보면, 놈들이 이 정도로 활개치도록 놔두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지이잉.
그녀의 손끝에서 자색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본교의 최상승 마공 중 하나인 자전마공이었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죽었다는 표시도 뜨지 않는다.
잠시 이성을 잃었던 설휘가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
참상이었다.
자신의 수하들이 시체처럼 내버려진 게 보였다.
그리고.
“죽기 전에 할 말은 없나.”
자신의 눈앞에서 향개가 검을 내밀고 있었다.
“하…….”
묘한 느낌이었다.
분명 살려서 보내려고 도망치라고 했는데.
왜 자신 앞에서 이렇게 개죽음을 당한 것일까.
구하러 돌아온 건 수하들의 의지일까. 아니면 그것의 의지일까.
시스템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이렇게 희롱하려 하는 걸까.
“죽기 전에 할 말……. 당연히 있다.”
설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향개를 향해 말을 이었다.
“시스템, 약속하지. 모든 게 너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
“이토록 허무하게 당하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내가 너에 대한 모든 걸 낱낱이 파헤쳐 낼 테니까.”
향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서걱.
그의 검에 설휘의 목이 날아갔다.
그리고 곧장 설휘의 눈앞에 이것이 떴다.
[여덟 번의 기회가 남았습니다.]
원래 목숨 하나와 왕모력을 죽인 후 얻은 여덟 개의 목숨.
그중 하나를 제외한, 여덟 번의 삶의 시작을 알리는 글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