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179화 (180/379)

179화. 항주 (1)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8년, 7월 마지막 날.

□ 천력 98년, 본 스토리_운명의 날.

세 개의 선택지를 앞에 두고 설휘는 오랜만에 고민을 거듭했다.

멀리서 지켜보라는 AI의 말.

그 말에 따르려면 과연 어떤 시간의 기록을 불러오는 게 좋을까?

‘첫째는 아니다.’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이걸 선택하면 강호로 나가기가 어려워진다.

‘호위무사’나 ‘비밀무사’의 삶이 어떤 식으로 흐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셋째도 아니었다.

본 스토리의 운명의 날.

이때는 송화를 기기아대에 넘기지 않고, 본교로 데리고 와서 곤마 앞에 섰을 때의 기록이었다.

AI의 말에 따르면, 이 진행은 이미 구종명이 등장하게 되어 있다는 것.

‘결국 두 번째가 적당하겠구나.’

천력 98년, 7월 마지막 날.

월별 일정을 한 달 남기고 마무리되던 때다.

마태룡이 연락 두절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곤마가, 설휘에게 그를 찾으라는 임무를 내린다.

상황상 중원으로 이탈하는 데는 이 시기가 가장 적절했다.

‘기록하지 않았으면 거의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겠구나.’

설휘는 새삼 시간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치게 되었다.

만약 이때 저장을 하지 않았거나 이 기록을 덮어쓰기 했다면, 다시 첫 번째로 돌아가 3년 동안 생고생을 해야 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천력 98년, 7월 마지막 날.’의 기록을 불러드립니까?>

두 번째를 선택하자 뜨는 문구에, 설휘는 나름의 준비를 마쳤다.

곧이어 눈앞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과거로의 시간 이동이었다.

***

“음…….”

오랜만에 옛 처소로 돌아온 설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좁은 방. 남루한 방 안.

딱히 사치를 부리는 성미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사령대장의 방은 천사령주의 방과 비교하면 많이 모자랐다.

그리고 모자란 것은 방만이 아니었다.

몸속을 관조해본 결과, 체력과 내공이 예전보다 많이 떨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다만, 익혔던 무공의 기억은 여전히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태극심공을 익혔습니다.]

‘역시.’

곤마에게 받은 태극심공을 떠올리자, 곧장 눈앞에 활자가 나타났다.

거기다 만답서생이 건넨 인명록에 쓰여 있던 여러 인물도 떠올랐고, 그간 수련했던 것들도 속속 떠오르고 있었다.

한번 머리에 담은 것은 잃지 않고 가져온 상황.

다만, 조금 아쉬운 건 있었다.

과거 AI가 왕모력과 싸울 때 떠올렸던 무공들. 화산, 무당, 소림. 거기다 본교의 절세무공들은 기억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본인 스스로가 배우지 않아서인 듯했다.

“하나하나 얻으면 될 테지. 죽는다 해도 배운 건 머릿속에 남으니까. 다만 그전에…….”

드르륵.

설휘는 급히 거처의 문을 열고 달려나갔다.

아차 싶었다. 죽기 직전에 떨어트린 수하들의 신병이기. 그게 떠오른 것이다.

파파팟.

설휘는 은영단 구역을 넘어 전력으로 이동했다.

목적지는 태황각 외부에 있는 하수구.

거기에는 수하들의 무기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기까지 있을 터였다. 혹여 누가 주워가지 않았길 바라면서 내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나간 끝에 하수구에 도달했다.

다행히 인기척은 없었다. 완전히 외벽으로 쳐진, 경계지역도 아니라서일까.

‘있다!’

이번 생의 시작에 있어서 좋은 징조인가?

수하들의 신병이기들이 놓여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이 당연했다.

수하들이 죽고 물건을 떨어트린 그 시점에, 자신도 곧장 목숨을 잃었으니까.

‘일단 도구함에 모두 집어넣고.’

수하들의 신병이기와 자신의 풍운극마검을 챙기고, 곧장 거처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서탁에 앉아 양피지에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이번 생에 필요한, 대비를 위한 준비물.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

[금만중]

“안녕하십니까! 마침 저희 상단에 좋은 상품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어느 물건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아침이 되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나열된 상품들.

[영약]

○ 자천감로수(紫天甘露水) 500G

○ 천지설엽초(天地雪葉草 1000G

○ 태현화정(太玄火精) 1500G

○ 만년순천단(萬年順天丹) 2000G

‘오!’

설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이전에 샀던 물품들을 다시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이 보유한 자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도구함] 총 6,400G

과거 마태룡을 구하러 갔을 때, 화산파 비밀분타에서 챙겼던 금품들이 빛을 발했다.

그것을 사용해 설휘는 물품들을 구입했다.

[금만중]

“잘 선택하셨습니다. 실로 구하기 힘든 영약이지요. 그럼.”

금만중이 떠나자마자, 설휘는 도구함에 있던 황금 벨트를 열어 영약들을 집어넣었다.

[감로수] [설엽초] [화정] [순천단]

“이거지. 이거지.”

황금 벨트에 잔뜩 채워진 물건들을 보고서 설휘는 쾌재를 불렀다.

저 영약들은 체력과 내공을 회복하는 효과도 있지만, 그보다 더욱 귀한 신비의 능력, 목숨을 잃지 않게 해 주는 효과가 있다.

가슴이 관통되는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사용하기만 하면 즉각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준비는 모두 끝났다.

설휘는 이내 문 앞에 섰고.

<천력 98년 8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36/36)>

▷ 조장들과 임무수행[곤마의 임무 받기]

▷ 수하들의 일정 정하기

▶ 임무 받기

▷ 무사 수행

이전의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선택했다.

<‘임무 받기’를 선택하셨습니다.>

▶ 흑구(은영단주)

“송화를 보러 갈 시간인가?”

설휘는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흑구를 선택했고.

<수하들과 함께 움직이실 건가요?>

‘함께한다.’를 선택하자마자 시야가 새하얀 빛으로 뒤덮였다.

***

두 번째로 겪어 보는 삶은 설휘에겐 익숙했다.

기려사대를 구하기 위해 수하들과 움직였고, 거기서 임무 받기 <턴제 Lv2>에 이르기까지 모두 똑같았기 때문이다.

한 번 상대해 본 경험 때문일까.

과거처럼 강시와 실혼인들을 상대했지만, 이번엔 상당히 손쉬웠다. 특별한 위기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이전의 삶처럼 유패가 등장했고, 그와의 대화 도중에 뜬 이것.

<혈우검신 유패가 영입 제안을 해옵니다. 천마의 이제자 마후의 수하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승낙/거부>

여기서 잠깐 흔들리기도 했다.

저 삶은 과연 어떤 식으로 달라질까, 하면서.

물론 설휘의 선택은 거절이었고, 송화와 함께 은영단 거처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본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사건들이 하나둘씩 빠르게 지나갔다.

마태룡을 구해와야 한다는 곤마의 얘기. 그리고 철군성을 자신 쪽으로 붙이겠다는 녹 장로의 말까지.

그 이후 그와 만나 본교의 경계초소를 넘었을 때 철군성이 사라졌고, 이동 중 밤이 되었다.

“긴히 너희들에게 전달할 얘기가 있다.”

한 시진 정도 주변을 돌아보고 온 설휘는 수하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야영 준비를 끝마친 수하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설휘 주변에 빙 둘러앉았다. 다들 집중하는 분위기에서 설휘가 다시금 말을 꺼냈다.

“지금 이 시간부로 난 중원으로 갈 예정이다.”

“……!”

“……!”

“……!”

순간, 저마다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얘기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시선도 있었다.

“사제자께서 내린 임무는 완수할 예정이다. 마태룡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이미 지도에 표시해 두었다.”

설휘가 준비해두었던 양피지를 펼쳐 보였다. 그걸 본 수하들은 다들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이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잠깐만. 칠사자의 하나인 마태룡이 이곳에 사로잡혀 있다고요?”

지도를 차례로 확인한 요림과 적송의 물음에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두 번이나 갔던 곳이라, 지도는 꽤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그렇다. 내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은 몇 가지 재주가 있다. 그걸로 확인한 거니 믿거라.”

“……왜 중원으로 가시려고 합니까?”

이번엔 송화가 나서 물었다.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너희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설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여하튼 나는 중원으로 갈 것이다. 혹여 나를 따라나서고 싶은 자는 말해라. 참고로 전부는 안 된다. 나와 나를 따라나설 이들을 곤마께 죽었다고 보고해야 할 사람이 필요하거든.”

“…….”

“…….”

침묵이 흘렀다.

마태룡의 위치를 찾았다는 것도 그렇지만, 갑작스러운 중원행이 여전히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사제자님께서 믿을까요?”

그러다 용진이 묻자, 설휘가 말했다.

“내가 건네준 지도의 ‘乂’라고 표시된 곳에 마태룡이 있다. 주변엔 진법이 둘러쳐져 있지. 또한 지금으로부터 사흘 뒤에 일어날 일들까지 보고하면,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단언하는 설휘의 말에 수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휘는 이제껏 그들에게 믿음직스럽고 놀라운 능력과 기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다름없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저는 본대로 복귀하겠습니다.”

“저도요.”

고민하는 분위기 속에서 요림이 먼저 말했고, 용진도 본인의 의사를 전달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적송도 뒤따라 대답했다.

이윽고 설휘의 시선이 소령에게로 옮겨지자.

“단순히 저희들을 안으로 보내려는 게 아니죠? 뭔가 알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그녀가 물었다.

“그렇다.”

설휘는 순순히 인정했다.

“교내의 후계자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본교의 내부 사정이 어떤지를 분기마다 알려다오. 항주 성문에 있는 제일 큰 역참(驛站-말을 빌려주는 곳)을 통해 알려주면 될 것이다.”

“통상의 언어로는 걸릴 위험이 있을 텐데요. 그리고 전서구를 이용한다고 해도 장기간 사용하기에는 위험부담이 있고요.”

그 말에 설휘는 송화를 바라보았다.

“그건 제 전문입니다. 잘 교육된 매를 통해서 소식을 전하면 돼요. 매달 말일 은영단 사령대 건물로 붉은색으로 칠한 매를 보낼 테니, 소식을 적어 다리에다 묶어주세요.”

설휘는 이 부분은 송화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역시나 도력과 술법에 능한 아이답게, 자신의 기대에 보답했다.

“그럼, 너는 가겠구나?”

소령이 송화를 보며 말했다.

“예. 저는 사부와 언제나 한 몸입니다. 가시는 길에 언제든 따라나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말에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네 명은 은영단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것도 유리하고, 사람들 눈을 속이기에도 좋을 테니까요.”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무기가 손을 들었다.

“제 꿈이 중원에서 탱자탱자 노는 거였거든요. 기회가 왔는데 안 갈 이유가 없죠. 거기다 저 역시 사부와 한 몸입니다.”

하긴, 과거의 생에서 이 녀석은 중원에서 조용히 사는 게 꿈이라고 했다.

대충 정리가 되자, 설휘가 모두를 보며 말했다.

이번엔 정말 나직이, 읊조리듯 한 목소리였다.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주변에 호위무사 한 명이 따라붙었다. 초마의 극에 오른 실력자이기에 중원으로 갈 사람은 그의 눈을 속여야 한다.”

“초마급이 붙었다고요?”

“그런 호위무사가 왜…….”

다들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설휘가 송화를 보며 말했다.

“공간이동이 필요할 것 같구나.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인데,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좋다.”

설휘는 생각했다.

다시금 사용하게 된 시뮬레이션의 도움과 송화의 공간이동이라면.

충분히 그의 눈을 속일 수 있으리라고.

그날 밤은 그렇게 약속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

철군성의 눈을 속이기 위한 준비는 철저하게 이뤄졌다.

이틀 후 설휘와 일행들은 비밀지부를 찾았고, 민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지어진 모옥에서 공간이동을 시도했다.

“이동했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자신과 음무기, 송화는 과거 화산파의 퇴각로에 도착했다. 설휘는 재빨리 전투방식을 바꿔, 시뮬레이션을 켰다.

<어떤 시뮬레이션을 돌려드릴까요?>

오랜만에 보는 거라 내심 반가워하며 말했다.

“주변에 철군성이 따라오는지 확인해줘.”

<……반경 100리 안에 설휘 님을 뒤쫓는 자는 없습니다.>

답을 본 설휘는 음무기와 송화를 데리고 재빠르게 이동했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다. 나머지는 수하들의 손에 달린 것이었다.

***

<규정된 지역을 벗어나면 전투방식이 사라집니다.>

나흘이 지나, 사천을 넘었을 때.

갑자기 눈앞에 활자가 나타나며, 전투방식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려왔다.

‘여기가 시스템이 규정했던 곳인가.’

설휘는 직감했다.

전투방식이 사라졌다. 이것은 다른 말로 싸움을 부추기는 장소에서 벗어났다는 신호가 아닌가.

과거 월별 행동 때 나왔던 ‘무사수행’.

거기서 갈 수 있는 곳이 사천이 최대였던 걸 볼 때, 나름의 근거라 할 수 있었다.

‘아쉽지만…… 오히려 다행이다.’

시스템이 규정한 범위를 벗어났다는 건, 그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것을 뜻했다.

물론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혹시나 하여 이동 도중 시냇물에 얼굴을 비춰 보았을 때.

Coin 8 [여덟 번의 목숨]

여전히 머리 위에 이것이 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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