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181화 (182/379)

181화. 항주 (3)

수향(水鄕).

중원에서는 장강(長江) 이남 지역을 강남(江南)이라고 부른다.

강남은 수로망이 조밀하게 구현되어 있고, 수로를 중심으로 교역이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발전된 지역을 수향이라고 한다.

이 주변은 대부분 전가후하(前街後河) 방식으로 건물을 짓는다.

집 앞에는 도로가 있고, 집 뒤에는 하천이 흐르는 주거지의 배치방식이다.

설휘 역시 이런 수향의 민가 하나를 거처로 잡아 기거하고 있었다.

다만 인근에 흔히 보이는 다닥다닥 붙은 건물과는 달랐다. 집 자체가 조금 떨어진 독립적인 공간에 있는 데다가, 전각 높이는 무려 3층이었다.

금화 10냥을 주고, 중개인에게 근방에서 제법 좋은 건물을 구한 탓이다.

“스으으읍.”

설휘는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하의는 이미 여러 갈래로 찢겨 있었고, 웃옷은 타들어 갔다가 재로 변해 사라져버렸다.

바로 오늘, 설휘는 한 차원 높은 깨달음으로 신체에 변화를 일으켰다.

과거, 왕모력과 싸울 때처럼 초마의 극에 오르게 된 것이다.

“며칠이 걸린 거지?”

설휘는 손가락으로 횟수를 가늠해 보았다.

대충 과거보다 일주일 정도를 당긴 듯했다.

일단 한 번 경험해서인지, 다시 한번 그 경지로 오르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에 자신의 경지를 증명해 줄, 확실한 근거가 글귀로 나타나고 있었다.

[천어빙화폭(天圄氷火暴)을 익혔습니다.]

[생지멸절공(生地滅絶功)을 익혔습니다.]

[무극초풍신(無極超風神)을 익혔습니다.]

‘확실히 이전의 힘을 되찾았구나.’

극마를 곤경에 몰아붙일 수 있는 특수 기술들.

이것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전생에 왕모력을 상대로 충분히 증명해냈다.

물론 이런 특수 기술을 막아내는 극마라는 경지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게 되었지만.

“사부님, 계십니까?”

때마침 물어오는 인기척에 설휘가 대답했다.

“송화 왔구나. 들어오너라.”

목이 까끌까끌해서인가. 자기 목소리가 자기 것 같지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 오고서 송화만이 아니라 음무기와도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초마의 극에 오르는 실마리. 그것을 붙잡고 있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내 변화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나이답지 않게 신중하고 현명한 아이, 송화.

그간 통 말을 걸지 않다가 오늘에서야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도 자신에게 변화가 나타났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드르륵.

한 손에 포대자루를 든 송화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셨구나!’

휘르륵.

분명히 창문이고 문이고 다 닫혀 있는데 바람이 일고 있었다. 차가운 기운과 더운 기운이 한데 뒤섞인 채 순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또한 정종무공의 기운이라 하기도 묘한, 기이한 느낌이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느냐?”

밑도 끝도 없는 설휘의 물음에, 송화는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설휘는 송화가 건넨 서신을 받아 천천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음.”

마교로 돌아간 수하들이 보낸 소식이었다.

설휘가 임무 도중 전사했다는 말에, 곤마는 애석한 마음을 표하며 몇 끼나 식사를 걸렀다는 것.

그리고 음무기가 죽었다는 말에, 백혼 장로가 그답지 않게 눈물을 보였다는 것.

남은 수하들은 모두 원래대로 은영단에 돌아갔다고 했다.

추가로.

“요림이 사령대장이 되었구나.”

“그렇다고 합니다.”

“녀석이라면 잘 해낼 거다.”

내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별다른 언급이 없는 걸 보니, 계획대로 자신들의 죽음은 기정사실이 된 듯 보였다. 워낙 임무의 난이도가 난이도여서인지, 그럴 법하다고 납득한 모양이다.

화르륵!

설휘는 화공으로 양피지를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증거 인멸은 확실한 게 좋은 법.

노릿한 연기와 함께 양피지가 사라지고 난 뒤, 설휘의 시선이 송화가 들고 온 포대자루로 향했다.

“그건 뭐냐?”

“아, 예. 사부님.”

그는 급히 포대자루를 풀었다.

그 안에는 금원보 5개와 이름 모를 서책, 그리고 약재 몇 개가 들어있었다.

그걸 본 설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벌써 이만큼이나 모았느냐?”

“예. 장사가 제법 잘됐습니다.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애써주신 음무기 형님의 도움도 컸고요.”

“허. 정말 대단하구나.”

“그리고 이것 보십시오.”

송화가 약재 두 개를 내밀었다.

한 개는 환단처럼 생긴 것이었고, 다른 건 칡 모양처럼 굵은 줄기가 엉켜있는 모습이었다.

“영약인가 보구나.”

“그렇다고 합니다. 땅꾼의 고민을 해결해 주니 이걸 주더군요. 하나는 옥황단(玉皇丹)이라 하여 가보로 내려오는 것이라 했고, 또 하나는 기근목조(基根木葉)라고 했습니다.”

“음.”

설휘는 두 약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황금 벨트에 한번 가져다 대어보았다.

[감로수] [설엽초] [화정] [순천단]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물건은 보물급의 영약이 아닙니다!>

“흠. 이건 그냥 음무기를 줘야겠구나. 나름 괜찮은 듯 보이지만, 귀한 건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아…… 사기를 당했군요.”

송화는 실망했는지 입이 삐쭉 튀어나왔다.

설휘가 그 모습을 보고서 조금 웃었다.

송화는 분명 물어보면 모르는 게 없고 사리판단이 뛰어나지만, 영약 보는 것까지 뛰어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의원이나 알 수 있는 분야였으니까.

“사기라니, 당치도 않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좋은 약이야. 그리고 이 짧은 시간에 이런 거금이라니. 송화, 넌 나에게 과분한 제자다.”

“아…… 예. 헤헤.”

칭찬에 곧장 기분이 좋아지는 송화. 그제야 애다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동안 애늙은이처럼 굴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설휘는 송화가 내민 금원보를 집어 들어 도구함에 넣었고.

<500G를 얻었습니다.>

[도구함] 1,890G

금액은 곧장 반영이 되었다.

‘G라는 표시가 금이니, 1백만 금까지는 정말 쉽지 않은 길이 되겠구나…….’

설휘는 중원으로 오면서 몇 가지 목표를 정했다.

첫째는 우선 돈을 최대한 모으는 것.

한 번 도구함에 넣은 돈은 사라지지 않으니, 혹여 나중에 필요한 상황을 대비해 많이 쌓아둘 생각이었다.

전생에 본 신병이기 중에는, 자그마치 1백만 금을 필요로 하는 것도 있었으니까.

이어 둘째는 영약이다.

마교의 본산이 있는 감숙성 일대와 달리, 중원에는 각종 유명한 영약들이 있다.

그중에는 아주 뛰어난, 체력과 내공 증진에 탁월한 영약도 있을 것이다.

그것 역시 최대한 모아 도구함에 넣는다.

이 또한 앞날에 위한 대비인데, 차후 곤마의 세 가지의 삶으로 돌아갔을 경우 이런 영약을 통해 단기간 폭발적인 경지 상승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되면, 웬만한 위기는 탈출하기 어렵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바로 무공이었다.

“사부님. 제자가 이것을 얻어왔는데 어떻습니까?”

송화가 무공서적으로 보이는 서책을 내밀었다.

겉면 표지에는 ‘삼재검법(三才劍法)의 이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이건 어디서 구했느냐?”

“아, 나흘 전에 무당 출신의 속가제자란 녀석의 의뢰를 해결해 주고 받았습니다.”

“무당의 속가제자?”

설휘는 놀란 표정으로 서책을 받았다. 그리고 잠깐 기다렸다가.

[무당의 삼재검법을 얻었습니다.]

‘어?’

떠오르는 메시지에 당황했다.

얻었다는 표시는 뜨고, 익혔다는 표시는 뜨지 않다니. 이건 처음 겪는 증상이었다.

‘무엇 때문인 거지?’

설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무공서를 펼치기 시작했다.

첫 장에는 서른두 가지의 초식과 초식명이 기록되어 있었고. 다음 장에는 가로 베기와 세로 베기, 찌르기 등의 기본 동작이 보였다.

‘이건, 모든 중심을 이루는 검법이구나.’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기와 찌르기는 검술의 기본 중의 기본.

아마 다른 초식들도 매우 간단하고, 익히기 쉬운 동작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그렇구나. 급할수록 돌아가는 것이 무학의 기본이야. 이런 기본 검술을 완벽히 익혔다고 하려면, 극마나 화경에는 올라야 하겠지.’

설휘는 그제야 글귀가 뜨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무도 평범하고 쉬운, 그렇기에 그것을 완벽히 익히기는 정말로 어렵다는 것.

이 현상을 그는 이런 의미로 받아들였다.

“고맙구나. 귀한 무공서를 건네주어서.”

“하하…….”

송화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삼재검법은 저잣거리에 흔히 팔리는 무공서 중 하나였다. 설휘는 그런 상황을 몰랐고, 송화 역시 그게 어떤 건지 몰라 그저 서로 좋아할 뿐이었다.

“아, 그리고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설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꽤 오랫동안 말을 안 나눠서 그런지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그래. 얘기해 보거라.”

“오늘 아침에 받은 의뢰인데, 상당히 재밌어 보여서 말입니다.”

송화는 그날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무남종가에서 온 사내, 그들의 집안일과 처한 상황, 그리고 비무에 올릴 고수를 구하는 것까지.

“송화야.”

설명은 다 들은 설휘의 차분한 어조에 송화가 고개를 숙였다.

“예. 사부.”

“우리가 중원에 와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

“돈, 영약, 무공서입니다.”

“그렇지. 그래서 얼마나 되냐는 말에 답을 했느냐?”

“아닙니다. 곧장 얼마까지 알아봤냐고 물어봤지요.”

“하하하!”

설휘는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나 협상에선 여지없이 애늙은이, 하늘을 보고 점을 치는 술법가다웠다.

“그랬더니?”

“금 오천 냥을 제시했습니다.”

“아…….”

그리고 곧 아쉬움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무남종가가 그리 거부는 아닌 모양이지?”

“그게, 저도 처음 듣는 곳이라…….”

“일단 선금은 제시하던가? 선금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지.”

“물론입니다. 여기 금원보 하나를 받았습니다.”

송화가 품속에서 금원보를 꺼냈다.

설휘는 그걸 받아 도구함에 넣었다.

<100G를 얻었습니다.>

[도구함] 1,990G

“하실 생각이시군요.”

송화가 씨익 웃자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않을 이유가 있느냐? 나도 큰 숙제를 끝냈고, 음무기도 한가하니.”

“어? 음무기 형님을 보내실 생각입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아, 우리 모두 함께 갈 것이다.”

“저희도요?”

송화가 의아한 듯 물었지만, 설휘는 말을 아꼈다.

금 오천 냥. 일개 세가의 명운을 걸기에는 적은 돈이다. 하지만 그건 찾아온 이들이 여유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일단 찾아가 본 다음, 혹 더 손을 댈 여지가 있다면 더 큰 일을 해 주고 더 많은 돈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에 있느냐?”

“밖에 마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음무기를 깨우러 가자꾸나.”

설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송화는 황급히 뒤를 따랐다.

중원여행이라니. 그 역시도 내심 즐거운지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

“이 몸이 누구냐 하면…… 흠냐, 음냐…….”

음무기는 2층 방 한구석에서 퍼질러 자고 있었다.

온종일 태평하게 자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는 매일 밤 홍등가로 나가 사람들을 상대했다.

여인들을 꼬셔 사람을 소개받거나, 손님을 따로 모셔서 송화에게로 데려가는 호객행위 때문이었다.

한때 화화공자로 돌아다녀서 그런지, 음무기는 그런 방면에서는 묘한 친화력이 있었다.

저잣거리에서 송화에게 사람이 몰릴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유들유들함의 영향이 컸다.

“흠냐, 흠냐.”

그런 음무기의 볼을 발가락 두 개가 툭툭하며 건드렸다.

“좀 놔둬라.”

한마디 하고 다시 곯아떨어진 음무기.

툭툭.

하지만 또다시 발가락이 오자.

“아, 씨! 누구야!”

퍼뜩 소리치며 일어섰다.

단숨에 주먹을 날릴 기세로 서 있던 음무기를 향해.

“나다.”

설휘가 대답했다.

“어? 어? 사부, 무슨 일이십니까? 설마, 깨달음을 얻으셨는지요?”

한동안 보이지 않던 설휘의 등장. 음무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운이 좋았다.”

“대성을 축하드립니다! 헌데, 무슨 일로?”

“일을 하나 맡았다. 함께 가자꾸나.”

설휘는 돌아서서 한쪽에 걸린 비단 옷을 보며 말했다.

“이거, 내가 입어도 되겠지?”

“그럼요.”

설휘가 대충 입고 방문을 나서자, 음무기도 빠르게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먹밥 몇 개를 챙겼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집안을 대충 단속한 음무기가 설휘 옆에 있는 송화를 보며 물었다.

“너 오늘 일 안 하냐?”

“아, 장사 며칠간 접기로 했습니다.”

“왜?”

“좋은 물주를 찾았거든요.”

의아해 하는 음무기에게 송화가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휘황찬란한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자. 타자꾸나.”

설휘의 말에 송화와 음무기가 마차 위로 올라섰다.

항주에 오고 난 후 처음 경험하는, 중원 여행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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