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무남종가 (1)
마차를 준비시킨 종리헌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소년 점술사. 우주상제니 뭐니 하는 싸구려 냄새를 풍기는 편액과 달리, 그는 보통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간단히 훑어본 것만으로 추측해 내는 놀라운 관찰력. 어지간한 점술사라면 그걸 신기라고 과대포장했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욱 믿음이 갔다.
-어지간한 무인들로는 감히 범접도 할 수 없는 강자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런 소년이 장담한 무인이다. 말만 들어도 그동안 겪은 설움이 북받쳐 오를 정도였다.
강호에 몸을 숨긴 기인이사, 극강의 고수. 그런 이를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될 거라 생각하니 설렐 수밖에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그랬다.
“아, 아침을 먹지 못해서 말이오. 쩝쩝.”
한 손에 쥔 주먹밥을 먹으면서 실실 웃는 남자.
막 잠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머리는 산발에다 입가에는 침인지 뭔지 모를 허연 자국이 묻어 있었다.
뭐 은거 기인들이야 워낙에 괴팍하고 세상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니 어떻게든 넘어가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칼.
허리나 어깨에 맨 게 아니라, 한 손으로 대충 집고 마차에 올라섰다. 그리고 타자마자 한쪽에 대충 던지다시피 해 두었다.
무사라면 자고로 병기를 목숨 다루듯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에게선 그런 기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라버니…….”
종리미 역시 자신의 생각과 같았는지,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눈빛을 보니 상대에 대한 불신이 한층 더 커진 모양이었다.
‘혹, 저분인 건가?’
그래서 종리헌은 시선을 봉두난발의 사내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겼다.
같이 마차에 올라탄 깡마른 사내.
푸른 비단으로 된 청색 남의를 걸치고 나온 사내가 그나마 진정성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몸이 너무…….’
말랐다.
키는 크지만 얼굴은 피골이 상접해서 마치 몇 달은 굶은 것 같았고, 실수로라도 한 대 툭 치면 그대로 골로 갈 듯한 체격을 보여주고 있었다.
‘끼니는 제때 먹고 있나?’
종리헌의 생각도 나름 맞기는 했다.
설휘는 그간 몸속의 내기를 다스리느라, 보름이 넘게 식사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본인은 흔들리던 내기가 안정을 찾아 매우 평온한 상황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바라봤을 때는 걱정스러울 수밖에.
“저…… 그 무사님이 어느 분이시죠?”
종리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송화를 보며 물었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사람과, 배에 거지가 들었나 싶을 정도로 밥을 계속 처먹는 사람.
아무리 봐도 모르겠으니, 둘 중 누구인지를 확실히 해둬야 얘기가 편할 것 같기에 물어본 것이다.
“이분이십니다.”
송화가 우적우적 주먹밥을 먹고 있던 음무기를 가리키자, 두 남녀의 시선이 괴이하게 변했다. 당황스러움과 쓸쓸함이 섞인 우려의 눈빛.
그러자 분위기를 읽은 음무기가 반발하듯 대꾸했다.
“걱정 마시오. 난 태어나서 전 사부, 현 사부 외에는 져본 적이 없으니까.”
찌릿.
나름 사실에 근거한 발언이었지만, 종리미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그나마 여전히 기대를 품고 있던 종리헌이 조심히 물었다.
“혹, 형장께서는 최근에 비무로 이기신 분이 있으십니까?”
종리헌은 본래 학문을 연구하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가문 내부 분위기가 바뀌고, 무(武)의 중요성을 알게 된 이후부터 그는 중원의 정보는 웬만하면 다 외워두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지금은 웬만한 무인들보다 많은 정보를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사내를 향해 물어본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름이 나 있는 무인이라면, 지금 비친 모습이 진짜가 아님을 알 수 있었으니까.
“컥컥. 물, 물…….”
때마침 사레가 걸린 음무기가 손을 급히 내저었다.
종리미는 인상을 한층 더 찌푸렸지만, 표정과는 달리 한쪽에 비치된 수통을 빠르게 건넸다.
꿀꺽꿀꺽.
“캬…….”
물을 들이켠 뒤 이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짓는 음무기.
그는 자신을 쏘아보다시피하는 두 남녀의 시선을 보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홍등가 7호라는 곳에서 한바탕 싸움이 날 뻔했소. 어깨에 패도를 찬 녀석이 다짜고짜 시비를 걸기에 말이오. 내 그를 향해 누구냐고 물었더니 검성문(劍聖門)이라 하더구려.”
“검성문 말입니까?”
그 말에 종리헌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검성문은 항주에서도 상당히 유명했다. 이대 검문 중 하나라 말할 정도로 이름이 있는 곳이었다.
“……너, 싸웠었냐?”
옆에 있던 설휘가 음무기를 보며 인상을 썼다.
“아닙니다. 그냥 조금 싸우는 척하다가 도망갔습죠. 괜히 분란 일으켜서 좋을 게 없지 않습니까?”
“잘했구나. 앞으로도 그 태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물론입니다.”
음무기가 대답하고 다시금 앞을 바라보았다.
“…….”
“…….”
종리가의 두 남녀는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아마도 ‘도망갔다’는 말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듯 보였다.
분위기가 요상하게 흘러가자 송화가 끼어들었다.
“비무대에 초대할 세 분 중 두 분은 이미 모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말에 종리헌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누구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송화의 말에 종리헌은 잠깐 숨을 골랐다.
자신들에게는 아직 믿을 만한 패 두 개가 남아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한 분은 석정(石靜)이란 분입니다. 혹시 아십니까?”
“모릅니다.”
그 말에 송화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종리헌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는데, 깡마른 사내와 비위 좋은 사내 역시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반응 속에서도 종리헌은 전혀 실망한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심 뿌듯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러실 겁니다. 자신의 이름이 중원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셨으니까요. 사실 석정이란 분은 나서길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제 막 하산하신 소림의 속가제자분이시기도 하고요.”
“오호. 소림이라…….”
음무기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
속가든 어쩌든,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 그곳의 제자라면 보통이 넘는 무공 실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 분명할 터.
종리헌의 깐깐함이 한편으로 이해가 갔다. 그 정도 이상의 무인이 되어야 안심할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한 분은 또 누군가요?”
송화가 다시금 묻자 그는 늘 그렇듯 정중히 답했다.
“추야성(秋夜星)이란 사내입니다.”
“그분은 어떤 분입니까?”
“정사지간에 있는 분으로…… 주로 청부를 받는 분입니다. 정말 어렵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청부……. 혹시 살수인가요?”
“그분은 여러 이름으로 불립니다. 저희 쪽에선 그분을 해결사라 부르고 있습니다.”
“쯧. 청부 받고 사람 죽이는 놈이면 그냥 살수지, 무슨 해결사…….”
뭐라 중얼거리던 음무기가 흠칫했다.
자신에게로 쏘아지는 시선을 느낀 것이다.
“허허. 말이 그렇다는 거요.”
해명 아닌 해명을 했지만, 종리헌과 종리미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해 보였다.
무리도 아니었다. 자신들이 나름 고심해서 초빙해온 인물들을 평가절하하는 모습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말을 할수록 눈앞에 있는 인물의 격이 더 없어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기…….”
그때였다.
한동안 입을 떼지 않던 인물, 깡마른 사내에게로 종리헌과 종리미의 시선이 쏠렸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괜히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시오.”
조심스러운 설휘의 말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번 일의 대가 말이요. 돈도 좋긴 하나, 혹 다른 것으로 대처할 수는 없겠소?”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귀한 영약, 쉽게 구할 수 없는 그런 것, 아니면 유명한 비급도 괜찮소. 이왕이면 무당 쪽 무공이면 좋을 것 같소. 아, 물론 상승무공일수록 더더욱 좋고…….”
설휘의 말에 종리미는 입을 닫아버렸다.
‘우리가 속았어. 속은 거야.’
실망에 실망이 더해졌다. 모름지기 비무를 하는 무인이라면 상대측 인물이 어떤 자인지, 어떤 대비를 해야 하는지, 그런 걸 물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영약, 거기에 무공 비급? 이건 탐욕만 잔뜩 남은 삼류 무인이나 할 소리였다. 처음으로 오라버니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
항주에서 소흥시까지의 거리는 대략 150리 정도.
마차로 이동하는 데는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것도 도중에 다른 마차로, 그리고 무게 때문에 두 대의 마차를 끌고 이동했기에 가능했던 거리였다.
물론 계속 마주 보며 가기 부담스러운 게 이유이기도 했지만.
“우와.”
무남종가에 도착한 후, 마차에서 내린 송화는 눈앞의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야…….”
탄성은 음무기의 입에서도 나왔다.
수백 명은 살고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집채들. 그리고 저편의 집터와 이어져 있는 거대한 수로.
쉽게 볼 수 없는 구조의 집이었다.
“여긴 뭔가 제조실 같은데?”
정문을 통과한 뒤, 마차가 선 곳에 우뚝 서 있는 건물 하나.
그 안에는 물레방아가 움직이고 있었고, 수많은 나무판 안에 뭔가가 천으로 씌어 있었다.
“누룩인 것 같습니다. 소흥에서 나오는 소흥주는 특산주로 꽤 유명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는 것이 많은 송화가 답했다.
“소흥주의 본산이라. 과연, 엄청난 재력이 있는 곳이니 그런 싸움이 벌어지는구만.”
음무기는 주변을 둘러보며 신기해했다.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설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도 도구함에 담을 수 있을까?’
소흥주를 도구함에 넣고 사용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취기가 확 오를 것인지, 아니면 그냥 알딸딸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선에서 그칠 건지 괜히 궁금해진 것이다.
“오라버니…….”
한편, 거의 비슷하게 마차에서 내린 종리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기껏 데려온 저들의 반응을 보고 있자면, 무인들이 가질 절제나 신중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유람을 즐기러 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걱정 마. 듣자 하니 강호의 기인들 중에는 수련에 매진하느라 세속 문물에 어두운 분들도 있다고 했어.”
종리헌이 그녀를 달랬다.
하는 짓을 보고 기대가 많이 꺾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름난 소년무당이 데려온 자들이다.
실력을 보기 전까지 어떻다고 속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어둡다고 하기엔…… 좀 진지한 것 같은데요?”
종리미는 거의 기대를 내려놓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게, 제조장에서 제조된 술을 찾았는지 다들 돌아가며 한 잔씩 하는 모습이 보였다.
“캬…….”
“오! 이거 신기한 맛일세?!”
“송화. 네 나이에도 먹어도 된다던?”
종리헌도 그 모습을 보며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가.
“오셨습니까. 공자님.”
때마침 다가오는 노인을 보고 다시금 밝아졌다.
무남종가의 대소사 일을 담당하는 총관, 종주삼(鍾周杉)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