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무남종가 (2)
“모셨던 분들은, 모두 자리하셨는가?”
종리헌이 앞서 모셨던 분들의 안위를 물었다.
“예. 석정 대사께서는 나흘 전에 도착하셔서 객방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리고 추야성도 어제 도착하여, 제가 부족함이 없는지 잘 살피고 있습니다.”
“고맙소.”
종리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종리미도 그랬다.
혹여 갑자기 자리를 뜬다거나, 사정이 생겨 오지 않을까를 매우 우려했던 것이다.
무인이라는 이들에게 가졌던 기대가 대폭 깨어져 나간 만큼 더더욱.
“그런데 저분들은…….”
총관의 시선이 떨떠름해졌다.
마치 세상에 처음 나온 것처럼 이것저것 둘러보고 깔깔대는 사내 둘과 어린 소년. 이들을 왜 데리고 온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아, 저분들도 우리가 모실 분들입니다.”
“음. 그렇습니까?”
약간 당황한 듯한 총관.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종리헌은 예를 갖추며 말했다. 그리고 종리미를 향해 말했다.
“너는 좀 쉬거라. 먼 길을 오지 않았느냐.”
“오라버니도 쉬어요.”
“괜찮다. 난 총관과 더 나눌 얘기가 있으니.”
종리헌이 슬쩍 눈치를 주자, 종리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그곳을 벗어났다.
“총관, 장로원분들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
종리미가 사라지자, 종리헌이 목소리를 낮춰 불렀다.
그러자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모두 대전에 모이셨습니다. 가문 회의라면서요.”
“아…….”
종리헌은 탄식했다.
자신이 도착할 시간을 정확히 알고, 보기 좋게 회의를 열었다.
소가주가 직접 참관해달라, 내일 있을 비무에 대해 대략적인 정보를 알려달라는 무언의 요구였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들의 뒤를 밟았다는 얘기도 되었다.
“여독이 풀리지 않으셨는데, 그냥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히 가셨다가 쓸데없이 심기가 상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름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지금 가문 회의를 연 장로들.
대전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종리헌 쪽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괜히 시비를 걸거나 모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종리헌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오. 꾸준히 내 뒤를 밟으신 분들인데, 직접 뵙고 인사를 드려야지요. 그리고 상대측에서 누굴 데려왔는지도 확인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옷을 툭툭 털고 어깨를 폈다.
의지가 확고한 그 모습에, 총관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노부는 저들부터 모시겠습니다.”
“와, 맛난다!”
“이게 명주라는 거구나! 하하하!”
해맑은 웃음소리에, 총관이 고개를 돌렸다.
미간에 주름이 몇 개는 더 늘어난 표정을 지으면서.
***
대전에 다가서자 하인이 예를 표했다. 그리고 안쪽에 기별을 넣었다.
곧 하인이 나오자, 종리헌이 대전 앞에 섰다.
“종리헌입니다.”
“오! 들어오시지요!”
반기는 듯한 노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종리헌이 안으로 들어섰다.
대전 안에는 모두 일곱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다들 가문의 장로들로 벽 쪽에 붙은 넷은 방계 쪽, 자신을 향해 뒤돌아보는 두 명의 장로는 가주 쪽 사람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일정은 잘 보내고 오셨습니까?”
그리고 이들을 관장하며 좌측에 떨어져 있는 노인, 일 장로는…… 방계 쪽이었다.
“그렇습니다.”
종리헌이 답하기가 무섭게 일 장로가 다시 운을 뗐다.
“그런데…… 이곳에서 들리는 소문은 조금 불편했습니다. 소가주께서 무당에게 점을 보러 갔다고 하더군요.”
“…….”
“오해가 있을 거라 판단합니다. 그러니 부디 우려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게 처신을 잘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한낱 점쟁이를 끌어들여 가문의 이름을 더럽힌다면, 어디 얼굴이나 들고 다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허허허허!!!”
일 장로의 말에 다른 장로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훈계와 비웃음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오히려 더 어색함이 들 지경이었다.
웃음이 잦아질 그때.
종리헌이 말을 꺼냈다.
“예. 제 처신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장로분들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는 잠깐 운을 띄우고서 일 장로를 보며 말했다.
“믿었던 사람을 배신하는 것만큼 더러운 짓이 세상에 또 있겠습니까?”
“……허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는 사람은 다 알지요. 적어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노부가 그 문제는 나중에 따로 물어보겠습니다.”
일 장로는 가볍게 말을 넘겼다.
그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종리헌은 자연스럽게 주먹을 말아올렸다.
‘……더러운 새끼.’
일 장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누구보다 옆에서 잘 보좌했던 자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아버지의 측실에게 붙었다.
대체 무얼 약속받고 자신을 쫓아내려는 건지, 그리고 그런 속내를 숨기고 군자연하며 자신에게 훈계까지 하는 것을 보니 살심이 치밀어 올랐다.
“여기 한쪽에 앉으시지요.”
때마침 이 장로가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지 말을 걸었다.
종리헌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상대측 패를 조금 보려고 할 생각이었으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저는 일이 바빠서 이만 가보겠…….”
그렇게 종리헌이 뒤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대부인께서 오십니다!”
하인의 외침 소리에 종리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시국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 마침 들어서게 된 것이다.
“오. 소가주께서도 있으셨군요.”
등 뒤에서 나타난, 화려한 복장에 치장을 한 그녀가 아는 척을 해왔다.
종리헌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고작 측실 주제에 대부인을 자처하는 그녀, 그 옆에는 그녀의 아들 자명(慈明)도 함께 있었다.
“잘 다녀왔어?”
말을 건네는 녀석의 말에 종리헌은 담담히 대답했다.
“보다시피.”
“그래. 드디어 내일 운명이 정해지겠구나.”
“…….”
스륵.
그들은 대꾸하지 않는 종리헌을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자비가 다시 말했다.
“이왕 이렇게 모인 거, 서로 한 패씩 까는 게 어떨까요?”
“무슨 말입니까? 부인.”
종리헌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본래는 아버지의 측실이었으니 어머니라 불러야 할 것이었으나, 대놓고 ‘부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자비는 상대가 어떻게 불러도 상관하지 않는듯했다.
“우리 모두 세 개의 패가 있지 않나요. 그중 하나를 펼치잔 말이지요. 상대의 전력을 알아볼 겸.”
“저는 딱히…….”
“말을 꺼낸 우리부터 하지요.”
종리헌은 거절하려 했다. 그런데 자비의 말이 더 빨랐다.
“강남 일수, 강원태(姜元泰). 우리가 모셔온 분의 존함입니다.”
“……!”
종리헌의 눈이 커졌다.
순간 잘못 들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
강남 삼대검수(三代劍秀) 중 하나로, 무위가 절정을 넘는다고 평가받는 검수였기 때문이다.
***
“강원태라면…….”
“맞아요. 강남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검객.”
“정말 그분이 이곳에 온다는 말입니까?”
대전에 모인 장로들이 찬탄의 기색을 보였다.
강원태는 그만큼 거물이었다. 칠 년 전부터 강남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검수로, 그의 독문 검법은 영환검법(影幻劍法).
일정 경지에 오르면 갑자기 검의 모습이 사라지는 기이한 공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영환검법의 일대 전승자 이건(李乾)은 총 9성으로 이루어진 영환검법을 단 7성만 성취하고도 강남 일대에 내로라하는 검도 무인들을 꺾어 보였다.
그런데 강원태는 영환검법의 9성에 오른 인물이다.
작금에 수련생만 백 명 가까이 되는 영환검파의 수장. 강남에서 검문의 규모로는 다섯 손가락, 검술에 있어서는 세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아…….’
그리고 그걸 듣던 종리헌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하게 변했다.
상대가 걸출한 실력자를 부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그 이름을 접하니 마음이 심란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참고로 제가 모시고 온 세 분 중, 그분이 제일 뛰어나지는 않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대부인, 이런 중요한 시기에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지요?”
그녀의 말에 중립을 지키고 있던 장로들의 반응이 격해졌다.
강원태보다 더 강한 고수가 있었나, 할 정도로 그보다 강한 자를 쉽게 떠올릴 수가 없던 것이다.
“그럼요. 가문의 대소사가 걸린 일인데, 어찌 가벼이 행동하겠습니까?”
여인은 날카로운 손톱을 얼굴 앞에 들어 보이며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그의 아들, 자명의 표정은 더욱 가관이었다.
그 웃음이 종리헌에게는 싸늘하고 시린 비수처럼 다가왔다.
“그러니 소가주께서는 어디의 누굴 모시고 왔는지 한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여인의 말에 장로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비릿하게 웃던 자명의 시선도 함께 몰려들었다.
종리헌은 잠깐 침묵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여러분께 내보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만, 말씀대로 가문의 대소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
“어차피 내일이면 알게 되실 테니, 더는 묻지 않았으면 합니다.”
종리헌은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섰다.
불안해하는 장로 몇몇의 시선을 받았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끼이이익.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대부인이 한마디 했다.
“어머나, 저런. 빈 수레를 끌고 온 모양이군요. 이런 때에 별호도 이름도 밝히지 못한다니…….”
“끌끌. 정말 무당이라도 데려오려고 했는가 봅니다.”
“크하하하!”
“하하하하하!”
종리헌이 들으라고 하는 큰 소리.
대전에서 웃음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는 종리헌의 고막을 아프게 찔렀다.
***
“허어, 이거 참.”
손님방을 배정받은 설휘와 그 일행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호화로운 객실에 있는 의자와 가구들, 그리고 수납장들은 이제껏 써온 것들과 재질도 방식도 완전히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마교의 본산은 서북단에 치우쳐져 인근에 있는 식생은 추위에 잘 견디는 나무들이 대부분이었다.
더욱이 설휘와 음무기처럼 총단에서 생활하지 않는 무인들에게 지급되는 생필품은 더욱 열악했다.
반면 소흥은 중원에서도 특히나 방직과 기계, 야금(治金-금속 제련), 식품과 건재(建材-건축 용재)가 뛰어났다.
일대에서 손에 꼽는 부를 가진 무남종가에서는 손님방에만 해도 견직물과 도자기가 가득해, 어지간한 거부의 주인집 안방처럼 화려했다.
“이건 정말 좋은 물건 같구나.”
설휘는 특히 탁자에 잘 올려진 도기에 눈길이 갔다.
“오. 이건 당삼채(唐三彩)군요.”
음무기가 아는 척을 했다. 반쯤 파락호 짓이긴 했지만, 그나마 강호에서 몇 번 놀아본 자답게 화려한 살림이나 용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좋은 거야?”
“매우 괜찮은 겁니다.”
“가격이 얼마나 할까?”
“글쎄요. 한 금 다섯 냥은 줘야 하지 않을까요?”
“이거 없어지면 눈치채겠지?”
“……당연하지요. 이 비싼 걸 모르겠습니까?”
“의자는?”
갑자기 눈빛이 결연해진 설휘에게, 음무기가 더듬거렸다.
“의자야…… 알아도 굳이 묻지 않을 것 같긴 합니다.”
“침상은?”
“침상도…….”
옆에 있던 송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원에 온 뒤로, 설휘는 갑자기 엄청나게 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건에 대한 허영심이 없는 사람이 말이다.
처음엔 왜 저러나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지친 심력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항주에 오고 며칠간 심신수련을 하던 중이었다.
그날따라 온몸이 지쳐 기운이 없을 때 사부가 다가왔다. 그가 어떤 조화를 부렸는지, 갑자기 몸에서 심력이 샘솟기 시작했다.
- 내게 몇 가지 재주가 있다. 좋은 영약일수록 효과를 즉시 보게 하는 능력이지. 그러니 이런 도움을 주기 위해선 돈을 모으는 게 필수적이다.
그 이후로 송화는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사부가 하는 일에는 다 뜻이 있다고 여기며.
“식사 왔습니다.”
곧 손님을 위한 음식이 나왔고,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오리탕이었다. 오랜 여독을 풀기에 안성맞춤인 부드러운 음식이었다.
“고소하군요.”
“부드러운데.”
우물우물, 부잣집의 대접 음식을 먹던 와중에 음무기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기 사부. 아무래도 직접 와 보니, 여기는 엄청난 부잣집인 것 같습니다.”
“그렇더군.”
“그래서 말입니다.”
음무기가 입으로 가져가던 오리고기 한 점을 살며시 놓았다. 그리고 어느새 진지해진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들을 더 확실하게 도울 방법이 무얼까하고요.”
“그런데?”
설휘도 순간 동작을 멈췄다.
잡다한 머리 쓰는 데는 능한 음무기. 그가 뭔가 대단한 걸 알아냈을 때 보이던 그 눈빛을 보였기 때문이다.
송화도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 집중했다.
“우릴 데려온 소가주. 그를 돕는 무인이 두 명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지.”
“그놈들을 조용히 처리해 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