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186화 (187/379)

186화. 비무 (2)

“벌써 이렇게나…….”

중정에 나온 종리미는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설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웅성웅성.

중정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본인의 사정만을 강조하다간 오히려 최악의 오해를 받을 수 있었다.

“우선 가자꾸나.”

굳어 있는 종리미를 향해 종리헌이 말을 건넸다.

판은 이미 벌어진 상황이다. 비무대를 앞에 두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여기에 앉으시면 됩니다.”

하인의 안내로 종리헌과 종리미는 북쪽에 배정된 자리에 앉았다.

주변에는 손발처럼 가주를 따르던 홍 노대가 있었고, 삼 장로와 오 장로도 앉아 있었다.

장로 중 몇 안 되는, 자신들 편에 섰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뒷좌석에는 숙부와 백부,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직계 쪽의 사람들이다.

“그럼, 양측의 비무에 참가하는 무인들은 입장해 주시길 바랍니다.”

일 장로의 안내와 함께 무인들이 걸어 나왔다.

먼저 방계 쪽에서 모은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종리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행색과 걸음걸이, 그리고 두 눈에 비친 자신감은 얼핏 보기에도 걸출한 고수의 면모가 풍기는 자들이었다.

“미리 주눅 들 필요 없다. 무슨 말인지 알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조금 떨었던 것일까.

종리헌이 그녀의 손을 잡고 한마디 했다.

“네. 오라버니.”

평소에는 별로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평정을 잃지 않은 종리헌. 그의 모습에 왠지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방계 쪽 무사들이 동쪽 대기실로 들어간 직후, 곧 자신들이 초빙한 무인들이 걸어 나왔다.

독특한 복장을 한 소년, 반반하게 생긴 기생오라비, 그리고 깡마른 체격의 사내.

“하아…….”

누가 보더라도 상대 쪽과 비교해 위엄이나 품위가 떨어져 보였다.

어쨌든 그들은 배정된 비무대 서쪽 대기실로 들어갔고.

“여기서 또 특별한 분들을 모셨습니다.”

일 장로의 소개가 이어졌다.

“남궁세가에서 오신 영웅들입니다.”

그 말을 들은 중요 인사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직계와 방계 가릴 것 없이, 구경 온 종리가 사람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다.

짝짝짝!

박수 소리와 함께 등장한 남궁세가의 사람들.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인, 그리고 뒤를 따르는 호위무사가 다섯이었다.

“진짜 중원제일가!”

“남궁세가가 왔다!”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박수소리에 그들은 한 손을 내밀어 화답해 보였다.

그들은 남쪽에 비치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중 매우 준수한 얼굴의 사내가 연무장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중심에 서자, 일 장로가 말했다.

“남궁세가 소가주 남궁훈 소협입니다. 이번 일로 우리 종리가의 번영을 축하해 주고자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남궁소협은 이제부터 펼칠 비무의 공정성을 위해 심판으로 모셨습니다.”

“제일가 남궁세가의 소가주!”

“무림칠용(武林七龍)!”

주변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하늘 위의 하늘. 세상을 호령하는 제일세가의 남궁훈이 온 것이다.

중정에서 모두의 시선을 받던 남궁훈은 처억, 능숙한 동작으로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누굴 평가하기 부끄러운 실력이나, 오랜 정리가 있었던 종리가의 요청으로 발걸음을 했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많은 배려와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최고다!”

“종리가를 잘 부탁합니다!”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사람들의 반응이 커지면 커질수록 종리미와 종리헌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듯했다.

한편, 설휘는 대기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남궁세가란 얘기를 듣고서 음무기에게 물었다.

“남궁가라면…… 혹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을 쓰는 그곳을 말하는 거냐?”

“그렇습니다.”

“그래? 집체교육을 받을 때, 남궁가가 어떤 곳인지 궁금했는데…… 뜻밖의 기회가 생겼구나.”

“심판만 본다고 하니 실력을 볼 기회가 있을까 싶습니다. 아, 그리고 들은 얘긴데 남궁가주는 화경에 오른 고수라더군요.”

“화경…….”

설휘는 읊조리듯 말끝을 흘렸다.

중원에도 화경에 오른 고수가 제법 있는 듯 보였다.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가에도 화경의 고수가 있는 걸 보면.

두웅-!

그러던 사이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렸고.

“자, 그럼 종리가가 모시고 온 강호의 고수분들은 이곳으로 나와 주십시오.”

일 장로의 말에, 좌측에 있던 사내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 걸어왔다.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

허리춤에 찬 칼이 무려 세 자루였다.

그중 제일 큰 장도가 눈에 띄었다.

“그럼, 다녀오겠…….”

“송화야.”

“예. 형님.”

몸을 풀던 송화가 올라가려는데, 음무기가 그를 붙잡았다.

“아무래도 너는 기권하는 게 좋겠다.”

“예?”

음무기의 말에 송화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살짝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저 녀석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니. 싸워서 진다는 말이 아니라…… 나서지 않는 게 좋겠다는 거야.”

“형님, 그게 무슨…….”

“음무기의 말이 맞다.”

그때였다. 둘의 대화에 설휘가 끼어들었다.

“……사부님?”

“자세히 봐라. 신발와 어깨, 그리고 발목에 있는 거.”

뒤늦게 송화의 시선이 비무대에 오른 사내에게 꽂혔다.

그의 어깨에는 철갑띠가 매여 있었는데 거기엔 뾰족 튀어나온 날이 있었고, 발목에는 두꺼운 철대가 보였다.

그리고 신발 끝에는 날카로운 날이 슬쩍 보이는 듯했다.

“저 정도 변칙에 제가 당할 것 같습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설휘는 좌측으로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너는 무인이 아니라 술법가다. 상대가 물리적인 힘을 쓸 때 너는 술법을 써서 제압하려 할 텐데…… 남궁가 정도라면 네 술법을 눈치챌 수 있을 거다.”

“아.”

송화는 그제야 설휘의 말을 알아들었다.

상대 무인이 문제가 아니라, 심판인 남궁세가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기실 작금에는 창궁무애검법으로 검가 명문의 길을 걷고 있지만, 과거의 남궁세가는 한때 기문진식에도 상당한 조예를 쌓았다고 했다.

“기문둔갑은 주술과 거리가 멀다고 하기 어렵지? 저들이 얼마나 정통했을지는 모르지만, 자칫 우리 출신이 어디인지 알아차릴 수도 있으니 위험하다.”

“예…… 경솔했습니다. 사부.”

“아니, 괜찮다. 남궁가가 오는 건 우리도 몰랐으니.”

설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음무기. 가볍게 밟아주고 와라.”

“예. 알겠습니다.”

음무기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들 쪽으로 쏟아지던 가운데, 그가 대기실에서 걸어 나왔다.

***

두 사내가 비무대에 서자, 장내가 매우 뜨거워졌다.

고수들의 싸움. 그것도 목숨을 건 비무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자, 우선 소개부터 드리지요.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분위기를 읽었는지, 일 장로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읽어나갔다.

“존성대명은 신연(辛然). 무림맹 감찰단 출신으로 별호는 귀도냉심(鬼刀冷心)이라 불립니다. 주로 강남지역에서 수적들을 소탕하는 데 앞장서셨고 10년 정도 근무하셨지요. 그 일과로 수백 명의 수적들, 그리고 수적 연맹인 장강수로십팔채의 채주 하나, 4명의 부채주를 제압해 압송한 전력이 있으십니다.”

“무림맹 감찰단이면 엄청난 거 아냐?

“나, 들어본 적 있어. 귀도냉심. 걸리면 무조건 죽이는.”

“그런 대단한 분이 여기에 왔다고?”

거리가 가깝다 보니, 웅성이는 소리가 들릴 만큼 커지고 있었다.

무림맹 감찰단 출신.

딱 이것만으로도 어지간해서는 볼 수 없는 굉장한 경력이었다.

일 장로는 분위기를 읽으며 스윽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옆에 분은…….”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천천히 물었다.

“……이제껏 뭘 하셨는지 좀 알려주시겠소?”

분명 빈정거림이 녹아든 질문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가운데, 모두의 시선이 한데로 쏘아졌다.

음무기는 그런 시선을 한 손을 올리며 화답하듯 받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소인은 중원에 정착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소이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항주 홍등가 거리에서 옥신각신했던 게 모두 열 번 정도가 될 겁니다.”

“…….”

“그중 다섯 번은 제가 현명하게 사과를 했습니다. 제가 잘못한 게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사부께서 말씀하시던 군자의 마음인 것이지요. 그리고 두 번은 제가 맞았습니다. 물론, 맞아줬습니다. 상대가 약해서 싸울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요.”

“…….”

“…….”

조금 전까지 가열됐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음무기는 그것이 자신에 대한 실망 때문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중 세 번이 문제인데요. 두 번은 그냥 도망갔는데, 한 명과는 좀 다퉜습니다. 솔직히 싸우면 이기는데 제대로 싸우는 척을 못 했지요? 혹 여기서 누가 들었으면 얘기 좀 해주십쇼. 야, 검성문 교관으로 있는 정고(鄭高)! 사부 때문에 내가 봐준 거야. 진짜 제대로 하면 넌 순삭이라고. 아, 순삭이란 말은 순식간에 죽인다는 뜻으로…….”

“아…….”

종리미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건 뭐, 패하는 것보다 더욱 난처한 상황이었다.

이 중요한 상황에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 자신들을 우습게 만드는 꼴이라니.

“크음.”

“험험.”

그녀 주변에 있던 장로와 친인척들도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꾸욱.

종리헌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상대가 감찰단 출신이란 얘기에 절망할 시간도 가지지 못했다.

이런 우스운 모습을 보이고 패한다면, 정말이지 가문 사람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으리라.

“크크큭.”

“쿠쿡.”

“참, 수준이 보이네요.”

한편, 옆에 있는 방계 쪽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연신 피어있었다.

상대가 너무 부각되다 보니 촌극도 이런 촌극이 없었다. 아무래도 사람을 구하다 못해, 어디서 왈패 한 명을 데려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다들 준비하십쇼.”

일 장로는 재빨리 시작할 필요성을 느꼈다.

음무기는 그제야 말이 길었다고 생각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알았다는 듯 손을 다시 흔들어 보였고, 맞은편 신연은.

‘저따위 녀석과…….’

표정이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그는 한 달 전, 큰돈을 받고 비무 요청을 수락했다.

종리가는 소흥에서 꽤 덩치가 큰 가문이고, 그래서 상대 역시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해 왔다.

그런데 지금 저런 뒷골목 왈패 녀석과 손을 섞어야 한다는 게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같은 자리에 서게 된 것만으로도 수치다.’

“시작!”

그래서 일수에 그냥 죽여버릴 요량으로 곧장 뛰었다.

가급적 살수를 피하는 것이 불문율이었지만, 그냥 손이 미끄러졌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그런 그가 순식간에 이 장 거리를 좁혔고, 도갑에서 도를 꺼낼 때쯤.

‘뭐?!’

이상함을 감지했다.

지척까지 거리를 좁힌 이 장면, 이 상황에서 상대가 미소를 보이는 모습에 직감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거리는 일 장 내.

끝내 본능을 이기고 살수를 펼치려던 그의 판단은, 처참히 실패로 돌아갔다.

퍼억!

신연의 몸이 거짓말처럼 멈춰버렸다.

음무기의 도면치기가 그의 얼굴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쿠쿵!

뒤이어 번쩍임과 함께 상대의 지척까지 다가간 음무기.

그가 복부에 단권(單拳)을 쏘아내자, 신연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고.

버버벅!

음무기가 따라 올라가며 몸을 회전시킨 회련각(回蓮脚)으로 세 번을 걷어찼다.

눈 깜짝할 사이 연계된 동작은 무려 다섯 번으로, 이 모든 게 전광석화처럼 이어진 것이다.

쿠왕!

그리고 마무리는 오른발 직경(直勁) 발차기.

탄경(彈勁)과 발력을 실은 퇴법(腿法)이 펼쳐졌다.

퍽!

그것이 끝이었다.

신연은 바닥에 뒹굴자마자 다시 붕 떴고.

그그그그극.

계속해서 바닥을 뒹굴며 밀려나다가.

퍼퍽!

관중 쪽, 만약을 대비해 출입을 막아놓은 가림벽을 부수고 겨우 멈췄다.

“…….”

“…….”

휭하니 침묵이 감돌았다.

순식간에 끝난 비무.

싸늘해진 좌중의 분위기가 현재 상황을 정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음무기의 한마디가 좌중을 향해 조용히 퍼져나갔다.

“감찰단, 별거 아니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종합적인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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