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비무 (4)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자미부인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좌중의 환호와 갈채 때문에 소리가 묻혔지만, 건너편에 있는 직계 식구들이 들을 정도로 컸다.
“총관! 이게 어찌 된 거요? 혹시 누군가가 독이라도 탄 거 아니에요?”
“식사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없으면 왜 당한 건데! 강남삼검이라는 고수가! 저런 출신도 근본도 없는 녀석에게! 왜! 어떻게!”
그녀의 호통은 계속 이어졌다.
그만큼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먼저 나온 선연이란 자는 그렇다 하더라도, 강원태는 설득하기 위해 장장 보름을 투자했으니까.
“의원! 빨리!”
한쪽에선 몇 명이 달려가 강원태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를 들것에 싣고 조심히 비무대에서 걸어 내려왔다.
“마님.”
그렇게 씩씩대는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와 속삭였다.
“보는 눈이 많으니 심화를 푸시지요. 저희가 이런 경우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총당주.”
그는 종월. 당주들을 이끄는 총수로 종리세가의 안살림을 도맡아 하는 장년인이었다.
“상대측은 만만치 않게 준비를 했고, 덕분에 방심한 우리 쪽이 손해를 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이상의 걱정은…… 불필요합니다.”
“후우…….”
종월의 말에 자미부인은 그제야 조금 열을 삭혔다.
그는 자신의 사람들 중에 누구보다 총명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당주, 비무도 기세에 영향을 받는다고 들었어요. 지금 이대로 가다간 자칫하면…….”
“하하. 마지막 남은 인물, 그가 이 얘길 들으면 매우 서운해할 것입니다. 그가 누군지, 어디 출신인지, 어느 수준인지는 마님도 직접 목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녀는 잠깐 숨을 골랐다.
종월이 마지막 비무대에 오를 인물이 누군지를 상기시켜주자, 그제야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더 이상의 변수는 없겠지요?”
“없습니다. 강남삼검으로 평가받는 강원태지만, 그자라면 강남일검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더욱이 그의 출신을 듣지 않았습니까?”
“……하긴요. 제가 너무 흥분했어요.”
자미부인은 그제야 마음을 다스렸다.
확실히 마지막에 나설 그는, 강원태라는 이름을 완전히 묻어버릴 정도의 사람이었으니까.
“오라버니, 정말…….”
그에 반면, 종리미는 이미 감격에 휩싸여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 건지, 보고서도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종리헌이 묻자 종리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그 무당, 용한가 봐요.”
“……허허. 그래, 정말 용하구나.”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종리미를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뭐 아무렴 어떤가.
세 명 중 벌써 두 명이나 꺾어버렸으니.
한편, 그런 그들과 반대로 지켜보던 일 장로는 이마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거 어떡하지…….’
이제껏 진다는 경우는 전혀 생각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니, 혹시 자신이 줄을 잘못 선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우리 쪽이 진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입지는커녕, 일 장로직을 내려놓고 가문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대소사를 방계 쪽에 맞춰 변호했고, 힘을 실어줬기에 그에 대한 대가는 아주 혹독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은…….”
강원태가 패배하자 구겨버렸던, 신상명세서가 적힌 종이. 일 장로가 꼬깃꼬깃해진 종이를 주섬주섬 펼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 때쯤.
투욱.
대기실에서 담담히 걸어 나오는 한 무인이 보였다.
***
“음. 조금 전 했던 말을 취소해야겠구나.”
남궁훈의 말에 남궁혜와 남궁민의 시선이 일제히 모였다.
“저, 반반하게 생긴 자 말이다. 절정에 오른 정도가 아니다. 거의 정점에 선 실력자다.”
“말도 안 돼요, 오라버니. 저 나이에 벌써 그만한 성취라니요.”
“예, 형님.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남궁혜는 기막혀했고, 남궁민도 부정했다.
초일류가 되면 흉내 낼 수 있다는 내기 발현. 그것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경지가 절정이다.
그리고 절정에서도 정점에 다다랐다면, 그것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음무기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장 도기 한 번 쓰지 못한 사람이잖아요?”
“혜야. 민아. 검기를 쓰는 자를 상대로 이기는 자가, 정말 검기를 쓰지 못한다고 생각하느냐?”
남궁훈은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내기 발현 한 번 없이 적을 쓰러트렸으니, 몇 배는 더 강하다고 봐야 한다. 숙련도와 경험, 그것만으로 상대를 압도했다는 거다.”
“아…….”
“흐음.”
남궁훈의 말에 둘은 조용해졌다.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일리에는 맞았다. 아무래도 초절정에 오른 남궁훈의 시야는, 자신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이었다.
“음. 마지막 한 명이 나오는구나.”
남궁훈의 말에 둘은 다시금 집중했다.
그러다 남궁민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온 사람이 삭발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소림인가?”
“아닌 것 같아요……. 계인이 없는 걸 보면.”
남궁혜가 고개를 저었다.
머리야 파르라니 삭발을 한 것이 눈에 띄지만, 그저 그것뿐.
가사나 장삼 차림도 아니고, 그냥저냥 무명으로 해 입은 옷이다.
애초에 소림사 같은 명문 대파의 사람들은 보란 듯이 출신을 드러내는데, 이 사내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이번엔 정말 재밌겠구나.”
남궁훈은 내심 기대를 드러냈다.
멀리서 봐도 형형할 정도로 안광을 내비치는 자. 한눈에 강원태보다 더욱 강한 자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시작입니다!”
일 장로의 선언에 좌중의 시선이 두 사내에게로 쏠렸다.
***
“스님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또 그게 아닌 것 같고…….”
싸움이 시작되자 음무기가 먼저 말을 걸었다.
오십 줄에는 들었을 법한 인상과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가 눈길을 자극했다.
“그렇다고, 산적도 아닐 거고…….”
음무기의 시선이 조금씩 밑으로 내려갔다.
산속에서 야영을 했는지 오묘한 복장.
가죽과 천이 허리춤에 엮어져 있었다.
신발도 가죽신이었다. 그리고 허리춤이 아닌 등 뒤에 메어져 있는 검.
“귀하께서는 소인의 출신이 궁금하신 모양이오.”
장년인이 예의 있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음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주겠소?”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좀 더 쉬운 방법이 있소이다.”
“그게 뭐요?”
“나를 곤경에 처하게 한다면, 스스로 밑천을 드러내지 않겠소?”
스윽.
손을 내밀면서 조용히 기수식을 취하는 장년인.
등에 찬 검도 사용하지 않고 손을 내미는 모습에, 음무기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졌다.
‘이놈. 단순히 허세가 아닌데?’
한 발 다리를 내밀고, 한 손을 내미는 동작.
별거 아닌 자세에서도 왠지 모르게 압박감이 들었다.
아마도 눈빛 때문이리라.
심후한 내력이 느껴지는 그 시선은, 검을 왜 안 쓰는가 묻지 못할 정도의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지 않을 거요?”
상대가 계속 신중히 살피는 모양새를 하자, 장년인이 물었다.
그에 음무기가 가만히 바라만 보자, 그는 먼저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한 번, 눈을 지그시 감고는.
“그럼 내 쪽에서 가지.”
탓.
말이 끝나자마자 음무기를 향해 거의 직선으로 달려들었다.
쇄애액!
음무기의 눈에 상대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러니 이전 신연이란 녀석처럼 도면치기로 기선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휘익!
‘피했어?’
아주 아슬아슬하게 어깨 옆으로 피해낸 상대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더욱 달라붙었다.
거의 지척까지 다가오자, 음무기는 몸을 비틈과 동시에 그대로 내기를 쏘아냈다.
도풍(刀風)이었다.
쿠우웅!
“……!”
공중에서 회전하던 음무기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도풍이 막혔다. 정확히는, 상대가 내지른 손바닥에 닿자마자 공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대응 때문에 음무기에게 틈이 생겼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틈을 만들어낸 것이다.
장년인은 조금 전 음무기의 도풍을 막아낸 그 자세로 기공을 공멸시킨 뒤, 이번엔 장풍(掌風)을 쏘아내어 엄청난 속도로 반격을 가해버린 것이다.
쩌엉!
그러자 음무기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대처를 보였다.
회전하던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반격해 날아온 장법.
뒤돌아선 상태에서 도신을 미리 아래로 내린 뒤, 바닥에 닿기 전에 곧장 그어 올려 자신을 덮어오는 기풍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큭!”
허나 공력을 완전히 파훼시키지는 못했다. 기의 공멸이 아닌 바람을 가르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지이익!
그로 인해 음무기의 몸이 거의 두 장이나 밀려 날아갔다.
파파팟.
‘이런!’
자세를 다시 고쳐잡으려던 음무기의 표정이 굳어졌다.
실력을 드러내는 것인지, 이전보다 월등히 빠른 움직임으로 접근해온 것이다.
급히 도기를 뿌려 대항하려 하던 음무기는, 한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마기가…….’
진신무공을 쓰면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랬다간 몸에 밴 마기가 새어 나올 터.
그 때문에 극히 짧은 찰나의 머뭇거림이 있었고, 상대는 결국 지척까지 달라붙었다.
쩡! 쩡! 쩌쩡! 쩡! 쩡! 쩌쩌정!
기다렸다는 듯 엄청난 속도로 쏟아지는 권법.
그저 맨손이 아닌, 하나하나가 내력이 발출되는 장력이었다.
음무기는 정신없이 막아냈고, 이내 힘이 부쳤는지 또다시 뒤로 물러나는 선택을 했고.
“흐압!”
상대의 두 손에서 내질러진 권풍이, 직선이 아니라 서로 교차하며 날아들었다.
‘낭패!’
음무기는 직감적으로 피하기 어려운 공격임을 느꼈다.
방어조차 힘들다. 그랬다간 내기를 쓰고 말 테니까. 그래서 그에게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중원물을 먹다 보니 조금 꺼려졌지만, 그는 곧 굳은 얼굴로 온몸을 바닥에다 바짝 붙였고.
데굴데굴.
몸을 굴려 가까스로 상대의 공격을 피해냈다.
“…….”
그에 장년인이 동작을 멈췄다.
기회는 여전히 그에게 있었다. 더 몰아붙이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을 상황인데, 장년인은 갑자기 손을 거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려타곤이라……. 수치를 모르는 자구나.”
그 뒤, 한마디를 꺼냈다.
“응. 이기면 장땡이야.”
음무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꾸했다.
말은 우습게 받아쳤지만, 속으로는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나려타곤은 그냥 바닥을 뒹구는 행위다. 딱히 대단한 회피의 수단이 아니다.
다만 중원인들은 이런 장면에 멈칫하는 걸 아는, 심리를 이용한 한 수였다.
운 좋게도 이번엔 들어맞았지만, 다음번에 또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음무기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생각했다.
‘와, 이놈. 정말 진심으로 싸워야 할 것 같은데…….’
맞은편 상대와는 평범하게 싸워서는 이길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렇다고 본신의 전력을 꺼낼 수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옆을 돌아본 그는.
절레절레.
사부인 설휘가 고개를 내젓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할 수 없지.’
역시나 승낙하지 않았다.
음무기는 두 손을 털었고, 여기서 손을 들었다.
“졌소이다.”
그 말에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던 좌중이 침묵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일 장로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졌소이다. 싸우다 보니 자신이 없어졌소.”
“…….”
그 말이 끝나고, 몇 번 숨을 들이켰을 시간이 흘렀을 때.
“오오오! 대단했다고!”
“고수를 알아본 거야!”
“이번에 나온 상대는 얼마나 강한 거야?”
좌중의 감탄과 함성이 들려왔다.
***
“아, 이거 참. 마기를 어떻게 하든가 해야지…….”
음무기가 터덜터덜 대기실로 걸어오며 아쉬움을 표하자, 송화가 격려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음무기는 잔뜩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우리 사정이 그런 걸 어떡하겠냐. 전력으로 대결했으면 당연히 네가 이겼을 거다.”
설휘가 다가오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당연하지요.”
음무기는 당당히 말했다.
그건 농담이 아니었다. 적어도 설휘가 보기엔.
“어서 여기로!”
“괜찮으십니까?”
이내 낯선 사내와 노인이 자신의 앞에 서자, 음무기는 송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의원입니다. 제가 불렀습니다.”
“하긴.”
음무기는 자신의 상처 부위를 바라봤다.
강원태에게 다친 부위.
심각한 상처는 없었지만, 자잘하게 피륙을 긁어서 출혈 자체는 꽤 컸으니까.
그래서 금창약을 바르고, 상처를 싸매는 등, 음무기는 혼자서 싸움 다 한 사람의 꼴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부. 저 녀석, 출신이 어디인 거 같으십니까? 검을 차고서도 권법에 꽤 조예가 있어 보이던데…….”
음무기의 말에 설휘는 비무대에 서 있던 남자를 한 번 보고서 입을 열었다.
“짐작 가는 곳은 있다.”
“어딥니까?”
“아직 확실치는 않아. 직접 상대해 보면 더 정확할 것 같구나.”
“허. 저놈과 같은 말을 하십니다.”
“실없기는. 그럼 나갔다 오마.”
“적당히 패고 오십쇼. 저보다는 사람들의 주목을 덜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무기의 말에 설휘는 피식 웃다가, 멈칫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송화야.”
“예. 사부님.”
“우리가 이긴 뒤. 협상을 어떤 식으로 할지도 생각해두거라.”
“걱정 마십쇼. 제 전문이지 않습니까.”
송화는 배시시 웃었다.
이 싸움.
여기 모인 사람 중에 사부가 절대 지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아는 자는.
음무기와 자신뿐이었기에 나오는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