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무공학습 (1)
“다음 상대는…….”
일 장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휘가 비무대에 올라섰다.
좌중의 시선이 자연스레 집중되자, 일 장로는 소개도 없이 빠르게 진행했다.
“바로 시작하지요.”
어서 눈앞의 이자를 쓰러뜨리고 마지막 상대자와 결투하길 바랐던 것이다.
쉬이이잉.
바람이 불었다. 설휘와 이름 모를 장년인은 대화 없이 서로를 주시했다.
한참을 그러던 중.
스윽.
설휘가 발을 옆으로 벌리고 손을 내밀었다.
“무슨 수작이오?”
그 모습에 장년인이 곧장 물었다.
“수작이라…….”
설휘는 그에 고개를 내저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 보면, 당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는군.”
“허…….”
설휘의 도발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장년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그만한 실력자인지…… 내 한번 확인해 보리다.”
파앗.
상대방이 선공을 시도했다.
설휘는 직선으로 내달리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똑같은 방식인가.’
이전처럼 신법의 속도를 조절하려는지, 지금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스윽.
설휘는 상대가 지척까지 다가오는 걸 허용했다.
장년인은 예상대로 마지막에 갑자기 몇 배나 빠른 움직임으로 주먹을 뻗었다.
휘릭.
“……!”
장년인의 눈이 커졌다.
상대의 손이 원을 그렸다.
처음엔 자신이 뻗은 주먹을 상대 역시 주먹으로 부딪치려고 했다. 그러다가 닿기 직전.
사악.
설휘가 갑자기 주먹을 폈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에 손을 대어 그의 몸 쪽으로 끌어당겼고.
그렇게 중심이 앞으로 쏠린 자신에게, 다시금 주먹을 밀어냄과 함께 공력(功力)을 실어 날렸다.
치치치칙.
설휘의 내공 때문인지 장년인은 바닥을 디딘 채 계속 뒤로 밀려나갔다.
“합!”
그리고 삼 장 정도 되는 거리에서 그가 기합을 넣으며 손을 부여잡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침묵이 일었다.
누구 하나 다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장년인의 눈에는 엄청난 당혹감이 맺혀 있었다.
“너, 너는 대체…….”
상대의 반응에 설휘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상이 맞았군.”
“…….”
“무당에서 오신 분이었구려.”
방금 설휘가 사용한 것은 태극권.
그중에서도 붕리제안(棚履擠按-손과 팔을 이용해 밀고 당기는 수법)이었다.
초식 자체는 어렵지 않았고, 저잣거리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을 보였다. 그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
“무당이었구나!”
남궁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 격돌하며 펼쳐진 한 수를 보고 확신한 것이다.
“무당이요? 저는 잘…….”
“정확히 어느 부분이 그랬습니까?”
대사형의 놀란 외침과 달리 남궁혜와 남궁민의 반응은 미적미적했다.
방금 비무에 돌입한 두 명이 무당의 묘리와 비슷한 동작을 보이긴 했지만, 그 정도로 무당 출신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게, 무당의 무공은 강호에 널리 퍼져 있었다.
사량발천근 같은 고급 수법은 아니더라도 흐름을 비트는 초식, 힘을 역이용하는 동작들은 저잣거리 좌판에 나열해놓은 책자들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우선 더 보자꾸나.”
사제와 사저의 반응에도 남궁훈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천상 무인이다.
무당의 무공을 견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뛰게 하고 있었다.
***
스으으으-
두 남자 간에 침묵이 또다시 일었다.
한 번의 교전이었지만, 그 내용과 의미는 매우 놀라웠다.
태극의 한 수와, 그것을 막아낸 똑같은 태극의 한 수.
더 면밀히 살펴보면 설휘가 펼친 건 평범에 가까웠고, 장년인이 펼친 건 상위 수준이라 할 만했다.
설휘는 내공을 실은 장력을 태극으로 돌려 기운을 흘려냈으니 말이다.
“혹, 귀하는 무당과 관계가 있으시오?”
장년인의 말투가 달라졌다.
상대가 그저 무당의 무공을 흉내 낸 거라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좌중에서 보는 것과 달리, 직접 손을 섞어본 그가 느끼기에 방금 한 수는 분명 무당의 내가중수법의 묘리가 담긴 일초였다.
“조금. 그건 왜 물으시오?”
“강호에 뿌려진 태극은 즐비하나, 그 진체(眞體)를 이해하고 행하는 자는 드물기 때문이오.”
“진체라…….”
설휘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확실히 상대는 보통 수준의 무당 출신이 아니다.
조금 전 펼친 것만 봐도, 한 방파의 일대제자를 능가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훌륭한 무공을 펼칠수록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테니까.
더욱이 설휘에겐 실험해 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뭐, 진체라는 게 굳이 의미가 있나 싶군. 어떤 무공이든 싸움에서 이길 수 있으면, 그것이 좋은 것 아니오?”
설휘의 태세가 갑자기 변하자, 장년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를 분간하기 전에, 말투가 너무 광오했기 때문이다.
“무당의 태극을 모욕하는 거요?”
그래서 노기가 실린 목소리로 물었고.
“사용해 보니 그 정도로 거창한 무공인지는 모르겠던데…….”
“…….”
“그대가 한번 보여 보시오. 태극권이라는 그게 쓸 만한 건지.”
그 말에 장년인의 얼굴이 미소가 번졌다.
“역시나. 당신은 태극의 진체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군.”
스윽.
장년인이 자세를 잡았다. 눈으로 기세를 쏘아내는 걸 보아, 곧장 덤벼들 태세였다.
“그럼 그대가 알려주든가.”
스윽.
설휘 역시 그와 비슷한 동작을 흉내 내며 손을 내밀었다.
잠깐의 고요함이 비무대에 머물렀고.
“츠읏.”
이전과 똑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장년인이 설휘를 향해 직선으로 달려든 것부터, 주먹을 내지르는 동작까지.
하지만 마지막엔 변화가 있었다.
촤악.
장년인의 곧게 펴진 왼손이 오른손을 가리며 교차하는 순간, 오른손이 뻗어나가는 자세가 펼쳐진 것이다.
진보반란추(進步搬攔捶), 태극권의 초식 중 하나였다.
반 박자 늦게 들어오는 적의 공세에, 설휘는 손바닥을 펼치는 이전과 같은 대응으로 상대했다.
그러자 적은 주먹을 전부 뻗지 않았다.
다시 오른손을 하늘로 쳐올려 원형으로 돌리면서 양손을 벌렸다.
사비세(斜飛勢).
이 또한 태극권의 초식 중 하나로, 상대에게 눈속임을 가하는 동작이다.
“흡!”
그리고 순식간에 이어진 정권(正拳) 찌르기.
그런데 이전과는 달리, 내기 발현으로 인한 강력한 권기(拳氣)가 상대의 몸을 겨냥했다.
사사삭.
설휘는 적의 공격을 간파했다.
거의 동시에 횡으로 이동하여 똑같은 주먹 찌르기.
다만 장년인보다 한 단계 낮은 권풍(拳風)을 그에게 쏘아냈고, 그것이 상대에게 잠깐의 틈을 만들어냈다.
“……!”
버버버버벅!
권풍을 뛰어넘은 것인지, 아니면 통과한 것인지 놈의 신체는 이미 설휘의 머리 위에 와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어진 수많은 정권 찌르기.
대여섯 번 정도를 설휘가 막아내자, 갑자기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발차기.
진신파련이었다.
츠츠츠측.
설휘의 몸이 밀려나자 더욱 저돌적으로 들어왔고, 반격하는 설휘의 주먹을 그는 오른손을 이용해 밖으로 쳐내며 왼손으로 정권 찌르기 동작을 구현해냈다.
포효귀산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설휘의 저항은 강했다.
밖으로 밀쳐내며 정권을 지르는 장년인의 주먹을 다른 손으로 막았다.
멀리서 보기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행위였지만, 그건 평범한 무림인이라 가정했을 때 해당하는 경우였다.
설휘가 펼쳐낸 건 화공(火功)이었으니까.
“큭!”
치지직!
장년인은 이를 악물며 스스로 뒤로 물러났다.
아쉽게도 마지막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막 가슴에 찔러 넣으려던 주먹이, 강렬한 열양공 때문에 끝까지 뻗지 못한 것이다.
“후우. 아슬아슬했군.”
이마를 닦으며 말하는 설휘.
하지만 얼굴에는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내 여유가 넘치는 말이 나왔다.
“설마, 이게 다는 아니지?”
빠직.
장년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상대의 허세와 도발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그였지만, 정작 실력이 있는 적임을 알게 되자 평점심이 깨진 것이다.
철컥.
그는 드디어 등 뒤에 있는 검을 꺼냈다. 그리고 설휘에게 한마디를 했다.
“명정(明正).”
“……?”
“내 이름이니, 그리 부르시오.”
스스로 이름을 알려주자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이 호인지 뭔지 모르지만, 자신 역시 이름을 밝히기로 했다.
“휘(輝).”
“……?”
“휘라고 부르면 되오.”
“휘…… 알겠소.”
“그리고 이렇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설휘는 문득 그의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검이 장기이긴 하나, 굳이 꺼낼 필요는 없는 것 같소.”
“……?”
“그대가 그만한 실력자인지, 아직 모호해서 말이오.”
“……하하.”
도발이 제대로 걸린 것일까.
상대는 오히려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럼 곧 꺼내시겠구려. 몇 번 버티지 못할 테니.”
“그건 당신의 능력에 달렸지.”
너무도 태연하게 응수하는 설휘.
잠깐 침묵이 흐른 후.
“그럼 그 능력, 한번 보시게.”
말과 함께 명정이 느닷없이 검을 휘두르자 설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너무도 태연히 검기를 쏘아낸 것이다.
파팟.
“큭.”
바로 옆쪽, 극도의 신법을 펼친 설휘가 어깨를 부여잡고 나타났다.
반응속도가 대단히 빨랐지만, 검기의 속도에는 비교될 수 없었다.
“……!”
그 순간 명정이 달려들었다.
이전과 완전히 다른 속도였다. 검초가 정신없이 쏘아졌다.
쉭! 쉭! 스각!
‘그래. 더 달려들어라.’
예리한 한 수에 조금씩 상처가 늘어감에도 설휘의 얼굴은 밝았다.
자신이 풀어야 할 숙제.
그걸 이곳에서 해결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
“어…… 어?”
대기실에서 지켜보던 송화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 기습하는 검기에 맞을 때만 해도 그저 우연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허나 이내 지척까지 붙자마자 화려하게 쏘아지는 검술을 보고서 말문이 막혔다.
누가 보더라도 사부가 밀리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이해가 안 되네…….”
“……응?”
송화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치료를 마친 음무기가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서 혼잣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뭐, 괜찮다.”
음무기는 비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까, 형님?”
이어진 송화의 물음에 그는 담담히 대답했다.
“사부의 움직임이 좀 이상해. 제압할 수 있는데도 계속 기회를 헌납하는 느낌이다.”
“상대가 그만큼 강한 게 아닐까요? 그리고 제약……도 있지 않습니까.”
“제약이 있긴 하지만, 내가 아는 사부의 능력을 다 펼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이건 뭐랄까. 음…… 그래. 인위적이랄까.”
“인위적? 사부가 일부러 의도하는 거란 말인가요?”
“그게 아니고선 적의 공격을 일부러 받아내려고 하지 않지. 중간중간마다 받아치는 건 오로지 같은 초식만이야. 그건 그렇고.”
음무기는 묘한 시선으로 비무를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모든 걸 원형의 흐름으로 보는 무공이라니. 태극검이란 거, 정말 특이하면서도 놀랍구나.”
음무기 역시 무인이다.
그는 어떤 무공을 해석함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태극이 주는 신비로움은 매우 생경했고, 그랬기에 호기심이 더욱 컸다.
***
‘이게…… 대체?’
명정은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이 계속 펼쳐내는 공세에 상대는 쓰러질 듯 쓰러질 듯하면서도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처음엔 쉽게 끝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오십사초식, 십삼자결로 되어 있는 태극검 중 예리한 초식으로 상대를 몰아붙였고.
빈틈이 보이자 가장 자신 있는 초식을 찔러 넣었다. 그런데도 그는 피해냈다.
정확히 말하면 조금 상처를 입으며 피한 것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일단 몰아붙이는 데 성공하자 명정은 몇 가지 초식을 변형시켜 공격했지만, 특이하게도 그런 건 곧잘 피해내거나 막아냈다.
별수 없이 명정은 태극검의 다른 초식을 연달아 동원하여 펼쳤다.
“윽! 큭! 으윽!”
그제야 명정은 조금씩 상대를 압박할 수 있었다.
자신을 휘라고 밝힌 상대는, 같은 초식을 쓰거나 변형하면 기가 막히게 피하거나 막아냈다.
하지만 재밌게도 새로운 초식을 펼쳐내면 상대는 피해를 입었고, 종국에는.
“크악!”
큰 상처를 받으며 밀려났다.
“안타깝군. 손에 가감을 두지 못해 미안하오.”
내심 한숨을 돌리며 명정은 그를 향해 말했다.
“확실히 대단한 실력이오. 이제 고집은 그만 부리고 검을 들어도 될 것 같소만?”
그 말에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되물었다.
“그것보다…… 다 한 거요?”
“……?”
“아직 최고의 초식이 남은 것 같은데…….”
“허어.”
명정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미 그는 판단을 끝냈다. 상대는 태극권을 조금 쓸 줄 알긴 해도, 태극검은 아예 모르는 이였다.
즉, 무당의 제자는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름이 휘인지 화인지 어쨌든, 그는 여러 번 무당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겨도, 사부에게 할 변명은 충분했다.
“굳이 보고 싶다면…….”
명정은 마음을 먹었다.
눈앞의 상대를 더는 동문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마지막 최고의 절초 하나를 남겨놓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걸 쓰면 반드시 죽을 테니까.
“혹 잘못됐을 시 유언은……?”
“그럴 리가 있겠소?”
스윽.
상대의 반박에 마음이 후련해졌다.
이제 맘 놓고 적을 쓰러트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솨아아아.
검을 회전시키는 동작을 취하는 명정. 그의 몸에 진기가 가득 모이기 시작했다.
태극검 중 최고의 위력을 보이는 절초, 배검하산(背劍下山)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설휘는 오히려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온다.’
솨아아아-
다가오는 그의 움직임에서 검의 위치가 보이지 않았다.
배검. 검신을 아래로 향하게 잡은 뒤, 팔꿈치에 붙여 검을 숨기는 행위. 그다음은 하산이다. 이는 산을 내려오는 게 아닌, 산을 무너뜨린다는 의미였다.
번쩍!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내기가 투과되었다.
그것을 보았을 때 설휘는 이미 피하기에는 늦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은 밝았다.
중원에 온 뒤 다시 밝혀진 비밀 하나가 풀어진 느낌이었으니까.
달리 말하면 ‘시스템’이란 녀석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서고 있다고 할까.
[오십사초식(五十四招式), 십삼자결(十三字訣)로 이루어진 태극검의 모든 초식을 경험했습니다.]
눈앞에 글귀가 나타나며 한순간 시간이 멈췄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글귀.
설휘의 도박이 성공했다는 증표였다.
[무당의 태극검을 익혔습니다.]
상대가 펼친 태극검의 모든 초식을 경험하자마자, 시스템이 개입하며.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