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낯선 손님 (1)
“오셨습니까.”
식사 시간이 지나고 종리헌은 설휘, 음무기, 송화를 자신의 거처로 불렀다.
일행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안 그렇겠는가.
세가의 미래가 걸린 중대한 대결에서 직계 식솔들이 승리했다. 이젠 다른 곳으로 내몰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잘못된 것을 바로세울 수 있는 명분.
문무(文武)를 떠나 다시 종리가가 종리가로 살아갈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이 이들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무어라 감사를 드려도 부족할 지경이라…….”
“뭐, 서로 필요한 것을 나누는 세상 아닙니까? 저희의 도움이 컸다면, 저희는 저희대로 좋지요. 의미 있는 일을 한 것일 테니.”
감사하다는 말에 송화가 잽싸게 반응했다.
원래 저런 감사의 인사엔, 평소라면 ‘별거 아니다’ 같은 체면을 세우는 말이 나오는 법인데, 그는 은근슬쩍 자신들의 치적을 둘러서 언급했다.
“하하하. 예. 맞습니다.”
헌데 종리헌은 상대의 그런 대꾸에 오히려 더 밝은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길게 끌 거 없지요. 여기 계신 세 분은 아주 큰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귀한 고수를 소개해주신 무당님께 어찌 보은을 해드릴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한 명씩 사람을 일별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륵. 드륵.
한쪽 벽으로 걸어간 그는 비치된 수납장을 열고 커다란 목함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이게 뭡니까?”
곧장 음무기가 물어보았다.
“금원보가 모두 백 개로, 총 1만 냥입니다.”
“오!”
“와!”
“흠.”
음무기는 화들짝 놀랐고. 송화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설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그쳤다. 그도 그럴 게, 성공했을시 5천 냥, 비무대에 올린 3명을 합하면 1만 5천 냥이 되어야 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그런 설휘의 반응을 본 건지 못 본 건지, 종리헌은 이어 목함을 펼쳐 보였다.
줄지어 놓인 금원보들. 그 좌측에는 술병처럼 생긴 유리로 만든 병. 그 안에 누런 단환 두 개가 들어있었다.
“이게 뭡니까?”
송화가 힐끗 설휘의 눈치를 살피고서 물었다.
“저희 소흥에는 술이 유명한 것 아시지요? 저희 양조장에서는 항시 양질의 찹쌀에 보리누룩을 사용합니다. 매년 술을 빚을 때마다 모인 주정을, 여러 차례 귀한 것들을 넣고 묵혀서 가보로 보관하던 것입니다.”
“허면 영약입니까?”
음무기가 묻자, 종리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건강을 돕는 것은 확실합니다만, 솔직히 영약인지 어떤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 말씀은?”
“조부님께 듣기로, 예전에 몸이 약한 분께서 복용하시곤, 갑자기 어느 순간 상승의 무인이 되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영약의 효험이 있나 싶어서 고명한 무림 고수분께 드렸는데, 그분 말씀으로는 그저 기혈만 도울 뿐 영약 축에는 들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아하.”
송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설휘를 보았다.
설휘는 담담히 목함 안, 흰 종이에 반쯤 쌓여 있는 환(丸)약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댔다.
[소흥신명이주(紹興神明利酒)를 도구함에 집어넣습니까?]
그러고는 눈앞에 뜬 글귀를 보고 긴장했다.
‘영약이다. 그것도 최상위!’
활자가 나타나는 반응.
설휘는 목함을 닫으면서 소흥신명이주를 도구함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곧장 상세내역을 살폈다.
[소흥신명이주(紹興神明利酒)]
설명 : 종리가의 가보. 찹쌀을 영단이라 알려진 주천금단(株天金丹)과 함께 섞어 넣었고, 공청석유 한 단계 아래인 명정수(明淨水)로 굳힌 술의 정수.
고수보다 하수들에게 적합하다.
효능 : 흡수하기에 따라 1만에서 100만 사이의 내공 증진을 볼 수 있다.
‘이거…… 굉장한 물건이구나.’
설명을 읽어보던 설휘의 눈이 커졌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할 만큼 내공 증진이 이루어지는 영약은 아니다.
허나, 내공이 1만이 안 되는 자가 사용한다면, 단번에 100만까지 오를 수 있었다.
100만.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3갑자에 해당하는, 최소 절정 반열에 오른 고수들이 가진 내공이 100만이었다.
만약 과거의 자신이 이걸 얻었다면,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 영약이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설휘 앞으로 종리헌이 고개를 숙였다.
“여러분들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누가 봐도 진심이 느껴지는 태도였다.
“혹. 시간이 있으시다면 며칠 정도 더 묵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도움 주신 것에 비해 제대로 대접한 것도 없어서…….”
스윽.
“괜찮습니다. 저희는 일이 많아서.”
설휘가 눈짓을 주자 송화가 빠르게 끊었다.
이미 빨리 떠나기로 말을 맞춰둔 상황에서 더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갑자기 진지해진 종리헌의 표정에 남자 셋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다름 아니라 남궁세가의 소가주께서 그쪽의 사부란 분께 관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보통 저런 무림의 명가는 뛰어난 무인들에게 매우 호의적이라고 들은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좋은 권유로군요. 뜻은 잘 알겠소만, 난 바빠서…….”
설휘는 부드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뭐, 그러시다면 제가 잘 말해놓겠습니다. 혹 떠나는 건 언제쯤 하실 생각입니까?”
“지금 갈 생각이오.”
“알겠습니다. 제가 마차를 내드릴 테니 그걸 타고 가십시오.”
종리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하인을 부른 뒤 마차를 대라고 명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남자 셋을 향해 정중히 예를 표했다.
“기회가 되신다면 언제든 꼭 다시 들러주십시오. 그땐 정말 제대로 된 대접을 하겠습니다.”
“말씀만이라도 고맙소.”
그렇게 설휘와 음무기 송화는 방문을 나섰다.
종리가의 여정의 마지막 날.
참 화창한 날씨였다.
***
거처로 돌아온 설휘는 곧장 수련에 들어갔다.
태극검. 그리고 삼재검에 대한 공부를 위해 동작도 펼쳐보고, 스스로 참오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그사이 음무기는 설휘의 명을 받고 하오문에 접촉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건 앞으로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는데, 항주만 아니라 절강성의 관도. 중요 관문에 있는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필요했다.
이것은 미래를 위한 대비였다.
얼마 있지 않아, 마교에서는 일제자와 화산파의 관계에 따라 마인들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절강의 지역 내에 마인들이 활보하는 곳이 있을 텐데, 그에 따른 정보를 미리 얻기 위한 준비였다.
그리고 송화는 가게 운영에 매진했다.
종리세가의 소문이 퍼졌는지, 가게를 열자마자 사람들로 미어터질 정도였다. 그래서 시간대도 대폭 늘리고, 착수 금액과 대면 금액을 대폭 올려 돈을 축적했다.
그렇게 보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사부. 분타 하나와 접촉은 했습니다만…….”
음무기가 설휘의 거처를 찾았다.
“그래, 어찌 되었느냐?”
“돈을 좀 달랍니다. 많이.”
“그건 예상한 일이다만.”
“예. 그런데 그 많이가 좀 많이 과한 수준입니다. 매달 금으로 천 냥을 달랍니다.”
그 말에 설휘의 미간이 좁혀졌다.
금 천 냥. 보통 은 4냥에 금 1냥이 거래가 되니, 천 냥은 상당히 큰 금액이다.
당장 은 2냥이면 네 식구가 한 달 정도 크게 부족함 없이 먹고사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매달 금 천 냥이면, 지금 설휘가 가진 재산으로는 2년을 버티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혹여나 해서 제가 계산을 해보니. 지역과 물자 그리고 시간과 인력을 동원해도 한 달이면 금 5백 냥 정도로도 충분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금 천 냥을 달라는 건…….”
아마도 분명 야료를 부려 더 뜯어낼 생각일 터. 설휘는 그 말을 알아들었지만 얼마 후 고개를 끄덕였다.
“하자고 해라.”
“예?”
“어차피 다른 대안이 없다. 우리가 움직이면 신분이 드러날 것이고, 다른 사람을 쓰더라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 비싸다 하더라도 결국 이 분야에선 전문가를 고용하는 게 이득이다. 적당한 선에서 꼬리를 자르는 것도 쉬울 테고.”
음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의 말은 확실히 틀린 말이 아니다.
정보는 주고 사는 것. 사람을 따로 사서 심는 것보다 수많은 재화를 활용하는 게 이득이다.
하오문의 재화는 바로 사람.
도박꾼이나 기생, 소매치기 같은 지천에 널린 하류 인생들은 가히 몇 명인지 셀 수도 없다.
그러니 어떤 방식보다 이 길이 정보를 얻는 데 가장 용이했다.
“다만. 그렇다고 얕보이지는 말아야지. 의도적으로 가짜 정보를 보냈다가 발각될 시 관련자는 모두 즉참한다고 해라.”
“그러겠습니다. 헌데…….”
음무기는 대답 후에, 잠시 고민하는 듯 뜸을 들였다. 그리고 다시금 입을 열었는데.
“사부. 그럼 제게 금 천백 냥을 먼저 주시지 않겠습니까?”
“선금을 주려는 거냐? 뭐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왜 백 냥을 더 달라는 거냐?”
“그건 나중에 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흐음.”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바닥의 생리를 아는 음무기다. 그가 필요하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설휘는 도구함에 있던 금원보를 건넸고, 그걸 챙긴 음무기는 임무를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나흘이 지난 후.
음무기가 돌아왔고, 때마침 일을 끝낸 송화도 같이 들어왔다.
“사부. 교에서 온 서신입니다.”
송화가 먼저 설휘에게 양피지를 건넸다.
여기서 정착 후, 또 한 달이 지나 대원들이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대장께서는 몸 건강하신지요? 이곳은 아직 별다른 동향이 없습니다. 사제자께서 뭔가 고심하시는 듯하다는 소문이 있긴 합니다만…… 그게 무언지는 아직 밝혀진 게 없습니다.]
설휘는 서신을 화로에 던져 태우며 생각했다.
‘예상했던 대로다.’
자신이 비밀무사가 되었을 때에는, 한 달이 지난 시점에 일제자 휘하에 있는 오각주들을 처리하겠다는 임무를 내렸다.
하지만 현재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이다.
곤마가 설휘만 한 고수를 발견하거나, 시일이 지나지 않는 이상 행동에 옮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AI의 말에 따르면, 구종명이 태황각주를 만나러 본문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터.
태황각주가 중원에 마인들을 뿌린다는 준동 시기도 조금 늦춰질 가능성이 있었다.
“사부.”
음무기의 말에 설휘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래. 하오문은 어찌되었느냐?”
“금 7백 냥으로 합의를 봤습니다.”
“호오. 어떻게?”
생각보다 낮은 금액에 설휘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절강 내에 하오문 분타가 총 세 곳이 있었습니다. 그중 제게 장난질한 분타주 한 명을 죽인 다음, 그놈 목숨 값과 한 달 정보 사용권을 두 분타주에게 경매로 제시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더 낮은 금액으로 제시해와 그 금액으로 해결했습니다.”
“하…….”
설휘는 잠깐 어이없어했다.
음무기가 왜 돈을 백 냥 더 달라고 했는지 이해가 됐다.
최악의 경우, 분타주 목숨 값으로 금 백 냥을 지불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음습하고 위험하지만, 어쩌면 음무기의 방식이 가장 확실할 수 있었다.
관시. 기름칠은 정계에서만이 아니라, 이런 하류에도 있는 법이다. 무언가 일이 생기면 서로서로 숟가락을 들이밀어 착복하려 든다.
음무기가 접촉한 분타주놈은 여차하면 배째라고 달려든 것이다.
그래서 그 배를 째버리고, 다른 분타주에게 경매를 붙였다. 남은 둘은 움찔했을 것이다. 정보를 먹고 사는 이들이니, 계산을 돌려봤을 터.
그들 같은 하류인생에서는 복수라는 것도 돈이 있어야 움직인다. 그 생리를 파고든 한 수였다.
“사부. 그리고 이번 달에 번 돈입니다.”
이번엔 송화가 말했다.
그는 품속에서 금원보 두 개와 금 몇 냥을 내밀었다.
도합 금 280냥.
일개 무당 도사가 한 달 벌었다고 하기에는 정말로 큰 금액이었다.
“고맙구나.”
“아닙니다. 저도 이번에 생각한 게 있습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해선 지금의 방식과 달라야 한다고.”
“어떤?”
“첫째로는 가게를 넓히고, 둘째로는 제자들을 길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지금보다 적어도 다섯 배는 넘게 벌 수 있을 듯합니다.”
“건물? 제자?”
“예. 일단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걸 편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주위에서 점을 보러 간다 하면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니, 주변에서 몸을 쉬며 좋은 경치를 보고 간단한 차라도 먹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영리한 생각이었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점에 대한 중원인들의 인식이 좋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에 그저 편하게 올 수 있게, 그리고 재미 삼아 맞춰보는 것을 친숙하게 만든다면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을 터.
“해서 말입니다. 금 오십 냥만 저에게 투자를 해주시면…….”
“무슨 소리냐, 이게 다 네 돈인데. 이거 모두 가져가거라.”
설휘는 받은 돈을 전부 그에게 내밀었다.
송화는 그런 사부의 행동에 감동했는지 눈을 부릅뜨는 재밌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아, 그리고 사부. 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다시 표정을 고쳐잡고는 말을 이었다.
“요 며칠 전에 잠룡재(潛龍齋)라는 곳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왜 왔냐고 물으니 자릿세를 요구하더군요.”
“잠룡재? 거기가 어딘데?”
그 말에 음무기가 대신 답했다.
“이 근방에 자리 잡은 사파놈들이지요. 꽤 성격이 더러워서, 몇 번 마주쳤다가 도망간 적이 있습니다.”
‘도망갔다’는 말에 설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재차 물었다.
“규모는 어느 정돈데?”
“항주만 아니라 절강 일대에 꽤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숫자는 백 명 정도 되지만, 그건 지시를 내리는 수뇌부들이라고 합니다. 밑에 있는 잡놈들 합쳐서 천 명이 넘는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채를 쓰거나 밤거리를 다니지 않아서 그런가. 근래에 보기 힘들었는데, 생각해보면 중원 안에 사파놈들이 없을 리가 없다.
잠깐 고민하던 설휘가 이윽고 혼잣말로 말했다.
“그럼…… 돈은 많겠군?”
“…….”
“정파 놈들의 돈을 털면 공적으로 몰릴 수 있지만, 사파 놈들의 돈은 털어도 뒤탈 걱정이 없을 거고.”
“오히려 추앙받을 수 있겠지요. 저희 가게가 번창하는 데 이용한다면 매우 효과적일 거고.”
그때 송화가 끼어들었다.
“도둑놈들이니 영약이나 비급도 있을 테고.”
설휘가 다시 말을 받자.
“예쁜 아가씨도 있을 겁니다.”
음무기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잠깐의 정적.
그러다 동시에 침묵이 깨졌을 때는.
“치자꾸나.”
“칩시다.”
“치겠습니다.”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