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낯선 손님 (3)
따락. 따라락.
“밖에 누가 왔다고?”
일반적인 택사(宅舍) 방에서 한 사내가 주판을 튕기고 있었다.
행동대원들을 맞이하는 집무실은, 밖에서 보기에는 평범한 가정집 같았다. 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와 보면, 수많은 수납장과 벽에 반쯤 매립된 금고들 투성이였다.
사실, 이곳은 잠룡재의 수익을 모아두는 수금창고였기 때문이다.
“유적입니다. 수금과 관련된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아랫사람으로 보이는 이가 고개를 숙이며 고했다.
“수금과 관련된 이야기? 혹 생각보다 돈이 많이 걷힌 건가?”
대장 범달이 반색한 얼굴로 말했다.
오른쪽 뺨과 턱 부근에 큰 흉터가 나 있는 장년인.
그는 항주 북부와 동부 해안 쪽을 담당하는 잠룡재의 100인 중 하나였다.
“예. 소문을 들어보니…… 이번에 새로 자리한 무당 가게 하나가 그리 수익이 많이 나는가 봅니다. 며칠 전에 거기 접촉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범달 옆에 있는 무사가 말했다.
그 이름은 진소. 당장은 호위무사를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랫사람의 관리와 동향을 감시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그래. 들어오라고 해라.”
후다닥.
명이 떨어지자 하인이 급히 달려 나갔다.
그리고 곧 익숙한 두 명의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왔느냐.”
“예. 대장.”
유적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는 당연히 역용술로 변장을 한 설휘였다.
“그래, 아직 수금 날짜가 다 돌아오지 않았는데 무슨 상의할 게 있어서 왔느냐? 혹시 사람을 붙여줄 일이 생겼느냐?”
범달이 눈을 번들거리며 물었다.
잠룡재는 전형적인 사파의 집단으로, 항주의 상권을 돌며 자릿세를 걷는 조직이다. 헌데 돈 되는 일이 대개 그렇듯,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자릿세를 내라고 하면 돈으로 고수들을 고용해서 방비하기도 하고, 혹은 안면 있는 무사들을 초청해 땡깡을 부리기도 한다.
그래서 힘이 부칠 땐 범달에게 직접 보고한다. 그것이 그의 역할이다.
“사람을 붙여줄 것까지는 아니고…….”
설휘가 짧게 읊조리듯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문 앞에 서 있던 권람으로 위장한 음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 오면서 쓰러트린 왈패 외에, 주변에 다른 인기척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응?”
“사부?”
덕분에 범달과 진소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둘이 언제 사제관계를 맺었던가? 하고 생각하는 차에.
“그럼 시작하면 되겠군.”
설휘가 한마디 하고 삽시간에 신형을 감췄다.
물론 범달의 눈에 그리 보인 거지, 실제로 사라진 건 아니었다.
드득!
“큽!”
눈 깜짝할 사이, 범달의 뒤로 접근하여 목을 돌려버리는 설휘. 한 사람이 죽는데 이렇게 허망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이 새끼…….”
그 모습을 본 진소가 급하게 검을 꺼내들려는데.
콱.
음무기가 발을 내지르자, 뽑아 들던 검은 다시 검집에 들어갔고.
퍼퍽!
상단 중단을 연속으로 처맞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단 두 수. 음무기가 제압하는 데 걸린 시간은 촌각이었다.
“그거…… 내가중수법 아니냐?”
설휘가 감탄했다.
종리세가의 일을 해결한 뒤, 태극권에 대해 딱 한 초식을 가르쳐 준 적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배운 걸 바로 실전에서 펼쳐 보인 것이다.
“별로 어렵지도 않던데요, 뭘. 시체는 제가 한데 묶어 포대자루에 넣어놓겠습니다.”
“……그래. 나는 안을 살펴보겠다.”
“옙!”
두 사람은 손발이 딱딱 맞게 움직였다.
음무기가 준비해 온 긴 포대에 시체 둘을 집어넣는 동안, 설휘는 수납장과 벽면에 매립된 금고들을 하나둘씩 확인했다.
“이거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대체 뭘 숨겨놓았는지 보이는 수납장, 서랍장만 해도 열 개가 넘어갔다.
덜걱덜걱 문들을 열고 재화를 챙기고 있던 설휘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뭔가를 생각해냈는지 잠깐 눈을 감더니 두 손을 한데 모았다.
“이게 통할까…….”
온몸에 기를 끌어 올리며, 기감으로 주변의 물건이나 공간이 있는 곳을 탐색하는 설휘. 그가 손을 내뻗자.
[기류의 묘를 사용합니다.]
퍼퍼퍼퍼퍼퍼퍽!
사방에서 돈과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와…….”
포대자루에 노끈을 매고 있던 음무기가 감탄을 터뜨렸다.
대체 무슨 무공인지 수납장, 서랍장, 자물쇠로 채어진 목함이나 금고문 등 뭔가 잔뜩 들어 있던 공간들이 일시에 열리며 물품들을 쏟아낸 것이다.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해.”
설휘는 하하 웃었다.
우르르. 좌르르.
죄다 돈이다. 척 봐도 수백 냥의 금화가 쏟아져 나왔다.
[200G를 얻었습니다.]
[1300G를 얻었습니다.]
[300G를 얻었습니다.]
“새끼, 부자였네…….”
설휘의 손이 바빠졌다.
수금창고는 보물 천지였다.
어떤 곳에는 금원보가 굴비처럼 엮여 있었고. 어떤 곳에는 빼앗은 금붙이며 은수저들이 가득했다.
그걸 다 옮기기란 보통 일이 아닐 터였다. 무게는 둘째치고 부피도 만만치 않았다.
[4399G를 얻었습니다.]
[1711G를 얻었습니다.]
[612G를 얻었습니다.]
물론 설휘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구함을 보고 손만 가져다 대면 죄다 그 안으로 들어가며 돈으로 변했으니까.
[태청단(太淸丹)을 얻었습니다.]
“오호.”
이따금 영약도 있었다.
사실 약으로 보이는 게 십여 가지였는데 대부분은 그저 그런 금창약 수준이라, 그냥 글귀만 떠올랐다.
‘근데 태청단은 무당의 영약이 아닌가?’
잠깐 고개를 갸웃한 설휘는, 일단 도구함에 전부 집어넣고, 다른 것들에 시선을 두었다.
[육합권(六合拳)을 얻었습니다.]
[육합권(六合拳)을 익혔습니다.]
비급도 나왔다. 상승의 무공이 아닌지라 얻자마자 바로 습득이 가능했다. 이 역시 도구함에 모두 넣었다.
[군자산(君子散)을 얻었습니다.]
[학령초(鶴靈草)를 얻었습니다.]
“독도 있어?”
개중에는 독(毒)도 있었다. 나중에 쓰일 일이 있을 거라고 여긴 설휘는 그것까지 챙겨두었다.
그렇게 탈탈탈. 창고란 창고는 죄다 털어먹고, 남은 곳에는 먼지만 남았다.
“그 많은 걸…… 대단하십니다!”
“다 했냐?”
설휘가 묻자, 엄지를 치켜올린 음무기가 하하 웃었다.
“저야 뭐, 순식간이지요.”
투욱.
그가 빵빵해진 포대자루를 걷어찼다.
모든 것을 완료하기까지 고작 일각.
돈 되는 것은 다 챙겼고,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쿵쿵!
그때. 예상 못 한 기척이 와서 문을 두들겼다.
“아직 있느냐?”
“……!”
“……!”
설휘와 음무기. 둘은 당황했다.
돌발적인 상황. 그것도 반말을 하는 걸 보면 이곳의 상급자인 모양이었다.
“역용술 다시 해.”
“아. 옙!”
설휘는 이번엔 범달로, 음무기는 진소로 변했다.
두르륵.
그리고 포대자루에 담은 시신들은 한쪽 벽에 세워두었다.
“들어오시지요.”
덜컥.
설휘가 말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째진 눈에 매부리코. 딱 봐도 뭔가 사나운 인상의 장년인이 들어오며, 까닥. 하고 턱을 들어 올렸다.
“앞에 쓰러진 놈들이 있던데…… 어찌된 거냐?”
다짜고짜 반말. 따지는 어조로 물어오자 설휘는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음무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어깨를 으쓱하고 태연스럽게 둘러대는 음무기.
“아. 그게…… 죄송합니다. 소흥가에서 얻은 술을 한 병씩 줬는데 이놈들이 아침부터…….”
“허허허. 집안 참 잘 돌아간다. 정리 제대로 못 하지?”
비아냥대며 트집 잡는 말에 설휘는 애매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놈이 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우선은 범달인 척을 계속하는 것이다.
“됐고, 어서 갈 채비를 하거라.”
“예? 갑자기 왜…….”
“이놈. 정신을 어디다 두느냐! 강용(江勇) 어르신과의 약속을 잊어버린 게냐?”
데굴데굴.
설휘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음무기를 바라보자.
“아. 대감. 형님께서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27인이자 잠룡재 핵심인사 중 한 분이신 강용 어르신이 직접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다행히 그는 재깍재깍 적절한 답을 내어놓았다.
“정신머리 하곤, 참…….”
장년인은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그러다 뭔가 이상한 듯 다시 뒤돌아섰다.
“근데 너 목소리가 왜 그러느냐?”
“아. 예. 최근에 고뿔 때문에 좀 심하게 앓았습니다. 옆에 이놈에게 옮겼습죠.”
“……그래? 몸 관리 잘하거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그렇게 뒤돌아서던 그때.
“이보시오. 어르신.”
설휘가 불렀다.
“어. 어르신이라니. 감히 나를…… 헉!”
꿈틀. 하던 장년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느새 칼날이 자신의 목젖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저…… 사부님?”
“이놈. 일단 붙잡아서 토설시키자.”
음무기가 묻자, 설휘는 그의 목에 겨눈 칼을 까닥거렸다.
눈알을 데룩거리는 중년인, 그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
“……그러니까, 태청단을 들고 오라고 했다고?”
수금창고 바로 옆은 밀실이었다. 원래라면 창고로 쓰이는 곳에서 두 사람은 심문을 시작했다.
“예. 무당에서 매우 귀하게 여기는 거라, 비싸게 되팔 수 있다고…….”
눈치 빠른 범달의 상관. 녀석의 이름은 호요범(胡堯范)이라고 했다.
녀석의 말로는 무공이 강해서가 아닌, 강용의 직속 수하였기 때문에 서열이 더 높았다고.
처음에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네놈들 곱게 죽지 못할 거다! 등등으로 악을 쓰던 녀석은, 음무기가 손가락 몇 개 꺾어주기 무섭게 다소곳하게 변했다.
“그러니까 종합해 보자면, 범달이 양가보 사람들을 붙잡아 소지품을 털었는데, 그 와중에 무당파의 태청단이 나왔다고?”
“그렇습니다.”
음무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걸 왜 굳이 양가보에 되팔려는 것이냐? 귀한 거라면 더 높은 값어치를 주는 곳에 주지 않고?”
“……그게 다른 곳도 아니라 무당의 물건이라서 말입니다.”
녀석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태청단은 가치가 높은 영약이다. 제대로만 유통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건 다른 곳도 아닌 무당의 물건이었다.
소림과 함께 현 강호에서 쌍벽을 이루는 거대 문파.
그리고 잠룡재 역시 정보통을 운용하고 있었다.
그들이 듣기로, 이번 태청단이 엮인 일에 무당의 명진도장이 직접 하산했다고 한다.
사문의 영약이, 근본도 모르는 사파놈들 사이에서 거래가 된다고 하니 극대노했던 것이리라.
빠르게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한 개 조직이 아니라 잠룡재 전체가 와해될 수도 있어서 분주했다고.
“거 참. 아주 호랑이의 코털을 뽑았구나?”
“하하…….”
이야기를 들은 음무기는 혀를 찼고, 옆에서 듣고 있던 설휘는 흠 하고 턱을 쓸었다.
‘그때, 종리세가에서 만난 이가 무당의 인물이었는데…….’
대문파 출신이, 왜 그런 일개 세가의 비무대회에 참가했을까. 보통의 장로라면 그런 결정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무당파는 원체 큰 조직이니, 장로 중에서도 다소 서열이 낮은 사람이 그런 여비활동 정도를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보통의 물건이 아니구나.’
설휘는 도구함을 열어 태청단의 상세보기란을 펼쳐보았다.
[태청단]
설명 : 무당이 보유한 10대 보물 중 하나로 소림의 대환단에는 미치지 못하나 매우 귀한 물건이다.
효과 : 체력과 내공을 경우에 따라서 최소 3만, 최대 1000만까지 올려준다. 단, 최대치에 오르려면 내공을 소화할 수 있는 단단한 육체와 태극심법, 그리고 강한 정신이 필요하다.
“허어.”
자세히 보니 이거 그저 영약이 아니다. 이 정도면 거의 절대영약 수준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사부님. 어찌할까요?”
“음.”
음무기가 물어왔다. 설휘는 잠깐 고민하다 온몸이 줄로 묶여 있는 호요범 앞에서 몸을 숙였다.
“이거…… 거래하기로 약속은 되어 있는 거지?”
“그렇습니다.”
“거래 장소가 어딘지 알고 있나?”
“예? 그게…….”
잠깐 묻자, 음무기가 되물었다.
“사부님. 어찌하시려고요?”
“직거래하려고.”
“아.”
음무기는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동시에 얼굴이 굳어졌다.
“무당파를 직접 상대하시려고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왜? 명진도장이란 자가 그리 강하냐?”
“모르십니까? 무당파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절대고수입니다. 들리기로는 화경에 올랐다는 소문이 있고요.”
“화경?”
그 말에 설휘의 잠깐 침묵했다.
고작 단환 하나의 추적에 화경의 고수가 나선다라?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만했다.
이 태청단이라는 약은, 그동안 보았던 영약 중에 제일이었으니까.
“기회로군. 이참에 태극혜검을 견식할 수 있겠다.”
“사, 사부님?”
음무기는 질색했지만, 설휘는 머리가 훤히 트이는 기분이었다.
태청단. 태극혜검. 무당파의 세 손가락에 드는 고수.
셋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이 정도면 굳이 비급을 받을 필요 없었다.
바사삭.
한지에 잘 포장된 태청단.
껍질을 벗겨보니 과연, 신묘한 향기가 피어오른다.
‘사문의 기보인 태청단을 돌려주면서 친선 비무 정도를 청한다라…….’
그러면서 상대를 자극해서, 태극혜검의 모든 초식을 쏟아내게 만든다면.
일단 경험하기만 하면 태극혜검의 묘리가 머릿속에 들어올 테니까.
“기왕 훔친 김에 더 큰 걸 훔쳐야지.”
두둑하게 한몫 잡을 생각으로 설휘의 표정은 밝아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