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백대고수 (2)
“그래도 영 쓸모없는 녀석은 아니었군. 굳이 여기저기 찾아다닐 수고는 덜었으니.”
도효이굉. 그중 형인 도토(陶土)는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는 낭인 중에서도 몸값이 높았다. 그 때문에 자신들을 불러주는 횟수가 뜸했는데, 간만에 일거리가 생겨 큰돈을 당기게 됐으니 얼마나 기쁜가.
“새로 연마한 기술을…… 드디어 실전에 사용해 보는구나.”
그런 도토보다 한 살 어린 결효(潔曉)는 의욕으로 불타고 있었다.
키는 고작 오 척. 하지만 들고 있는 병기는 척 봐도 괴랄하기 짝이 없었다.
건곤조구권.
얼핏 보면 쟁반이나 륜의 형상을 띤 이 병기는, 본래 천축에서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특수 병기였다.
사납게 회오리치며 날아가는 이 무기는, 중원만이 아니라 마교에서도 사용하는 자를 보기 힘들 정도로 희귀한 것이었다.
건곤권은 적아를 가리지 않았다. 오직 비전법(秘傳法)을 전수받은 자만이 자신의 병기에 상처를 입지 않고 다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네놈들은 또 뭐냐?”
음무기는 갑자기 나타난 두 남자를 보고 경계하는 눈빛을 내비쳤다.
조금 전 이놈들이 위천을 죽일 때 쏘아낸 암기술. 그건 일반적인 암기처럼 직선으로 쏘아낸 게 아니라, 하늘로 치솟았다가 내리꽂혔다.
회선표처럼 방향을 바꾸는 암기만 해도 보통이 아닌데, 아예 곡사로 인명을 격살한 것을 보면 활이 아닌 이상 상당한 실력이었기 때문이다.
“흠. 우리가 누구인가 말하자면, 잠깐 그전에…….”
반들반들한 민머리를 한 도토. 그가 흉악하게 날카로운 자파를 세워놓고는 품에 손을 넣었다.
스윽.
가슴에서 나온 손. 그 손가락 마디 사이사이에는 비수가 잡혀 있었는데, 그는 이내 금을 튕기듯 한 동작으로 허공에 그것을 흩뿌렸다.
그리고.
“컥!”
“윽!”
“헉!”
“큭!”
아마도 같은 편. 위천과 함께 왔던 호위무사들이 짤막한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신출귀몰할 정도로 놀라운 암기술. 아무런 적의도 살기도 비치지 않고 네 사람을 처죽인 민머리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무기가 꽤 특이해서. 괜히 남에게 내 장사 밑천을 보이는 건 하고 싶지 않거든? 뭐, 이건 그쪽도 포함이야.”
“…….”
“듣고 곧 죽을 몸이지만, 우리 이름부터 밝히지. 나는 도토라고 하며, 이 아이는 결효다. 강호에선 우릴 가리켜 도효이굉으로 부르더군.”
“……어? 도효이굉?”
뭔가 귀에 익은 이름이라 음무기가 반응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대고수! 맞지?!”
“맞아, 잘 아는구나. 우리는 백대고수다. 견문이 제법인데?”
음무기의 말에 얼굴이 밝아진 결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이 단순한 건 서로 닮았다고 해야 하나?
사박사박.
삼 장. 그 정도의 거리 정도를 두고 설휘가 음무기 옆으로 다가왔다.
“잠룡재에서 보냈나?”
설휘의 말에 민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이 우리 고용주지.”
“무슨 용무로?”
“알잖아? 태청단이라고 하더군. 그걸 받으러 왔지.”
“흠.”
어느새 진지해진 설휘는 둘을 둘러보았다.
자파와 건곤권.
엔간히 강호에서 굴러먹은 사람도 몇 번 못 봤을 정도의 기병이다. 기병의 강점은 낯섦. 어떤 식으로 어떻게 공격해 올지 도무지 예측이 쉽지 않은 부분이다.
“음무기.”
“예. 사부.”
“너는 저기 동생이란 놈을 맡거라. 말하건대, 전력을 다해서 상대하도록.”
“……그 정도 상대로는 안 보이는데요?”
“그렇게 보인다면 더더욱 조심해야겠구나.”
음무기가 어깨를 으쓱하자 설휘는 진지하게 고개 저었다.
“저토록 기괴한 병기를 들었는데도 걸음걸이가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신검합일처럼 완전히 몸에 병기가 익었거나, 내공이 너보다 위라는 뜻이겠지.”
“음…….”
음무기의 얼굴이 그제야 굳었다.
생각해 보니 상대는 강호 백대 고수.
이제껏 만났던 어중이떠중이들과는 격이 다른 인물일 것이다.
“태청단…… 그거 내가 가지고 있지. 그런데 날 쓰러트려야지 받아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설휘는 둘을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거 참 간단하구만.”
도토가 옆으로 시선을 보내자 결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은 제게 맡겨주시죠. 야.”
그는 음무기를 향해 까닥까닥 손가락질을 했다.
“너는 나와 나가서 싸우자. 여긴 좁다.”
“그거 좋지.”
음무기가 동의했다.
그렇게 둘이 벗어나자, 장내에는 설휘와 도토 둘만이 남았다.
***
“자아. 그럼 오늘의 의뢰금 양반, 시작하실까?”
도토는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는 몇 번의 연승으로 얻은 자만심 같은 게 아니었다. 사실 그는 모든 무인을 존중했다.
그랬기에 무공 수련이든 대련이든 매번 필사적이었고, 그런 경험과 노력으로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지. 나도 가끔 궁금했거든.”
도토를 보며 설휘가 우득, 손목을 꺾었다.
“백대고수. 강호의 수많은 고수들 중에서 상승의 경지에 올라있는 이들.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인 건지, 오늘로써 알게 되겠군.”
“…….”
철컥.
설휘는 검을 꺼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목을 세웠다.
꾸깃.
그와 함께 돌변한 기세에 도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앞의 사내는 뭔가 좀 이상했다.
키만 멀대같이 큰 사내. 척 보기엔 볼품없어 보이는 외견일진대, 이상하게도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먼저 공격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안 오나? 그럼 내가 먼저 갈까?”
“……나부터 가지.”
도토는 꺼림칙한 기분을 애써 지워버리며 병기를 고쳐 잡았다.
‘간단히 부딪치며 능력을 좀 알아봐야겠군.’
서서히 내기를 끌어올리던 그의 눈빛이 변했다.
이제껏 유들유들하던 것이, 살벌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츠측.
보폭을 크게 내딛던 그의 신형이 삽시간에 앞으로 쏘아졌다.
뒷발이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설휘의 코앞에 당도했다.
그가 익힌 것은 바로 일류보(一流步). 다리만 보면 언제 튀어나가는지 움직임을 알 수 없는 보법이었다.
패애액!
그렇게 상대의 지척까지 다가간 도토는, 금전자파로 설휘의 우측 어깨부터 좌측 허벅지까지를 반듯하게 그었다.
‘짧다!’
하지만 도토는 실패했음을 느꼈다.
이미 병기를 내려칠 때부터 상대가 반응하며 몸을 뺀 것이었다.
휘이잉!
허공만 갈랐다. 하지만 상황은 선공을 펼친 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모름지기 물러서는 발은 쫓아가는 발을 떨쳐낼 수 없는 법.
“하압!”
쇄액! 쇄애애—액!
도토는 이번엔 횡으로 틀며 갈 지(之)자로 베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짧았다. 설휘는 딱 반발치 뒤로 물러나며 그의 공격을 피해냈다.
지이이잉.
“……?”
허나, 피해냈다지만 그의 공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도토의 자파가 번쩍하더니, 병기 끝에서 십(十)자 모양의 검기가 회전하듯이 쏟아져 내리꽂혔다.
‘……넓다!’
도토라는 자, 역시 내력이 심후한 고수였던 것일까. 뿜어내는 기공의 범위가 굉장히 넓었다.
쿠아아앙!
바닥에서 흙먼지가 치솟고, 외벽이 굉음을 지르며 무너졌다.
가공할 만한 내공의 발출이었다. 가로막는 것은 모조리 부숴버리는.
휘르르륵.
흙먼지가 사라지며 설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옷자락이 몇 가닥 잘려나가 있었다.
“이거…… 제법이구만.”
도토의 내기 발출은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그 활용도가 기상천외했다.
“한 번 쏘아낸 검기의 형태를 다시 변형시키다니. 과연 백대고수란 말이 이름뿐은 아닌 것 같군.”
“……그걸 피한 당신도 보통은 아닌데.”
도토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껏 웬만한 놈들은 방금의 이 수법, 금전자파의 내기에 죄다 쓸려나갔다.
그걸 고작 옷자락 몇 군데만 베이며 피했다는 건, 충분히 상대할 실력이 된다는 뜻이었다.
“한 번 받았으니…….”
설휘는 다시금 검을 고쳐잡고 말했다.
“이번엔 내가 가지.”
툭. 툭 툭.
자리에서 한 번, 또 한 번 뛴 설휘.
파앗.
그는 일순간 사라지듯 이동했다.
바닥에 닿기 전에 움직인다는 귀영신보.
마교 칠사자의 독문무공이었다.
“무엇!”
당연히, 움직이는 시작점을 제대로 파악 못 한 도토는 반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섬광처럼 내지르는 설휘의 검로에 자신의 금전자파를 가져다 댔고.
카드득!
그 방어가 역공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어?!”
설휘는 조금 놀랐다. 놀랍게도 검이 상대의 장병기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사삭!
그런 와중에, 놈은 익숙한 상황인지 빠르게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촤차락!
그리고 나타난 한 줌의 비수들. 흡사 송곳처럼 얇고 날카로운데, 그 끝은 색이 바래 있었다. 척 보아도 위험한 독인 것 같았다.
“길게 끌건 없겠지?”
파아아아앗!
설휘의 검이 아직 엉켜있는 상황에, 도토는 운지법처럼 손가락을 튕기며 암기를 뿌렸다.
쏴아아악!
십여 개의 비수- 장침에 가까운 가느다란 바늘 같은 암기가 설휘의 얼굴부터 허벅지까지 쭉 흩뿌려졌다.
지근거리에서 쏘아진 암기. 도저히 피할 수도 방어할 수도 없는 회심의 거리.
“……뭐?!”
헌데 막 암기가 몸을 꿰뚫는 순간, 도토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코앞에 있는 신형이 갑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여섯 사람으로 불어나 버린 것이었다.
슈슈슈슈슉!
극독이 묻은 날카로운 바늘은 더없이 허공을 스쳐 지나갔고, 여럿으로 갈라진 몸은 이내 하나가 되었다.
하나가 된 몸의 위치는, 도토의 등 뒤였다.
“다시 위기로군.”
“크악!”
설휘의 검이 도토의 아래로 그어지는 순간, 흰빛이 아로새겨졌다.
***
콰드득!
도토는 한쪽 팔을 내어주며 간신히 물러섰다. 그런 그의 낯빛은 잔뜩 흐려졌다.
“이, 이건……?”
베이지도 날아가지도 않았다. 전신 내공을 격발시킨 덕에 어떻게든 막아냈다.
찌르르륵.
하지만 공격을 받아낸 신체의 일부가 얼어버린 것이다.
냉기가 실린 상대의 일격.
물리적 공격뿐만 아니라, 빙결의 기운이 자신에게 투사가 되어 한쪽 팔이 꽁꽁 얼어붙은 것이었다.
“대단치 않은 빙공이야. 그래도 좋은 반응이군.”
설휘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지만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분명 등 뒤를 잡았고, 일격에 끝날 상황이었는데, 상대는 극히 짧은 찰나에 몸을 횡으로 비틀어 최소한의 손실만 입은 것이었다.
‘신병이기인가?’
다시 보니 상대가 든 무기, 거대한 밤송이 같은 자파가 띤 기운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설휘가 가진 풍운극마검과는 조금 달랐다.
방향 전환으로 무한대로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내기를 발산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공능을 보였다.
쩌저저정 콰가각!
그렇게 관람하던 중, 도토의 얼어붙은 왼팔이 얼음결정을 깨트리며 본래대로 돌아왔다.
이 또한 의외. 내력으로 얼음을 녹이거나 힘으로 뚫은 것이 아니다. 진신 내공과 상관없는, 이상한 이력을 느꼈다.
“너, 마지막에 불어난 거…… 환영이었나?”
도토가 설휘의 신법에 대해 물었다. 완벽하게 당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럼 환영이지, 실제겠냐?”
설휘의 대답은 그러했다. 사실은, 그저 환영이 아니라 실체로도 펼쳐낼 수 있기는 했지만.
“방금 그 팔…… 예사롭지 않군. 혹시 신병이기를 두르고 있나?”
이번엔 설휘가 물었다.
“당연하지. 어디 팔뿐일까. 이 안에도 있지. 그리고 신발도 있고.”
도토는 자신의 장삼을 펼친 뒤 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발?”
설휘는 그의 몸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고풍스러운 남색, 거기에 수놓아진 은빛이 보였다.
“돈도 많군. 신병이기로 온몸을 두르다니.”
내공도 준수하고, 엔간해선 보기 힘든 기병을 든 데다, 지근거리에서 쏘아대는 암기술도 일품이었다.
그런 녀석이 온몸에 신병이기를 둘렀으니, 백대고수라 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야 제대로 싸워볼 만한 상대를 만났구나.”
“제대로? 기가 차는군.”
갑자기 도토가 의지를 다지듯 말하자, 설휘가 비웃었다.
촤르르륵.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금전자파를 내밀었다.
“내가 가진 것 중에 이 무기가 제일이지. 한번 경험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스으으으.
기운이 뻗어 나오자 설휘의 눈이 커졌다.
“뭐, 뭐야! 강기?”
실력을 잘못 보았던 것일까.
그의 기감에 상대는 분명 화경에도 오르지 못한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런데도 눈앞에 휘황하게 돋아난 것은 틀림없는 강기.
그렇다면 문제는 바로, 상대의 병기였다.
“하핫. 상대를 잘못 골랐단 생각이 들지?”
도토는 자신감이 차오를 대로 차올라있었다.
그가 든 금전자파는 강호 십팔대 기물 중 하나로, 내력을 집중시키면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의 공능을 보일 수 있었다.
더욱이 자파라는 기병의 특성상, 일격에 광범위하게 기운을 뿜어내는 효과도 있었다.
“이건 애초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운이다. 덧없는 저항을 내 눈으로 지켜보마!”
우우웅!
그 말을 끝으로 금전자파에서 생성된 강기가 설휘에게로 쏘아졌다.
미(米)자 모양으로 휘어지는, 이전보다 더욱 촘촘하고 광범위한 공격이 펼쳐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