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급변하는 정세 (3)
“사부님. 보고 싶었습니다!”
그날 밤 새벽.
송화에게 전갈을 받고 달려온 음무기와 조우했다.
그런데 보자마자 울먹이며 껴안으려 드는 과한 환대라, 설휘는 그에 살포시 발을 걸어 넘어트리는 것으로 그 마음에 답했다.
와당탕! 벌떡!
그리고 넘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오똑 일어나는 음무기.
“오호. 이놈 무공이……?”
헌데 그 움직임에 설휘는 놀랐다.
스스로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고 느끼기 무섭게, 바로 몸을 굴리며 한 발을 뻗어 일어나는 음무기.
그 움직임은 경쾌했고, 너무하다는 듯 축 처진 눈에 갈무리된 안광은 이전보다 몇 배나 심후해져 있었다.
“상당한 성취가 있었구나.”
“예……. 뭐, 사부님이 안 계신 동안 수련을 좀 했습니다.”
“은영단의 독문무공?”
“그것도 있고, 사부님께서 전에 제게 가르쳐주신 무공, 그리고 전 사부인 백혼 장로께서 하사한 무공도 함께 연마했지요. 하다 보니까 연관성 같은 것이 있더군요.”
“하…….”
설휘는 속으로 매우 놀랐다.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그것도 고작 일 년 동안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다는 건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음무기가 천재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그는 초마의 반열에 올라선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마공을 이토록 완벽히 갈무리할 수는 없었을 터.
“그런데…… 어디 가십니까?”
송화가 바리바리 짐을 싸서 포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음무기가 물었다.
“좀 먼 길을 떠나야 하게 생겼다.”
“어디로 말입니까?”
“사람이 없는 곳으로.”
“……?”
영문을 모르겠다는 음무기.
설휘는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손짓했다.
“자. 짐을 싸거라.”
“저도요?”
“그럼, 너 혼자 여기 남을 셈이더냐?”
“……!”
설휘의 말에 음무기는 홱! 소리 나게 표정이 변했다. 그러고는.
“자리 정리 좀 하고 오겠습니다! 한 시진만 주십시오!”
“이 녀석아. 그렇게나 끌 수는 없…….”
“그럼 그냥 갑니까? 지금 제가 있는 자리, 죄다 금 밭이란 말입니다!”
“하긴…….”
이것만큼은 설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폐관 수련을 한 1년 동안.
“저도 잠시 정리를 하고 오겠습니다. 전표를 금자로 바꾸어야지요.”
“그, 그래…….”
제자들은 착실하게 속세의 돈 버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
첨벙. 촤아아악.
사람과 짐을 실은 배가 항구로 몰려들고 있었다.
해남의 작은 포구. 단출하며 조용하던 이곳은 요즘 들어 매우 붐비고 있었다.
평소라면 어선이나 내지로 이어지는 교역선이 드나들던 곳.
웅성웅성. 와글와글.
그랬던 곳이 사람으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최근 소문이 흉흉하더니…… 정말로 중원에 마인들이 설치나 보구나. 피난민이 저리 많은 것을 보니.”
항구를 관리하는 책임자이자, 해남파 무인인 청운(靑雲)이 혀를 찼다.
“중원 무림도 실상은 별거 없나 봅니다.”
그 옆에서 사제 청표(靑慓)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고작 마인들을 감당 못 해서 이렇게 난리 아닙니까? 평소에는 벽촌이니 새외니 하며 우습게 보더니…… 이런 때만 해남파의 그늘을 찾는군요.”
해남파.
이름처럼 해남에 위치한 검도 무문. 구대문파 중 한 곳으로, 거친 바다의 기상을 담은 특색 있는 검술을 발전시킨 곳이다.
이곳의 장문인은 화경의 고수 묵양천(墨陽天)인데, 자그마치 천하 십대고수로 거론되는 이였다.
십대고수.
상황에 따라 서로 싸움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단번에 천하제일 고수로 올라설 수 있는 무인들.
장문인이 그중 하나로 이름을 올리고 있기에, 해남파의 제자들은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사형. 저기 저거…… 장강에서 오는 배입니다.”
땡땡땡! 땡땡땡!
종을 치며 접현하는 커다란 배. 사람을 가득 실은 상선의 배는, 곧 천천히 접현해서 물건과 사람을 쏟아냈다.
“가자.”
처벅. 처벅.
청운의 손짓에 따라, 해남파 문도 십여 명이 나섰다. 그들은 이제 막 내린 사람들의 앞을 막아섰다.
“여어…… 모두 여기 서시오. 해남파 장문인의 명으로, 혹 불순한 사람이 있는지를 검문하겠소. 다들 한 명씩 협조해 주시오.”
찰칵. 찰칵.
말은 정중하지만, 동시에 칼집을 움켜쥐는 해남파의 무인들. 그 일사불란한 동작에 사람들은 소란 피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줄을 지어 섰다.
“출신이 어디인가? 총 몇이야?”
“여기엔 얼마나 있을 예정이고?”
해남파 제자들이 특히 신경 쓰는 것은, 피난민으로 유입되는 유민. 다르게 말해 거지였다.
중원의 다른 대문파들과 달리, 해남파는 이 일대의 관부와 협조해서 치안을 도맡는 처지였다. 때문에 돈 한 푼 없이 흘러들어오는 유민들은 심히 경계했다.
“여비도 없어? 이 사람, 대체 무슨 생각인가?!”
“해남이 어디 자네들 먹여 살리는 구호소인 줄 아나!”
해남파가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인 생활력도 없는 유민들은, 삽시간에 좀도둑이나 거지가 되기 쉽다.
당장 사정이 딱해 보인다고 적당히 넘어갔다간, 보름도 안 되어 굶주리다 못해 강도로 돌변한다.
“연고지도 없어? 숙박비는? 이 사람들 안 되겠군!”
“노역소로 보내! 자네들은 앞으로 보름간 배를 타고 고기를 잡게 될 거네. 뭐? 배운 적 없어? 누군 나올 때부터 배우고 나왔나!”
해남파의 제자들은 온정이 오히려 악한 결과를 낳는 것을 여러 번 보곤 했다. 하여 이재민들이 몰려오면 초반에 기선을 잡으려고 했다.
버럭버럭 고함도 지르고, 엄포를 놓기도 하며, 그나마 한 달 정도 숙식이 가능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걸러 낸다.
이마저도 길게 보면 부족함이 있지만, 해남파가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인근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나서고 있을 뿐, 그들은 무림인이지 관인이 아니었다.
“명부에 이름을 적게. 이름이 뭐라고?”
“고. 준. 명입니다. 여기…….”
“음?”
그렇게 한참을 걸러내던 중, 어색한 조합의 일행에게 시선이 멈추게 되었다.
청표가 붓을 든 청년의 손을 보고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가볍게 뒤틀린 손가락 변형. 그리고 굳은살.
“자네, 무공을 익혔는가?”
전형적인 무인의 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소.”
질문 받은 이, 음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남에는 무슨 일인가? 요즘처럼 하수상한 시절에, 외지의 무인이 들어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나?”
청표가 대뜸 눈을 부라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떤 의미냐니, 그게 무슨…….”
난데없는 시비에 음무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르신. 그분은 저의 호위무사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송화가 빠르게 다가서며 말했다.
“……너는 누구냐. 호위무사라니?”
“항주에서 작은 점집을 하며 산대나 놀리던 몸입니다. 마인들을 피해 몸을 옮기는데, 아무래도 시절이 하수상하여 무예가 뛰어난 분을 한 분 모셨습니다.”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청표는 옆에 선 멀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그마한 아이 하나에, 영 허약해 보이는 길쭉이 하나. 몸 지켜줄 무인을 고용하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흠, 점술사라고? 여기 이 아이를 아는 사람이 있나?”
물었더니 대뜸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본인 말과 달리 꽤 유명한 점쟁이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 생활할 돈은 있고?”
“부족하나마…….”
차륵.
송화가 주머니를 열어 보였다. 금자가 30냥이나 들어있는 묵직한 돈주머니.
청표는 이 정도 돈이면 아예 터를 잡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됐으니 가봐라. 그리고 돈주머니는 함부로 남에게 보이고 다니지 마. 죽고 싶으냐?”
“아……. 예, 감사합니다.”
송화가 당황하며 급히 웃어 보였다.
태도는 분명히 흉악한데, 내용은 이리저리 따져보면 걱정해주는 것이었으니까.
고마워진 송화가 슬그머니 돈을 찔러주려고 내밀자.
“저기, 부족하나마 술값이라도…….”
“일 없다. 다음!”
해남의 제자는 가차 없이 밀어내고 코웃음을 쳤다.
***
“돈으로 인성을 검증하다니. 참 삭막한 곳이군요.”
해남도에 잠시 머문 설휘 일행은, 먼저 산중으로 올라갔다. 적당히 인적이 드문 곳에 살 곳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던 것이다.
“딱히. 우린들 안 그렇더냐. 돈 대신에 무공으로 충성을 검증하는 곳이었는데.”
“……그건 또 그렇군요.”
한나절을 설렁설렁 돌아다닌 끝에, 집으로 삼을 곳을 정했다.
밤이 오길 기다려 간단한 야영을 했다.
설휘는 수련을 위해 잠깐 어디론가 사라졌고, 음무기와 송화는 모닥불 앞에 모여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래도 해남은 그럭저럭 살 만한 곳인 것 같네요. 돈이 없으면 일자리도 소개해 주니까.”
“흥. 대신에 엄청 떼어먹을 거다, 이것저것 명목을 달아서. 정파라는 놈들이 그래.”
음무기가 콧방귀를 뀌자, 송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파가 아닌 곳은 더하지 않습니까.”
“……그건 또 그러네.”
송화가 둘러서 마교를 언급하자 음무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은 해남으로 오는 길에 무수한 피난민들을 보았다. 대부분은 마인을 직접 본 적 없이, 막연히 두려워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개중에 실제로 마인의 난동을 코앞에서 본 이도 있어, 슬그머니 증언도 들었다.
수는 적었지만, 그들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이성을 잃고 사람의 얼굴을 뜯어먹는 마인이라니……. 대체 어떤 무공을 익힌 건지.”
기본 무공이 마공인 음무기 역시 사태를 심각하게 보았다.
보통 저런 광마는 마공을 익히다 미치거나, 진원진기를 쓰려고 사혈을 찍다가 부작용으로 발생하는 경우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방에서 출몰하는 것이 죄다 광마인 걸 보면……. 이건 마교에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덕분에 중원에는 마교라면 겁부터 먹는 분위기가 생겨났고.
“화산파 놈들만 신이 났겠군. 듣자 하니 화산파에 입문하려는 지원자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고 있다던데.”
“전부 사부님 말씀대로입니다. 덕분에 무당파와 소림사가 욕을 먹는 경우도 다 보는군요.”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의 활약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들 역시 상시 눈을 부릅뜨고 접경지대를 살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잣거리나 민가 근처에 마인들이 나타나 난동을 부리는 경우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마침! 화산파가 나타나서 처단했다.
덕분에 강호고 중원이고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산파의 덕을 칭송했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 힘쓰겠다는 의협심 강한 젊은이들이 모두 화산파로 몰려가고 있다고 했다.
“그건 그렇고…… 좀 신기하군요.”
“뭐가?”
“오늘 점심쯤에 검문이 있지 않았습니까. 해남의 제자들이면 상당한 실력자들인데……. 어찌 형님만 붙잡았을까요?”
송화는 그 부분이 의아했다.
사람들을 검문하는 해남파 제자들은, 음무기와 설휘가 같이 있었음에도 오직 음무기만을 문제로 삼았다.
설휘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분명 무위나 경지는 설휘가 훨씬 더 높은데 말이다.
“그게 뭐가 신기하냐. 간단하잖아.”
음무기는 심드렁하게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사부가 범인의 수준을 넘어섰으니까, 웬만한 고수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거야. 상대를 볼 줄 아는 것도 능력이거든.”
“그래요?”
“그래. 내 무공 성취를 딱 보자마자 알아본 것도 그렇고……. 내 생각에 사부님은 이번에 큰 벽을 넘으셨어.”
“큰 벽이라면, 설마……?”
말끝을 흐리는 송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며 음무기는 씨익 웃었다.
“그래. 극마에 오르셨다.”
극마.
마인들 모두가 꿈꾸는 경지를 입에 담으며.
***
휘이익-! 휘익!
멀리서 밤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설휘는 험한 산세의 한 중턱에서 가부좌를 틀고, 그 새가 정확히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느꼈다.
‘기감의 확장이 어마어마해졌다.’
이제껏 여기까지 오면서도 느꼈지만, 확실히 이전과 여러모로 달라졌다.
주변 동물들의 움직임만이 아니라, 곤충들의 움직임까지 느껴진다.
왜 이렇게 민감한 걸까.
밤이 되면 좀 잦아들 줄 알았더니, 오히려 더욱 뚜렷하고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세세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이 있었다.
‘왜 화경이 아닌 극마인 걸까.’
설휘는 그동안 계속 생각해보았다.
분명 초마의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자신의 내기 자체는 마(魔)보다 정(正)에 가까웠다.
거기에 태극의 힘으로 두 기운을 합일시켰으니, 원래라면 화경에 오르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아닌가. 애초에 몸에 머문 기운, 그리고 운용도 정보다는 마에 가까워서일지도…….’
소신수마공, 화온마공, 그리고 사대극마공까지.
태극의 힘을 빌렸다곤 하지만, 설휘의 근원 내공은 모두 마기를 띠고 있었다.
뭐, 그런 것도 어쨌든 극마에 오르고 나니, 사실 따져봤자 무의미했다.
극마.
마를 극복하는 것.
신체의 마기를 갈무리하는 것을 넘어, 기운 자체도 정순한 기운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더 이상 마에 침범당하거나 폭주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군. 그럼 직접 해 볼까…….”
설휘는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지가 상승하면 자동으로 뜨던 특수 기술의 설명.
그게 왜 지금은 나오지 않는지 살펴봐야 했다.
처억.
설휘는 한쪽에 놓아둔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머릿속으로 소신수마공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