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다른 미래, 다른 결과 (4)
한 달, 또 한 달.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수하들은 제각기 잘 적응하고 있었다. 외딴섬인 해남도에서도 자신들이 할 일을 찾았다.
덕분에 설휘는 수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일단 극마에 오르고 나니, 세상 만물이 새롭게 다가왔다.
몸의 상중하. 세 단전을 동시에 운기하다 보니, 무예도 강해지고 생활도 충실해졌다.
덕분에 하루하루 지내는 시간의 밀도도 높아졌다.
외부의 변화는 변화대로 적응해야 했고, 또 몸의 변화에 맞춰 적응할 시간이 필요로 했던 것이다.
스으으으.
설휘는 슬쩍 한 손을 들며 몸속에 흐르는 내기를 끌어올려 보았다.
쩌저저적.
바짝 마른 논바닥의 진흙 덩어리들이 둥둥 떠올랐다.
허공섭물.
내력으로 사물을 떠올리고 움직이게 만드는 능력.
술법이나 도술 쪽에서는 염동력이라고도 칭하는 신통력인데, 극마에 오른 후 조금만 생각을 집중하면 이런 힘을 쓸 수 있었다.
뜨끔뜨끔.
다만 아직 익숙한 것은 아닌지라, 곧바로 머리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후우.”
설휘는 다시 몸에 힘을 뺐다. 그러자 몸을 타고 흐르는 기류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흙은 다시 가라앉았다.
“이게 극마의 수준이라니…….”
기(氣).
보통 내기를 모아, 외부로 분출하는 기공 발현. 그 힘을 운용할 수 있는 수준만 되어도 강호에서는 초일류라 부른다.
저잣거리에 흔한 검문(劍門)을 찾아가 보면, 거기서도 한두 명 정도는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내기를 능히 적절히 다를 줄 알면 절정이라 하고, 기(氣)를 완숙 단계의 수준에 이르거나 한 차원 높은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초절정으로 구분한다.
이를테면 검기 다발이나, 검기를 응축시킨 검탄(劍彈)이 그것이다. 이 정도 수준은 일반적인 검문에선 쉽게 볼 수 없었다.
특히 검기를 자유자재로 펼치는 수준을 넘어 초검기(超劍氣)나 준강기(駿罡氣)를 사용하는 건, 위세가 큰 검문이나 도문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보통 이 경지를 정파에서는 입신, 마교에서는 초마라고 한다.
설휘는 그 수준을 뛰어넘었다.
상단전이 개입하는, 검강을 자유자재로 뿌릴 줄 알게 된 것이다.
재밌게도 설휘의 문제는 이곳에서 발생했다.
“이 이상 나아갈 방향을 알 수가 없구나.”
벽을 넘고 극마의 단계에 들어와 보니, 이제껏 마주하지 못한 바다를 본 기분이었다.
더없이 활개를 칠 너른 공간이 주어졌지만, 역설적으로 그 너른 공간을 넘어 더 높은 경지로 오르는 길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극마는 총 3단계로 나뉜다고 했다.’
사대극마공에 나와 있는 내용에 따르면, 극마는 모두 초입(初入), 통달(通達), 극의(極意) 단계가 있다고 했다.
처음엔 이 의미가 무언지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니 대충 감은 잡을 수 있었다.
과거 은둔고수였던 민머리 왕모력.
그의 수준은 자신이 만난 다른 화경과 극마에 비해 부족함이 있었다.
아마도 딱 그 정도가 극마의 초입이었던 것이리라.
설휘는 다음으로 구종명을 떠올렸다.
‘그를 극마로 치면 통달의 단계에 올랐을 터.’
모든 움직임, 판단, 검술을 떠올려보면 쉽게 짐작이 된다.
왕모력과 비교해보았을 때 그보다 몇 배는 빨랐고, 몇 배는 강했고, 몇 배는 능숙했다.
떠올려보면 이제자의 수하 유패가 그쯤이었던 것 같았다.
‘그럼 일제자도 통달 수준이려나?’
거기까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설휘 본인이 이제 막 극마에 들어선 데다, 애초에 유패나 살마의 무위를 직접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극마고수가 죽었다고 하던데……. 그건 유패였을까?’
곤마가 함께 죽음으로 끌고 들어간 이제자의 수하들이 떠올랐다.
딱히 나쁘지 않았던 인연. 하지만 알 길이 없었다.
그가 어찌 되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려면 본교로 다시 들어가야 했으니까.
저벅저벅.
잠깐 머리를 식히기 위해 산길을 걸었다.
높은 산도 아니고 비탈길도 적어,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한 지점에서 설휘의 걸음이 멈췄다.
휙! 휘익!
한 공터에서 수련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여기가 소령의 수련장이었구나.’
어째 수련 중에 좀처럼 마주치지 않는다 했는데, 이제 보니 이곳에서 주로 개인 수련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열심히 검을 휘두르며 무념무상에 빠져 있었다. 도도하게 흐르는 검법의 움직임은 그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그것보다 정작 설휘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필 그때…….’
벌써 몇 달 전의 일이다.
꿈 얘기를 할 때였는데, 그때 너와 같은 곳을 보는 것이라고 말을 했다.
그 뒤로 조금 정적이 흘렀다.
설휘는 그것을 ‘신호’라고 보았고, 자연스럽게 본인의 입술을 그녀의 입에 가져갔다.
성공했냐고?
그렇다. 여기까진 정말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욕심을 더 냈다.
입술을 포갠 상태에서 오른손을 그녀의 허리에 가져다 대었는데, 소령이 화들짝 놀라며 갑자기 도망친 것이다.
‘그 뒤로 대화를 거의 못 했지.’
이후로 소령의 얼굴만 보면 자연스럽게 피하게 되었다.
자신이 피하지 않으면 소령이 피했다.
표정을 보면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썩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이걸 누구에게 물어보자니, 민망해서 말 꺼내기도 쉽지 않았다.
‘본교에 있었더라면…… 어떤 마음인 줄 알았을 텐데.’
사랑+3.
전에 시스템이 작동했을 때, 그녀의 머리 위에 떠있던 것.
혹시 그게 남아 있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로 알기 힘들었다.
“대장!”
저 아래에서 부르는 소리에 설휘의 고개가 돌아갔다. 용진이 자신에게로 뛰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빨리 거처로 와보십쇼.”
“왜?”
“재밌는 볼거리가 있으니까요. 빨리 오십쇼.”
“그러니까 그게 뭔데?”
“와 보면 안다니까요……. 빨리…… 어? 소령도 있었네.”
용진이 떠드는 소리에 어느새 소령도 다가와 있었다.
덕분에 설휘는 괜히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엿보고 있었다는 게 들켰으니까.
“잘됐네. 둘 다 빨리 내려오십쇼. 어서요!”
용진이 다시금 소리치며 내려갔다.
난처하게 서 있던 설휘와 소령은 이내 용진을 따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사부님,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대장!”
거처에는 수하들 모두가 와 있었다.
이른 저녁에 이렇게 모이는 일은 흔하지가 않은데, 무슨 일인지 모를 일이다.
“그래. 뭐냐? 재밌는 볼거리가 있다던데.”
설휘의 말에 적송이 피식 웃으며 가리켰다.
조금 떨어진 저편에서 여러 번 옷을 갈아입으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게…… 맞는 거냐?”
한 명은 불평이 한가득 쌓인 요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포목점을 몇 개나 돌았으니까.
그에 반해 음무기, 옷을 건네는 그의 표정은 냉랭하기만 했다.
“옷이 날개라는 소리를 못 들어봤습니까? 누가 봐도 돈 있고 능력 있는 사람처럼 보여야 합니다. 신뢰감을 줄 수 있는 두의와 비단결로 된 의복. 웃옷과 합의 잘 맞는 경의(脛衣-바지)도 잘 선택해야지요. 신발도 그렇고, 모든 걸 허투루 보면 안 됩니다. 하나하나가 모여 큰 대어를 낚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입으면…… 정말 여자들이 좋아할까?”
“그럼요. 일단 형님은 얼굴이 박살나…… 아니, 좀 부족한 상황이니 이런 것에서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허리끈도 하시고…… 신발도 아주 괜찮은 걸로 신으시고……. 자, 면경 한번 보십시오.”
사방에 옷가지가 널려있고, 계속해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설휘가 어이없는 얼굴로 시선을 돌리자, 용진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내일 소개로 규수를 만나는가 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부터 저리 난리 법석입니다.”
“소개로? 누굴?”
“정확한 건 저도 모릅니다. 음무기가 주선했는데 아는 분의 아는 분인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설명을 요하는 설휘의 눈빛이 이어지자, 한쪽에 널브러져 있던 적송이 담담히 말했다.
“간단한 거죠. 오랫동안 좋아했던 여인에게 차이자, 몸 둘 곳 없이 마음이 허하니 다른 여자로 외로움을 달래는 거지요. 뭐.”
“…….”
“…….”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맨 뒤에 있던 소령도, 설휘도 난처한 듯 서로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지, 요림은 계속 여벌의 옷을 입고 벗기를 반복했다.
“오, 이건!”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맑은 색감에 전신을 가리는 옷.
거기다 도포 위에 덧입는, 소매 없는 반소매 외의의 답호(搭胡)가 제법 어울린 것이다.
“꽤…… 괜찮구나?”
“당연히 그럴 겁니다. 이게 주로 유협들이 입던 옷인데, 근래에는 재력 있는 가문의 자제나 지체 높은 고관 자제분들도 입고 다닌다고 합니다. 특히 규방 규수에게 그리 인기가 많답니다…….”
음무기는 그제야 만족스러운지 씨익 웃고는 말했다.
“헌데, 직업은 뭘로 하실지 정했습니까?”
“글쎄……. 목수라고 하면?”
“허어. 시장 바닥도 아니고 웬 목수입니까. 어디 보자…… 그래, 임대업. 사채업은 좀 그러니 임대업으로 가시죠.”
“내가 그렇게 돈이 없는데…….”
“저기, 사부님이 부자시잖습니까. 그렇죠?”
둘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고, 그곳에 있던 설휘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래, 임대업이 좋겠구나.”
그 말에 둘의 얼굴이 다시금 활짝 피었다.
“자, 되었습니다. 그럼. 내일만 기다리십시오.”
대충대충 치장을 끝낸 음무기가 물러섰고, 요림은 모두가 보는 앞으로 걸어 나왔다.
“와! 완벽하십니다.”
짝짝짝.
음무기의 감탄스러운 박수소리.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적송은 후딱 밖으로 나갔고, 소령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를 피했다.
“나가자꾸나.”
“그러시죠.”
차례로 설휘와 용진이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방을 비웠다.
***
다음 날 정오.
촤아아아. 차아아아.
포구 주변에 파도가 강하게 일었다.
새벽부터 거칠던 바람이, 이제는 배를 띄우기 힘들 정도로 거세진 것이다.
포구 앞 순시를 맡은 해남파 삼대제자 청경이 머리를 쭈욱 빼며 말했다.
“어? 이런 날씨에도 교역선이 오네?”
그로선 생경한 일이었다.
보통 이 정도 험한 날씨에는 배를 띄우지 않는 게 원칙인데, 무슨 생각인지 들어오는 배가 있었던 것이다.
“영 없는 일은 아니다. 솜씨 좋은 수부가 있으면, 이런 날씨일수록 삯을 더 받을 수 있거든.”
옆에 있던 사형 청명이 일러 주었다.
그렇게 그들 앞에 곧 배가 멈췄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어…… 어?”
청경은 단번에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척 봐도 배 안에 물품들은 없어 보였고, 배 위에 있는 사람들도 일반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특히 복장.
전신에 흑의를 입고 뭍으로 내리는 이들은 누가 봐도 무예를 익힌 자들이었다.
“청경, 형님들을 불러와라.”
“옙!”
청명도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고, 그의 말에 청경이 재빨리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는 몇 걸음 가지 못했다.
“커억!”
배에서 내린 인영 하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누, 누구냐! 네놈들은!”
별안간 살수부터 날린 괴인들의 등장에, 청명은 고함을 질렀다.
허나 놈들은 말없이 다가오기만 했다.
철컥.
청명이 검을 뽑아 빠르게 해남파의 검식을 펼쳤지만, 상대는 너무도 쉽게 피해냈고.
“컥!”
퍼억!
단번에 그의 목을 날려버렸다.
“무슨 일이야?”
“어, 뭐야?”
그때였다.
비명을 들었는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리해라.”
쉬쉬쉭!
배 위에 있던 복면인 하나가 지시를 내렸고, 그 말에 십수 명의 흑의인들이 몸을 날리며 삽시간에 사람들을 베어냈다.
포구 주위는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투욱.
뒤늦게 배에서 지시하던 사내가 내렸다.
복면과 흑의. 그걸로도 가려지지 않는 상당한 체구였다.
그 옆에 두 명의 복면인이 섰고, 그 뒤에는 유일하게 얼굴을 내보이는 노인이 있었다.
“여기가 맞느냐?”
대장으로 보이는 복면인이 시선을 조금 돌리자, 바로 옆의 흑의인이 두건을 벗으며 말했다.
“네. 우리 아기가 맞다고 하네요.”
여인이었다. 그리고 아기라 지칭한 건.
냐아옹.
그녀의 품에 있는 고양이였다.
대장으로 보이는 복면인이 시선을 돌리며 노인에게 물었다.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예, 어르신.”
그 노인은 금만중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가 이곳 해남도에 도착한 것이다.
스륵.
여인 옆에 있던 또 다른 무인이 두건을 내렸다.
향개.
서열 10위의 극마고수가 입을 열었다.
“소교주님. 굳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발걸음을 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그 말에 이제껏 지시를 내렸던 이도 복면을 내렸다.
일제자 살마.
그가 이곳에 등장한 것이다.
“사대극마공의 유일한 실마리다. 당연히 직접 찾아가 확인해봐야지.”
그는 턱짓을 까딱했다. 그러자 옥녀관 수장 시아영이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네가 한번 찾아봐 주련?”
야옹.
고양이는 기다렸다는 듯 어디론가 달려나갔다. 고작해야 미물 주제에, 그 빠르기는 화살 같았다.
타다닥.
그 모습에 수하들도 빠르게 뒤를 따랐다.
“곤마의 유지인가, 아니면 후예인가…….”
일제자가 짧게 읊조리며 한 발짝 나섰다.
사제자 곤마.
그 뒤를 이은 자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는 살마.
그의 표정은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