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다른 미래, 다른 결과 (5)
청호객잔(靑浩客棧).
해남의 저잣거리에서 가장 크고 목이 좋은 곳으로, 인근 사람들은 크고 작은 약속 대부분을 이곳으로 잡았다.
날씨가 좋을 때는 항상 2층 자리가 만석이었고. 음식 솜씨 또한 뛰어나 해남도에 오면 많이들 들르는 명소 중 하나이기도 했다.
“크흠.”
그 청호객잔의 2층. 창가 가까이 낀 탁자에 앉아, 사내가 밖을 힐끗 내다보고 있었다.
얼굴은 평범했지만, 복장은 준수하게 차려입었다.
색이 잘 배합된 수려한 색감의 옷.
멋을 내기 위한 덧옷인 답호. 단색으로 기름칠 잘 된 가죽 신발하며, 다들 지나가면서 보다가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차림새였다.
덜덜덜.
그런데 옷차림새와 달리, 사내는 조금 불안해 보였다.
뜨거운 찻잔을 순식간에 비울 정도로 손과 발을 떨며 긴장감을 열심히 녹이고 있었다.
“에휴. 그냥 아는 사람 대하듯 하라 그리 일렀는데, 벌써부터…….”
조금 뒤쪽 줄에서 안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 연애 지도 겸 교제 책임을 맡은 음무기. 그는 요림의 행동에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저 봐, 내가 백날 가르쳐도 소용없다고 했잖아. 인생에 여자라곤 옆에 있는 소령밖에 없는 자인데 무슨…….”
보다 못한 용진이 한마디 하자, 송화가 급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몇 번이나 연습하지 않았습니까. 원숭이가 아니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야, 네가 더 나빠.”
그 말에 용진이 송화를 보고 말했다.
“예? 제가 왜…….”
“원숭이만도 못한 놈으로 만들고 있잖아.”
“아니, 그건 그런 뜻이…….”
“됐고, 그냥 시킨 음식이나 먹자니까.”
보다 못한 적송이 끼어들었다.
주문해둔 음식이 이미 탁자 위에 즐비했는데, 손도 대지 않고 지켜보자니 짜증이 난 것이다.
“그래. 먹자, 먹어.”
용진이 한마디 했고, 이내 시선을 옮겼다.
“사부님, 사부님은 어찌 보십니까…….”
조용히 젓가락을 들던 설휘가 흠칫했다.
무예라면 몰라도, 연애에 대해서는 자신도 아는 게 없으니.
하고 싶은 말이 크게 없었다.
“글쎄…….”
슬쩍 소령을 쳐다보니, 음식을 먹는 데 열중이었다.
애초에 이번 일에 관심 자체가 없는 듯했다.
그러다 일행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하나둘씩 모이자.
“일단 얼굴이…….”
“음.”
“으음…….”
짧은 말로 모두를 수긍하게 했다.
“잠깐. 온다!”
얼마 있지 않아, 일행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때마침 여인 한 명이 걸어오는 게 보였던 것이다. 상당한 미인이었다.
“오……. 정말 저 여인이야?”
“제길, 저 정도였다면!”
“호오.”
여인의 인상착의를 본 설휘가 놀라워했고, 용진은 곧장 아쉬움을 표했다.
적당히 화려한 비단옷. 몸가짐은 저잣거리에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기품 있었고, 피부는 도자기처럼 하얗고 매끄러웠다.
정말 음무기가 소개해 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고운 미색이었다.
2층으로 올라와 잠시 두리번거리던 여인은, 창가 탁자 위치를 확인한 후 요림 앞에 섰고.
“혹시 이름이……?”
말을 걸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요림이 말했다.
“처, 처, 처, 철호입니다.”
자신의 본명이 아닌, 해남도에 왔을 때 지었던 가명으로 대답했다.
여인은 짧게 웃으며 화답했다.
“연희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예? 예…… 옙!”
그렇게 여인이 자리에 앉았고, 요림도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눈썰미 좋은 점소이가 때마침 다가와 물었다.
“어떤 음식을…….”
“일단은 가볍게 차 한잔하겠소.”
“알겠습니다.”
요림은 점소이를 돌려보냈다.
“임대업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여인이 물어오자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예, 작게 하고 있습니다.”
“와! 정말요. 정말 부자신가 봐요?”
“뭐, 조금. 아니, 꽤 그렇습니다.”
헤벌쭉하게 웃는 요림. 여인은 밝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헌데…… 무슨 임대업을 하시나요?”
“예. 건물로 한…… 백여 채 정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백여 채요?”
여인이 놀란 듯 물어오자, 요림은 좀 당황했다.
‘아이고, 십여 채라고 하라고 했는데.’
얼떨결에 열 배로 늘려 버렸다. 돋보이기 위해 그냥 지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을 주워 담기란 불가능했다.
“사실, 제가 땅을 좀 많이 사놨습니다. 해남도 그렇지만 광동과 광서, 그리고 절강의 항주에도 제법 있지요.”
“대단하시네요. 알려지지 않은 거부셨군요.”
“돈이야 뭐.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지요. 열심히 일해서 불려 나가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많아지더군요.”
“그러시구나.”
약간은 감탄하는 눈빛을 보이는 여인.
자신을 좋게 보는 사람 앞에서는 말문이 트이기 마련이었다. 요림은 이제 자신을 찾았다.
“그리고 제가 이래 보여도 무공에는 좀 자신이 있습니다.”
“무공? 겉보기엔 그리 강해 보이시지 않는데…….”
“하하, 무공이란 말이지요. 근육이 많다고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공과 외공을 적절히 분배하는 것이 기본이고, 또한 어떤 훈련과 무공을 익히느냐에 따라 달라지지요.”
그때부터였다.
요림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무공의 초식이라니, 강호의 무공 중에 어떤 건 가짜라니.
그런 얘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여인의 얼굴에서는 지루함이 피어올랐다.
“망했네.”
“그러게.”
용진이 말하고, 음무기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분위기를 조금 띄우는 용도로 쓰라 했던 돈 자랑과 무공 설명. 그런데 요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돈 자랑은 초반부터 과도하게 했고, 다음으로 나오는 주제는 온통 무공에 맞춰 이어가고 있었다.
“어, 무예가 강한 남자는 괜찮지 않나요?”
송화가 묻자, 옆에 있던 용진이 고개를 저었다.
“적당하면 좋지. 하지만 적당히를 넘었잖아. 돈과 힘. 좋은 거지만 오늘이 첫 만남이야. 첫 만남부터 자기 자랑만 하면 허세 부리는 놈으로 보인다고.”
“아…….”
“그리고 여염집 여자잖아. 무공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어? 자기가 모르는 이야기만 계속하는 남자. 가장 질색하는 경우지.”
“음, 으음.”
송화는 뭔가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뒤이은 한마디가 더욱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냥 얼굴이 문제야.”
적송이었다.
우걱우걱.
어차피 기대도 안 한 사람답게, 그는 음식의 대부분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대화에도 밝게 웃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그런 것이었나……?’
설휘였다.
왠지 자신이 요림 같은 상황이 되어도, 그보다 더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들 웃으며 한마디씩 하는데,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뜨끔했다.
“무공 얘기는 안 하는 게 좋은 건가?”
듣다 말고 음무기에게 슬쩍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은 싸움 잘하는 남자를 멋있게 보는데, 여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폭력적일 수 있거든요. 무림이나 무가와 관계된 집안이 아니면, 대개는 싫어합니다.”
“돈 많은 것도?”
“그건 과해도 싫어하고 모자라도 싫어합니다. 돈 좀 있다고 사람 무시하는 이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니 겸손하게, ‘나는 여유 있는 사람이다’라고 자연스럽게 풍겨야 하는 겁니다.”
“겸손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설휘가 끄덕였다. 왠지 오늘따라 음무기가 달라 보였다. 그래서 조심히.
“저기…….”
적송이 한 말을 상기하며 모두를 향해 말을 꺼냈다.
“내 얼굴은 어떤가?”
“…….”
“…….”
“…….”
“…….”
침묵이 일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차마 말을 못 하겠다는 표정들이 스쳐 지나갔고.
“대장도 그리…….”
이내 음무기가 입을 열자마자.
“너보단 나아.”
소령이 일침을 가했다.
“헛.”
“음.”
다들 어안이 벙벙한 그런 표정이었다.
특히 설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미소를 감췄다.
꾸욱!
내린 손에서 반사적으로 주먹이 쥐어졌다.
‘그래, 아직 희망은 있어.’
조금 멀어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불꽃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다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여인이 일어났고. 요림도 밝은 얼굴로 일어섰다.
“그럼, 다음에 뵈어요.”
“저기…… 이렇게 오신 김에 식사라도…….”
“그것도 다음에요.”
여인은 싱긋 웃으며 손짓했고, 그렇게 빠르게 객잔 안을 벗어났다.
“아, 옙! 그럼 다음에!”
돌아서 가고 있는 여인에게 밝은 목소리로 대답한 요림.
그가 곧 자리에 앉자마자.
“어찌 되었습니까?”
음무기가 갑자기 나타나 빠르게 물었다.
“어찌 되긴? 성공했지. 다음에 보기로 했어.”
“…….”
요림이 밝게 말했다.
“역시, 내가 하면 한다고 했지? 이미 반 이상 넘어왔다고 본다. 내 얼굴을 보고 힐끗힐끗 웃는 걸 느꼈다고.”
“그럼 연락은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음무기가 침중한 얼굴로 물었다.
“연락……?”
“…….”
“그러네, 이거 연락을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냐?”
그 말에 음무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형적인 퇴짜 맞은 경우다. 하지만 요림은 자신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 음무기. 네가 다시 한번 연락을 취해서 만나면 되겠구나?”
요림은 여전히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고.
“에휴…….”
따라온 용진이 낙망하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우걱우걱.
애초에 관심이 없었던 적송과 소령은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고.
“……어?”
설휘는 요림과 음무기를 보다가, 불현듯 시선이 창가로 이끌렸다.
뭔가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그게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
낯익은 고양이.
전생에 향개와 함께 왔던 여인. 그 품속에 있던 고양이였다.
냐아옹!
설휘와 눈이 마주친 고양이가 울음소리를 내며 빠르게 사라졌고.
“사부?”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는 설휘의 행동을 보고 송화가 물었다.
설휘는 그때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 2년을 넘기지 못할 겁니다.
“아…….”
송화도 직감했다. 설휘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지.
“형님들. 모두 도망치십시오!”
“응?”
“뭐?”
송화의 외침에 다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고.
“당장요!”
“……!”
찰나의 머뭇거림 후, 빠르게 입구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컥!”
“크헉!”
비명과 함께 입구부터 족족히 쓰러지는 사람들.
객잔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흑의인들이,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크악!”
“악!”
거침없는 살생.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은 비명을 질러댔고, 순식간에 객잔 안은 아비규환으로 바뀌었다.
허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듯, 흑의인들의 살생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계속해서 들어오는 흑의인들의 살검.
출신, 소속, 직업. 아무런 관계없이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죽여나갔다. 이따금 검을 들고 대응하는 이도 있었지만, 단 일검도 받지 못하고 칼에 맞고 쓰러졌다.
“컥!”
“크헉!”
“그만!”
무차별적인 살육에 대항하는 이는 없었다. 무엇보다 흑의인들의 숫자가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사부.”
“대장.”
수하들이 설휘를 바라보았다.
이들의 출신이 어디인지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객잔 안에는 마기가 진동하고 있었으니까.
“송화야.”
설휘는 뒤로 물러섰던 송화를 불렀고.
“아무래도 난 2년을 다 채우지 못하겠구나.”
“사부…….”
설휘는 다시 적들을 바라보았다.
눈대중으로 파악한 초마의 고수가 무려 열 명이 넘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주 전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맨 마지막에 들어온 놈들.
마기를 감출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은은히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극마고수…….”
그것도 무려 셋이 이 객잔에 자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