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212화 (213/379)

212화. 절대극마공 (3)

천마군림보.

우연인지 운명인지, 이 보법은 설휘의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예전에 왕모력과의 싸움에서 AI가 발휘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보았던 대부분의 상승 무공들은 학습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보법은 호흡법과 행로(行路)만 학습하면 되지만, 무공은 수많은 초식의 합이기에 학습 난이도가 차이 났기 때문이다.

당시 AI는 천마군림보를 주력으로 펼쳤지만, 다른 무공들은 초식 몇 개만 사용했기에 습득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설휘에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AI가 남긴 유산.

천마군림보는 압도적으로 밀렸어야 할 살마와의 싸움을, 어찌어찌 대치는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쩌정! 쿠왕!

천마군림보 대 천마군림보.

환영 또한 실체인 이 신법은 각기 여러 방향에서 펼쳐졌다.

단순히 보면 숫자가 두 명 더 많은 살마가 우위를 점해야 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사사사삭. 화악!

그런데 하나씩 서로 지워가며 대립하던 도중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

살마의 환영이 다섯일 때, 둘까지 줄어든 설휘의 환영이 어찌 된 영문인지 다시 여섯으로 불어난 것이다.

“그따위 눈속임이라니!”

천마군림보를 펼치면서 생겨난 환영.

살마는 당황했지만, 그대로 밀어붙였다.

어차피 물리력을 지니지 못한 단순 환영이라 생각하며 공격한 것이다.

파칭!

“큭!”

하지만 그는 상대의 예상외의 저항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마잠형술.

형체가 완전히 사라져, 오로지 기감으로만 느낄 수 있다는 환영신법.

살마는 이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움직임이 빨라지니 더더욱 환영일 거라고 생각했을 뿐.

쾅! 화르륵! 쿠왕!

다시금 서로 공수를 주고받으며 줄어드는 환영.

스륵.

어느새 모든 환영이 지워진 살마와 설휘는 마지막 일격을 교환했다.

“하앗!”

설휘는 모든 내력을 다해 검 끝에만 두르고 있던 지옥멸절공을 길게 뻗었다.

화르륵!

반사적으로 대응한 살마 역시 사대극마공의 화. 그 정점이라는 자색빛 불의 고리를 쏘아냈다.

쩌어어어어어엉!

두 기운이 부딪치자, 큰 폭발이 일어나며 사방에 엄청난 열기가 뻗쳤다.

쿠와아아악! 고오오오옥!

서로 엉키듯 부딪치던 기운의 색은 묘하게 달랐다.

살마가 뿜어낸 자색을 띤 불의 고리.

설휘가 펼쳐낸 검은색을 함께 띤 자색의 안개.

처음엔 불의 고리가 거의 잠식하듯 기운을 삼키는 것처럼 보였고, 이내 뚫고 나아가는 듯 보였다.

그런데.

쿠오오오오— 쩌엉!

갑자기 진한 자색 빛을 토해내며, 놈의 기운을 삼키며 공멸해버렸다.

“……!”

“……!”

순간 서로를 바라보는 살마와 설휘는 느꼈다.

지금이 기회. 빈틈이 생겨났다는 걸.

“큭…….”

허나 설휘는 내력을 거의 다 소모한지라 몸을 가누지 못했고, 반면 살마는 그대로 짓쳐들어와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이 새끼, 화공까지…….”

용호상박. 거의 비슷한 수준의 성취였다. 그것이 오히려 살마의 분노를 더욱 자아냈다.

어떻게 극마의 초입에 오른 녀석이, 통달 수준에 머물러야 펼칠 수 있는 수준의 힘을 발휘한 것인가.

설휘는 피를 머금은 입으로 담담히 말했다.

“대상이 잘못된 것 아닌가?”

“……?”

“사대극마공의 화공을 익히지도 않았는데 너와 비슷한 수준으로 펼치니까, 스스로에게 화가 난 거잖아.”

“뭐라?”

얼굴이 일그러지는 살마를 보고서 설휘는 비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라. 그래도 그 정도면 준수한 편이니까. 상대가 나라서 부족해 보이는 것뿐이야.”

“이익.”

쿠왁!

불꽃을 머금은 살마의 검이 설휘의 허벅지를 찔렀다.

“크아아악!”

밀려오는 강한 고통에 설휘는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곧장 살마의 검이 설휘의 가슴으로 향했고, 다시 피를 보려는데 갑자기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대장. 데리고 왔습니다.”

때마침 살마의 수하들이 도착했다.

유패와 향개를 필두로 한 그들은, 설휘의 수하들을 제압해 끌고 왔다.

냐아옹.

그 무리에서 새카만 고양이가 달려와 여인, 시아영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저 영물을 통해 도망친 수하들을 잡아온 모양이었다.

투. 투투투툭.

다들 움직이지 못하게 혈도가 짚인 채로 바닥에 놓였고.

“오호. 그렇지.”

살마는 뭔가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콱.

그리고 이내 바닥에 쓰러진 한 녀석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대장…….”

“요림?!”

설휘의 눈이 커졌다.

살마의 손아귀에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오는 자는 요림이었던 것이다.

“쿨럭. 크…….”

설휘는 몸을 일으키다 말고 피를 토해냈다.

모든 단전의 내기가 완전히 바닥이 나자, 피가 역류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피부는 노인처럼 주름이 졌고, 머리 역시 백발로 변해 있었다.

“수하들을 보는 눈에 아주 정감이 가득하군?”

그런 설휘를 본 살마가 비아냥거렸고, 자신이 집어온 녀석의 머리를 잡아당겨 눈을 맞추게 했다.

“잘 봐라. 이 새끼야.”

“뭐…… 뭐 하려는 거냐?”

당황한 설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살마의 검이 움직였다.

“크아아아아!”

그리고 곧 비명이 튀어나왔다.

칼로 엎어져 있는 자세로 있는 요림의 다리를 내리찍은 살마.

그 모습에 설휘의 눈이 커졌다.

“씨발, 뭐 하는 거야…….”

“대장…….”

한마디를 주고받자마자, 또다시 찔러대는 살마.

콱!

“크아아!”

콰악!

“크아아악!”

거기서 칼질은 두세 번 정도 더 이어졌다.

“그만해! 이 새끼야!”

지켜보다 못한 설휘가 이마에 핏발이 서며 소리 지르자, 그제야 손을 멈춘 살마가 말했다.

“개처럼 빌어봐.”

“…….”

“빌어보라고. 그럼 혹시 아나? 너만 죽여줄지도…….”

미친놈의 미친 제안이다. 하지만, 설휘는 살마가 농담으로 한 얘기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빌라니까?”

핏발이 선 그의 얼굴은 짐승 그 자체였다.

사방에 피가 튀긴 상황에서 그의 눈빛은 한층 더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 빌어?”

잠시 미간을 좁힌 그는.

콱!

“크아아아아아!”

이미 걸레짝이 된 요림의 다리에 또 한 번 칼을 찔러 넣었다.

“이익……!”

붉게 충혈된 설휘의 눈빛이 쏘아졌고.

“이쯤 하시지요. 일제자님.”

거기서 예상치 못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제자님 앞에 순순히 따르지 않은 것은 분명 중죄입니다만…… 그래도 본교의 수하들입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야 있겠습니까?”

두건을 내리자 설휘의 눈이 커졌다.

그는 유패였다.

“하, 감히 날 방해하려는 것이냐?”

그 행동이 흥을 깬 것인지 살마가 과민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유패는 물러서지 않았다.

“감히 제가 그런 짓을 벌이겠습니까. 다만, 유흥이라 하심은 본인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 게 더 재미있는 법. 차라리 저들 스스로가 부족함을 깨치게 하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뭐라?”

살마는 짜증 섞인 시선으로 유패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그가 잡아온 수하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이를테면?”

그 말에 유패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수하들을 시켜서, 그 대장을 죽이도록 명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놈들은 애초에 곤마를 따랐던 자들입니다. 일제자님께 충성심을 보이고, 자신들의 손으로 중죄를 저지른 자를 없애는 것이니……. 행동에 더 값진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호오.”

건성으로 넘어가려고 하던 살마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그는 타인의 고통과 절망을 즐기는 자. 지금 유패가 한 말도 나름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이었다.

‘어르신…….’

반면 설휘는 유패의 배려를 알아차렸다.

눈앞에서 자신을 따르던 수하들이 고통스럽게 당하는 것을 보는 건 지옥 그 자체다.

그들과의 유대가 깊으면 깊을수록 괴롭다.

그러니 차라리 한 번에 깔끔하게 끝을 내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나을 터.

“너, 살고 싶으냐?”

살마는 다시 요림의 머리채를 잡았다.

아직 치명상을 입지 않았는지 눈빛이 살아있자 그에게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요림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살마가 재차 물었다.

“그럼 저놈을 죽여라. 할 수 있느냐?”

“……예. 할 수 있습니다.”

“……!”

설휘는 조금 당황했다.

어차피 그리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것 아닌가?

‘설마.’

생각해 보면 묘한 일이다.

전생의 죽음. 그건 바로 눈앞에 있는 요림에게 속아 당했던 것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또다시 그에게 칼자루가 쥐어진 것이다.

“하겠습니다.”

“오호.”

투툭. 투투투툭.

살마는 혈자리를 풀었다. 다리가 엉망이 되어 한 쪽 발로 비틀비틀 일어선 요림이 힘겹게 검을 들었다.

“요림…….”

“대장, 미안합니다만…… 저는 살고 싶습니다.”

요림을 바라보는 설휘는 만감이 교차했다.

전생의 죽음을 애써 외면했다.

요림이 원래 배신자가 아닌, 환경이 어쩔 수 없이 돌아가서 자신을 배신하게 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지금은 요림을 보니 그때의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다. 어차피 살아 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니.”

……상관없었다.

이로써 요림의 성미를 알게 됐으니, 이 또한 나름의 소득이라 할 수 있으니까. 그냥 훌훌 털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장. 어디 쉽게 가실 생각이었습니까?”

“……?!”

잠깐 설휘의 시선에 의아함이 서렸고, 그 순간 스쳐 가는 창날이 보였다.

콱.

“크아아악!”

설휘가 비명을 질렀다.

허벅지 안쪽, 신경이 몰려 작은 상처에도 통증을 크게 느끼는 자리.

요림의 창이 그곳을 파고든 것이다.

“제가 좋아하던 여인을 뺏어가 놓고…… 가증스럽게 모른 척하지 않았습니까…….”

“끄윽…… 너…….”

“대장, 아무리 대장이라도 그래선 안 되지요. 제가 그렇게 충성을 바쳤는데……. 저에게는 그런 짓을 저지르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예?”

콱! 콱!

“크아아아악!”

계속해서 급소를 찔러대는 창날. 설휘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자, 적들 사이에서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아하하하!”

짝짝! 짝짝짝!

살마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손뼉을 쳤고, 유패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일제자 수하들 중 어느 누구도 밝게 웃지는 못했지만.

“이제야 속이 좀 시원하군요. 크크큭.”

처억.

요림은 축 처진 설휘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아직 의식이 있는 걸 확인하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제자…… 살마 님.”

갑자기 예를 표하며 자신을 부르자, 일제자 살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냥 죽이기는 아깝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이놈에게 불만이 있을 수 있으니…… 다들 칼질 한 번만 하게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오호. 그래?”

살마는 시선을 돌렸다. 점혈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설휘의 수하들을 보고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재밌겠군. 풀어줘라.”

그가 명령하자 근처에 있는 수하가 점혈을 풀었고.

이내 수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 이 새끼…….”

설휘의 눈가에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을 보며 비웃는 요림.

이놈이 원래 이런 놈이었던가. 그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한 후회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 순간에 수하들은 한데 모였고, 그중 송화가 먼저 움직였다.

“대장.”

요림은 송화를 슬쩍 보고는 다시 설휘에게 말을 붙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부디…….”

“…….”

“강녕하십시오.”

“……?”

토돌토돌.

설휘의 눈에 잠깐의 경련이 일었다.

방금 요림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내지른 요림의 외침은.

더더욱 그를 혼란에 빠트렸다.

“송화!”

“발동했습니다!”

설휘 앞까지 다가온 송화가 설휘를 붙잡고 이상한 주문을 외우자.

“……!”

설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공간이동!’

한 번에 백 리라던가. 예전에 써 본 다음 잊고 있었던 주술의 주문이었다.

그리고 그때야 깨달았다.

수하들은 이들에게 잡혀 온 게 아니라.

‘나를 구하러…….’

화악!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공간이동이 시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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