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용천검 (4)
“저놈인가?”
선두에 있던 일제자 살마의 걸음이 느려졌다.
밖은 해가 쨍쨍한 한낮이지만, 지하동굴 안은 짙은 어둠이 내리깔려 있었다.
운귀고원의 지하는 광범위한 석회암 지대라, 잘못 발을 내디뎠다가는 미로처럼 끝없이 얽혀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오늘 운수가 좋은 건지, 자신들이 찾던 녀석이 그 안에서 직접 마중 나와 있는 게 아닌가.
“마치 우리들이 오리란 걸 알고 있는 듯하군.”
살마는 수하들을 보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그들 앞으로 비장하게 서 있는 설휘의 모습은 그저 한낱 애송이의 치기에 불과해 보였던 것이다.
살마가 잠시 한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저자가 맞습니다.”
함께 온 금만중이 곤마의 유산이라 불리는 자의 신분을 확신시켜 주었다.
‘저들이 시작이라니…….’
한편, 설휘는 일제자와 함께 몰려온 인물들을 담담히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에는 분명 마주 선 것만으로도 극도의 긴장감을 불어넣었던 이들이다.
지금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AI의 말을 듣고 난 지금은 그때의 감정이 아니었다.
이 싸움은 그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천마. 그리고 그를 죽이고 나타나는 플레이어와 싸우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강해져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이 이 지옥, ‘시스템’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 어디 실력 한번 볼까?”
칼을 꺼내 드는 살마의 모습을 보며 설휘는 생각했다.
유패와 향개. 놈들의 실력 또한 극마에서도 통달 수준.
자신감에 찬 살마가 홀로 나오는 지금, 단숨에 제압하거나 최대한 압박해 이들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사대극마공 화. 그 무공의 정점이라는 대멸천분공.
이 필살의 수법을 통해 단 한 방에 몰살시키지 못하면, 오히려 전황이 불리해질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팟.
살마가 움직였다.
그러자 놈의 움직임을 쫓던 설휘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살마의 움직임은 온몸을 긴장하게 만들 만큼 빨랐다.
“멸화섬!”
검을 꺼냄과 동시에 시전되는 살마의 마공.
화아아아악-!
하지만, 그런 공격에 당할 정도로 설휘는 무르지 않았다.
설휘는 살마의 검 끝에서 자색의 빛이 어른거리자마자 불의 고리가 나옴을 간파했고, 고개를 숙임과 함께 곧장 빙공으로 맞상대했다.
쩌어어억!
화공과 빙공이 맞닿지 않고 서로 교차하며 상대에게로 향했다.
살마는 몸을 비틀며 피해내는 걸 선택했지만, 설휘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한 발 더 다가서며 천마군림보를 이용해 녀석을 몰아붙이려고 한 것이다.
상대의 공격을 피함과 반격을 동시에 펼친 일 수였다.
“이놈이!”
상대의 공격적인 대응도 그렇지만, 몸이 불어나는 듯한 신법에 살마는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곧 그는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렸고, 환영으로 변한 설휘를 상대했다.
“애송이가!”
삽시간에 대여섯의 환영을 베어내자, 살마의 표정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는 곧장 설휘와 같은 천마군림보를 시전해 상대에게 압박을 가하려 했다.
사사사삭.
그렇게 몸이 불어나던 중에, 예상치 못한 공격이 들어왔다.
[절세풍검을 사용합니다.]
설휘가 곧장 특수 기술을 발동시키며 검은 폭풍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로 인해 살마의 천마군림보의 환영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환영이 모두 진체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검은 폭풍을 견뎌내기 위해선 힘을 한데 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크윽.”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살마는 악을 쓰며 절세풍검의 힘을 버텨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모든 특수 기술을 재조정한 설휘의 용천검은 이제부터 거의 무한의 특수 기술을 발동시킬 예정이었다.
[빙원핵축압을 사용합니다.]
사아아아아-
설휘의 귀에 이명이 일었다.
소리의 파동이 완벽할 정도로 차단된 시간의 결박.
설휘는 사물이 정지된 고요함 속에서 풍압을 버텨내고 있던 살마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또다시 꺼내는 특수 기술.
자신의 검 끝을 살마에게 고정시키고, 화온마공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최후의 무공을 꺼내든 것이다.
[지옥멸절공을 사용합니다.]
촤아아아아-
극도로 느릿하게, 검 끝에서 피어난 어둑한 보랏빛이 살마에게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살마의 지척까지 다가가 또 다른 변화를 보였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시간의 결박이 풀렸다.
크오오오오-!
사대극마공 화의 무공과는 비슷하면서도 결이 다른 기운.
괴이한 소리와 함께 피어난 지옥불은 사람의 크기만큼 솟아오르며 살마를 삼켜버렸다.
“크악!”
이번 공격은 절반 정도 성공했다.
살마가 빠르게 퇴법을 밟았지만, 이미 그의 한 손은 지옥불이 완전히 삼켜버린 뒤였다.
“크아압!”
살마는 중상을 입고 몸을 휘청거렸다.
화온마공의 기운은 단순히 그의 팔만 삼켜버린 게 아니라, 몸 안으로 잠식해 들어갔다.
그 불길을 제어하기 위해 온통 거기에 신경이 쏠려 있었던 것이다.
‘죽일 수 있다면, 여기서 끝내야 한다.’
설휘의 눈이 빛났다.
살마만 제거된다면, 이 싸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다. 그래서 또다시 특수 기술을 발동시켰다.
[빙원핵축압을 사용합니다.]
설휘는 승부를 지으려 했다.
시간의 결박에 또다시 살마의 움직임이 멎었고.
설휘는 이번 일격에 쏟아부을 요량으로 또다시 특수 기술을 발현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
지옥멸절공을 발현하기 위해 동작을 취하던 설휘의 표정이 급변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유패와 향개.
어느샌가 그 둘이 이곳에 와 있었다.
향개는 살마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고, 유패는 자신을 향해 검을 뻗고 있었다.
‘이런!’
설휘의 뒷골이 서늘해졌다.
놈들의 움직임.
어느 정도로 빨리 움직이고 있는지, 자신을 향해 어떤 무공을 쓰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무턱대고 살마를 공격하다간 본인이 당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설휘는 이 상황에 가장 걸맞은 특수 기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절세풍검을 사용합니다.]
쿠와아아아앙!
터져나가는 폭풍이 사방을 뒤흔들었고, 연거푸 생성된 소용돌이는 동굴의 천장을 때려 지반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설휘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하나의 빛.
강기였다.
그 짧은 사이, 설휘가 인지하지 못하게 내력을 쏟아낸 것이다.
천만다행이라면, 잠깐 동안 몸이 껌뻑이면서 어떤 공격도 무효화되는 몸 상태였다는 것.
‘이 무슨…….’
“괜찮으십니까? 일제자님.”
설휘가 당황하던 사이, 향개는 일제자의 상태를 살폈다.
“화온마공을 이 정도로 성취하다니……. 사대극마공 풍도 그렇고, 역시 곤마의 뒤를 이을 만한 놈이야.”
살마는 화온마공에 직격탄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눈빛이 살아있었다.
여전히 전의가 꺾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신출귀몰한 힘을 쓰는 녀석입니다. 이리 된 거, 전력을 쏟아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향개가 말하자, 일제자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살인광에 미치광이라고 불리지만, 전장의 현세 판단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이런 상식 밖의 무공을 사용하는 놈은 확실히 다른 방법으로 상대하는 게 옳았다.
“궐장!”
“옙!”
“놈을 포박해라!”
일제자와 함께 왔던 기기아대 3대장 중 하나인 서 궐장이 곧장 정신계 술법을 준비했다.
“시아영! 놈의 시선을 빼앗아라!”
“옙!”
고양이를 한쪽에 던지듯 놓은 시아영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왔다.
그리고 곧 이상 현상을 목도했다.
두두두두둑.
천장에 빼곡히 달려있던 종유석이 일거에 떨어져 나가더니, 설휘를 향해 쏘아져 내렸다.
염력자.
경물을 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이 능력은, 오로지 타고난 능력을 기반으로 한다.
그 능력은 가히 추정 불가.
힘은 극마에 미치지 못하나, 어떤 상황에서는 그 힘을 상회하기도 한다.
하여 마교는 오랜 시간 동안 이런 능력자를 양성하기 위해 하나의 집단을 만들었다.
시아영은 그들을 통솔하는 수장.
염력의 힘은 마교를 대표하는 일인자로, 그 능력에 대해선 감춰진 게 많았다.
‘…….’
설휘는 움직이지 못했다.
칼날처럼 변한 종유석이 쏘아짐과 동시에 저주 술법까지 걸린 상황.
당연하게도 그 공격들을 버틸 재간이 없어 보였다.
핏 핏 핏!
점점 상처로 뒤덮이며 자세가 무너지는 모습에 살마의 표정이 밝아졌다.
죽임으로써 제압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붙잡아 심문할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면, 설휘는 속내는 전혀 달랐다.
‘좀 더…… 좀 더 안으로 들어와라.’
그는 머릿속으로 적들을 화마 안으로 끌어들이는 범위를 상정하고 있었다.
상처를 입으면서 살마와의 거리를 좁히는 것도 그것의 일환이었다.
사실 정신계 술법이라 하더라도 이전에 경험해 본 바.
설휘가 행동 불능이 될 만큼의 공격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단 한 번.
특수 기술이 성공하느냐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있었다.
“향개, 유패!”
“옙!”
“예!”
살마의 말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압해라.”
“알겠습니다.”
살마의 지시를 받고 두 극마고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설휘의 눈에 이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십오 장.
주요 인물들이 모두 들어왔다. 이제는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나름 오래 버텼구나.”
잠깐의 공격이 멈췄을 때쯤, 지척까지 다가온 향개가 말을 걸었다. 그 뒤에는 유패가 있었다.
설휘가 그들을 힐끗 쳐다보았고.
“그거, 내가 할 말이다.”
“……?”
“같이 가보자꾸나. 지옥으로.”
감각 교란의 술법에 걸려 있음에도 설휘는 특수 기술을 손쉽게 발동시켰다.
[대멸천분공을 사용합니다.]
치치치치치칫.
머리 위로 띠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 띠는 설휘의 눈앞에 있는 유패, 향개뿐만 아니라 살마, 나아가서 궐장과 시아영까지 뒤덮었다.
당연히 그들은 그 띠의 정체를 몰랐고.
“이건…….”
살마가 뒤늦게 깨닫긴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공중을 감는 것처럼 돌던 띠는 한순간 멈췄고.
‘지금이야!’
설휘는 재차 특수 기술을 사용했다.
이 불길에 휘말리는 즉시 죽음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절세풍검을 사용합니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폭발이 터졌다.
현세에 존재할 수 없는 자색 불꽃의 띠. 그것은 이 안의 모든 것을 소멸시켜버렸다.
***
구구구구. 구구구구 쾅! 콰아앙!
운귀고원의 지하동굴이 무너졌다. 집채만 한 바위 수십 개가 주변에 굴러떨어졌고.
지하동굴의 입구에 있던 천장은 완전히 바닥에 내리 깔렸다.
설휘를 상대하기 위해 왔던 마교인 십여 명. 그중에 오로지 한 명만 살아남았다.
다만, 그 남은 자도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으으…….”
거의 한 손과 몸통만 남은 살마.
피했다고 하기엔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더욱이 지금도 회광반조가 일어나,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만 설휘는 살아남았다.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무공을 펼쳐내는 본인조차 날려버리는 지독한 마공을.
설휘는 견뎌낸 것이다.
“어쩌다 보니.”
“하…….”
힘의 격차를 느껴서일까.
살마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런 삶의 마지막에서 지금껏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에 대한 회한이 담긴 눈빛이었다.
“나도 그래.”
“……?”
“이런 싸움이 무슨 의미인가 싶다.”
설휘의 시선은 용천검으로 향해 있었다.
이건 무공으로 이긴 게 아니다.
그저 검의 능력을 통해서 이들을 제압했다. 이런 게 무공이라 할 수 있는가.
“앞으로는 더 무의미해질 거다.”
“……?”
살마의 말에 설휘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살마의 얼굴은 빛을 잃어가고 있었고, 거의 마지막일 수도 있는 한 줌의 말을 이어 내뱉고 있었다.
“그가…… 너를 찾아올 테니까.”
그것이 끝이었다.
살마는 운명을 다했고, 설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이제 천마가 내 상대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