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천마육성 (1)
폐허가 된 바닥.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곳에서 설휘는 한참을 서 있었다.
강대한 적들을 제거했다는 기쁨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걱정, 그리고 허탈감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건 이겨도 이긴 게 아냐…….”
설휘는 씁쓸한 듯 혀를 찼다.
극마에 오르기 위해 한 수많은 노력.
셀 수 없이 많은 전투 경험과 상황에 맞는 특수 능력 사용까지.
많은 것을 쌓았다. 하지만 그 많은 기지와 임기응변도 ‘시스템’이 만들어준 성취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했다.
죽고 되살아나기를 반복하며 필사의 노력을 한 것들도 ‘무공의 각인’ 능력이나 특수 기술에 비하면 쓸모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빠른 성장이 결국 내 발목은 잡게 되는 건가…….”
절대경지라는 극마.
보통의 마인은 경험해 보지 못하며, 뛰어난 재지를 지닌 자도 초마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정말로 선택받았다는 이들 역시 극마에 오른 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천마제자라는 마후와 아령이 극마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 걸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경지를. 그 절대경지를. 죽었다가 되살아났다고는 하나, 자신은 고작 몇 년 만에 도달했다.
“뭔가…… 잘못됐다.”
설휘는 ‘시스템’에게 이용당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그랬기에 ‘시스템’이란 게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파헤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우선 그 능력을 적극 활용해야 했고, 여러 무공의 도움을 받아 극마에 오를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이 용천검도 그 노력의 산물이다.
다만, 여기서부터 문제였다.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다 보니, 앞으로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은 한 길로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정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천마 플레이어와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과연 그때의 자신이 대적자라 할 수 있는 그 플레이어를 죽일 수 있을까?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길은 과거 AI가 무수히 지나갔던 길이 아닌가.
더욱이 AI는 이미 탈마에 도달한 자. 그러고도 그는 천마 플레이어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과연 놈을 죽이고 이 ‘시스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시 배워야 해. 기초부터 하나하나.”
설휘는 자신이 걸어온 길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시스템으로 얻어내는 무공의 성취가 아니라, 스스로 무공을 탐구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래야 극마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 테고, 스스로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결국 시스템을 뛰어넘기 위해선, 그가 제시하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야만 한다.
“아직 반년이 넘게 남은 건가?”
설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AI 말대로라면, 곧 천마가 자신을 찾아올 터였다.
***
설휘는 벽곡단으로 끼니를 가볍게 때우며, 명상으로 하루를 보냈다.
조용히 마음을 다잡고 하는 수련.
처음엔 좀 더 높은 심득을 갈구하기도 해봤지만, 성과는 좋지 못했다.
몇 달이 정말이지 쏜살같이 지나갔다.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배처럼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심란한 마음을 그저 가라앉히기 위해서 명상을 했다.
어떨 때는 불가에서 말하는 참선의 자세를 취해도 보았고, 때로는 운기조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마음 한구석에서 답답함을 느끼기는 매한가지였다.
“뭔가 삶이 덧없어지는구나.”
설휘는 이제까지 겪어온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삼류에서 일류로, 일류에서 초일류로 이동하는 과정은 정말이지 눈물겨웠다.
하지만 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절정에서 초절정, 그리고 초마의 경지까지는 정말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
그 가운데에선 무공의 심득도 있었지만, 상승무공을 얻음으로써 상승의 속도가 가팔라졌다.
‘그게 문제였지.’
설휘는 마음을 굳혔다.
다음 생에는 더는 어떤 무공에 기대지 않기로.
완전히 새롭게 무공을 이해하기로.
그러기 위해서, 오랫동안 수련했던 인물을 사부로 모시기로.
마치 곤마 같은…….
‘가만.’
설휘는 거기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AI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것이 ‘천마육성 시뮬레이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의 목적은 천마를 육성하는 것.
달리 말하면.
“그게 꼭 나일 필요가 없는 거잖아?”
아마도. 아니 확실히 그럴 것이다.
이건 천마를 육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 굳이 본인이 아니라도 누군가 ‘천마’가 된다면.
달리 말해, 천마 플레이어를 죽일 수 있다면.
자신은 이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곤마. 그의 힘이라면…….”
설휘는 머리털이 쭈뼛 섰다.
천살성을 가진 천재 중의 천재.
그의 힘을 이용해, 천마 플레이어를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곤마의 힘의 끝은 없어 보였다.
수치에도 나타났듯이 그는 무한의 강함을 지닌 인물이었으니까.
“지금 내 능력치는 어느 정도일까?”
설휘는 거기서 문득 궁금해졌다.
턴제를 사용하면 본인의 능력을 수치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근래 자신의 능력을 볼 기회도, 그런 여유도 없었기에.
과연 극마에 오른 상태의 능력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던 것이다.
설휘는 시선을 위로 올렸고.
전투방식 <턴제>
전투방식을 바꿨다.
그 순간.
눈앞에 생성된 자신의 능력치가 보였다.
[State Summary, 상태 간단 요약]
설휘 [천마제자 저격자]
경지 극마 초입
체력 1억 8천/1억 8천
내공 1억 3천/1억 3천
전투력 3천만 ~ 1억
“허…….”
설휘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극마란 것이 이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특수 기술은 내가 뽑아낼 수 있는 힘의 최소 열 배는 될 터.”
아니, 그보다 더 될지도 몰랐다.
대멸천분공은 극마의 통달 수준이던 3명의 고수를 일거에 날려버렸다.
“그럼 천마는 어느 정도…… 어?”
다시 한번 분석하려던 설휘는 멈칫했다.
한 인영이 언제 다가왔는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놈이군.”
호리호리한 체격.
하지만 그가 풍기는 기운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나의 놀이를 방해하기 위해 나타난 암자(暗者)가.”
‘처, 천마!’
설휘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녀석의 능력치가 설휘의 시야에 투영되고 있었다.
[State Summary, 상태 간단 요약]
천월성 [마교주, 서열 1위]
경지 탈마
체력 999억/999억
내공 999억/999억
전투력 999억
그 수치는 잠깐이나마 설휘의 눈을 의심하게 했다.
시기상 2년이 지나려면 두 달은 더 남았을 텐데, 벌써 이렇게 자신을 찾아올 줄이야.
“누구냐. 너는…….”
천마의 물음에 설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천검이 손이 닿을 위치에 있다는 걸 그나마 위안 삼으며.
“한번 맞춰봐.”
전투방식 <자유제>
어차피 이리된 거, 이번 생만큼은 특수 능력을 모조리 활용할 생각이었다.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어차피 이것을 이용하지 못하면, 놈의 공격을 일초지적도 받아내기 어려울 테니까.
“플레이어인가?”
“……!”
순간, 설휘의 눈이 커졌다.
놈이 그것을 어떻게 아는 것인가. 혹시 이번 생에는 플레이어가 천마의 몸에 들어간 것일까?
그런 의문이 얼굴에 드러난 것일까. 상대가 말했다.
“그리 놀랄 것 없어. 인과율에 일정 시간이 흐르면, 너희들은 존재는 어떤 경우로든 밝혀지기 마련이거든.”
“내 존재를 알고 있는 걸 보면, 너 역시 플레이어인가?”
설휘는 물었다.
이자의 정체가 AI가 말했던 그인지가 궁금해졌다.
“난 아니지. 본좌는 너희 같은 플레이어가 아니라, 순수하게 이 땅에서 태어나 무공을 수련한 사람이다. 그리고…….”
“…….”
“너희 같은 존재를 없애기 위해 이제껏 기다린 몸이다.”
“우리 같은 존재?”
“그래.”
스윽.
천마, 천월성은 검을 꺼냈다. 실로 아름다울 정도의 곡선을 자랑하는 검.
그는 인간의 눈과는 다른, 두터운 눈꺼풀을 들며 말을 이었다.
“신(神)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플레이어들. 난 그런 이들을 멸하라고 명령을 받았다. 그것이 본교의 혼란을 막고, 원치 않는 피해를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
“오늘로써 난 그 임무를 행하려 한다. 검을 들어라. 여기서 종지부를 찍자.”
‘이거 뭔가…….’
설휘는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천마라는 자는 왠지 모르게 자신이 옳고, 설휘나 AI들이 세상의 악이라는, 그러니 제거한다는 당당함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이제껏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고, 피바다에서 고통스럽게 만든 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래. 어쨌든, 종지부를 찍어야겠지.”
설휘는 검을 들었다.
저게 위선이건 아니건, 이번 싸움에 많은 것이 걸려 있다.
탈마가 어느 정도로 강한 건지, 과연 특수 기술은 어느 정도 먹히는 건지.
그걸 알아야 다음 생에 목표를 상정하며 달려갈 수 있었다.
휘오오오오-
바람이 불었다.
천마의 눈빛은 고요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이것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소회.
녀석을 자신을 통해 운명의 매듭을 짓고 싶어 한다는 걸.
“먼저 가지.”
이쯤 되면 거칠 것이 없었다.
설휘는 용천검을 통해 곧장 특수 기술을 발동시켰다.
[절세풍검을 사용합니다.]
도처로 퍼져나가는 검은 소용돌이.
거대한 기암괴석이 파괴되고, 일부는 하늘로 솟아오르며, 설휘가 쏟아내는 힘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설휘는 그 영향권 안에 있던 천마도 당연히 휘말릴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녀석은.
“자연의 기운이라……. 극마의 극한까지 도달했나 보구나.”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편안하게 서 있었다.
처음엔 잘못 보았나 싶었다.
한데 다시 살펴보니 자신이 만든 검은 폭풍들이, 거짓말처럼 그의 주변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슨!’
설휘는 곧장 그에게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곧장 특수 기술을 또다시 발동시켰다.
[빙원핵축압을 사용합니다.]
귀이이이-
귀울음이 일고 그와 함께 완벽히 결박된 시간.
그 속에서 설휘는 아주 천천히 검 끝을 그에게 고정시켰다.
살마에게 일격을 가한 한 수.
그러나 이전보다 거리가 훨씬 더 가까웠기에, 몇 배나 더 강한 위력을 쏟아낼 터.
[지옥멸절공을 사용합니다.]
결박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둑어둑한 보랏빛이 꿈틀거렸다.
그때까지 천마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적어도 이번에는 피해를 입히리라 생각했다.
츠츠츠츠측.
천월성의 지척까지 다가간 보라색 불꽃.
동시에 시간의 결박이 풀리던 그때.
지옥불이 그의 몸체를 완벽히 덮어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천마는 요지부동이었다.
“하압!”
그런데.
갑자기 그를 덮치려던 지옥불이 소멸되어버렸다.
그저 한 동작. 검을 휘두르는 것에 의해서.
“……!”
“화온마공의 극의. 그 정점엔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불꽃을 생성해내지.”
경악하는 설휘에게, 천마가 가르치듯 말했다.
“허나, 그 역시 자연계에 들어온 이상, 본연의 힘을 잃는 법이다.”
“하압!”
설휘는 이번엔 천마군림보를 펼쳤다.
천마를 중심으로 열 개의 환영이 그 주변을 덮었고, 천월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걸렸어.’
의도적인 공격이었다.
아직 놈이 방심하고 있을 때에, 필살의 수를 펼칠 생각이었다.
[대멸천분공을 사용합니다.]
새파란 불꽃은 공중에서 띠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설휘는 천마군림보를 통해 천월성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이윽고 불꽃의 띠는 완성되었고.
“이것도 막나 보자.”
설휘는 발동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연거푸 특수 기술을 사용했다.
[절세풍검을 사용합니다.]
쿠와아아아앙-! 콰아아아아!
바닥에서 거대한 화염이 치솟아 오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
그 속에서 한순간 무적이 된 설휘는 화마가 걷히자마자 고개를 들었고.
“……!”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녀석은 이미 저만치 멀리 벗어나 있었다.
“이게 떨어지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언제부터 들려 있었는지, 그의 손끝에는 나뭇잎이 잡혀 있었다.
“잘 보거라.”
투욱.
녀석은 나뭇잎을 놓았다.
나풀나풀.
떨어지던 나뭇잎이 그가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멈췄다.
[빙원핵축압을 사용합니다.]
설휘의 특수 기술 때문이었다. 놈의 움직임을 쫓기 위해.
“……!”
그그그극.
균열이 나고 있었다.
더욱이 천마의 몸은 완벽하게 차단된 공간 안에 들어오지 못했음에도 괴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조각조각, 온몸이 잘려나간 듯한 특이 현상이 설휘의 눈에 아로새겨졌고.
마치 빙원핵축압이 만들어낸 절대공간. 그 안과 밖에서 시간의 흐름이 비정상적으로 흐르는 현상처럼 느껴졌다.
째애앵!
그런 빙원핵축압의 특수 능력이 사라지자, 설휘는 입을 쩌억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적은 이미 눈앞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끝이군.”
패애애애액!
설휘의 목이 떨어졌다.
“…….”
그럼에도 설휘의 눈은 계속 나뭇잎을 보고 있었다.
아니, 계속 거기로 시선이 갔다.
그 자리 그대로.
공중에서 멈춘 나뭇잎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