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임문(臨文) (2)
석 달.
많다면 많은 시간이나, 시험을 준비하는 설휘에겐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책 이십만 권.
물리적으로 그냥 읽는 것도 가능한가 싶은데, 이 걸 다 암기한 후 나아가 이해까지 해야 한다니.
그야말로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곤마가 이 많은 걸…… 다 집필했다고?”
책장을 보니 기가 질렸다.
무공서로 빼곡하게 가득 찬 데다, 심지어 종류별로 분류가 나뉘어 있는 것이 중증의 결벽증 환자나 할 법한 정리 수준이었다.
예전에 여기를 지날 때는 그저 그냥 지나가기만 했다. 아무려면 이 많은 책들을 다 읽을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툭. 툭.
“여러 가지 의미로 사람 같지가 않군.”
방대한 양의 장서를 올려다보며, 설휘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천살성이 분명 대단한 능력인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슨 경험을 했기에 이 방대한 지식을 머릿속에 쌓아 놓고 있는 것일까.
쌓인 서책들을 보니, 그저 무공서만이 아니라 천문과 잡학, 기술, 서화(書畫) 지리 같은 것도 보였기 때문이다.
이십만 권.
석 달이라는 기간 안에, 이 많은 분량의 책을 읽고 요해를 이해하라니.
“이건 불가능해.”
설휘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그냥저냥 무공서만 골라서 읽어도 다 읽지 못할 터였다. 하물며 금기서화 같은, 그 자체가 깊은 수양을 요구하는 다양한 것들을 고작해야 석 달?
무슨 수를 써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가만…….”
하지만 생각해 보니, 한 가지 가능한 수단이 있기는 있었다.
바로 시스템.
“단순히 외우는 것 정도라면…… 굳이 시스템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도 없어.”
과거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결정적 이유.
그건 오로지 힘을 위해 상승무공을 익히다 보니, 극마에 도달하고 나서 길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닌, 주입된 학습으로 인해 어떻게 강해져야 하는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던 것.
그래서 이번에는 그런 길로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남이 간 길. 상승무공을 그저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건대, 만약 자신이 수많은 무공을 알고 있다면, 거기서 자신만의 길을 찾는 것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오히려 더 나을 수 있다.
수많은 원류를 이해하고 거기서 최상의 방식, 혹은 자신에게 받는 수련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일단 해보자. 딱히 방법이 없으니까.”
설휘는 마음을 정하고 다시금 책자를 이리저리 매만지기 시작했다.
혹여나 수많은 책 중에 단번에 익혀지는 서책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건드려본 것이다.
“예전이었더라면 만지기만 해도 됐는데…….”
하지만 특별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과거 회차에는 특정 무공을 배울 때 서책에 빛이 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현상이 없으니, 이런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이거 분명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설휘는 고심했다.
상대의 무공을 보는 것만으로도 습득 가능한 시스템.
그렇다면 방대한 양의 책이라도 시스템 안에는 모두 들어있지 않을까?
‘가만.’
순간 한 가지 떠오른 방법이 있었다.
그래서 한 책을 부여잡고, 그냥 빠르게 훑었다.
내용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빠르게 읽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의 글을 다 읽자마자.
[검상 치료법의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
순간 눈앞으로 떠오르는 글귀에, 설휘의 얼굴이 밝아졌다.
[금창(金創)의 경우 피가 적게 나오는 초기에는 지혈서(止血絮)로 창구를 잘 막으면 피가 멎는다. 근이 끊어지거나 다양의 피가 흐를 때는 여성금도산(如聖金刀散)을 붙이고 지혈서(止血絮)로 창구를 막아 피가 멎게 하여야…….]
그리고 단번에 머릿속으로 많은 양의 정보들이 들어왔다.
검상 치료법.
설휘는 손에 든 책의 제목을 확인했다.
도검에 의해 신체의 손상이 있을 경우 치료하는 방법을 적은 외과 의술서.
“정말이지…….”
설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저 내용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암기되는 능력. 시스템이 제공하는 엄청난 능력을 또 하나 발견한 것이다.
“모르겠구나.”
하지만 설휘는 이 변화가 그저 즐겁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이만한 능력을 본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겁이 났다.
“이건 나에게 기연인지, 저주인지를…….”
***
본격적으로 책을 잡자, 단 두 시진 만에 삼백 권의 책을 훑을 수 있었다.
그냥 한번 슥 훑어보면 머릿속에 내용이 다 들어가니, 속도도 빠르고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서책이라고 해서 다 빽빽한 게 아니었다.
책 중에는 분량이 채 열 장이 넘지 않는 서책도 있었고, 제목조차 쓰여 있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주로 잡학과 기술, 지리와 관련된 것들이 그러했다.
그 이후로 설휘는 본격적으로 책을 훑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하루에 이천 권 넘게 소화한다고 해도 무려 이십만 권에 달하는 양이다.
잠자는 두 시진을 제외한, 하루 아홉 시진 이상을 속독으로 읽어내며 무려 석 달 가까이 그 일을 반복하자.
“으아!”
기어코 책장 안에 있는 이십만 권을 모두 다 훑는 데 성공했다.
서책 이십만 권의 방대한 양의 지식이 머릿속에 아로새겨진 것이다.
“곤마는 이 많은 걸 머릿속에 담고 있단 말인가?”
설휘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서고 안에는 그야말로 없는 게 없었다.
시험문제를 내겠다는 분야를 제외하고도 건축, 기술, 주류, 차 등. 심지어 태어난 아기가 몇 개월부터 무엇을 하는지, 왜 우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소상히 적힌 책도 있었다.
“아마도 천살성 때문이겠지.”
곤마가 이토록 학습에 몰두했던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무공과 관련된 서적만 해도 오만 권에 육박했다.
그 안에는 정사마는 물론이고 천축, 황교, 서천(西天)의 무공까지 총망라해 집필되어 있었다.
왜 이렇게 무공에 집착한 걸까? 이 모든 건 천살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산물이지 않을까.
‘이 모든 걸 익히고도…… 길을 찾지 못한 거겠지.’
자포자기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과거에 분명 누구보다 치열하게 천살성을 극복하려고 했다.
여기 다양한 무공에는 그의 삶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혈세천하(血世天下) 같은 무공은 정말이지…….”
삼백 년 전, 강호에는 혈마라는 초인적인 무인이 있었다.
마공보다 더 극단적으로 원기(元氣)를 태워 힘을 얻는 무공.
극단적인 무공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안을 들여다본 것을 보면, 곤마의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하늘이 내린 저주받은 운명을 극복하려는 의지 말이다.
“천축, 밀종의 무공도 그럴 거고…….”
아무런 제목도 적혀 있지 않은 책자에서 발견한 무공. 백랍천공(白蠟天功) 같은 경우는 구결을 암송해야만 운공할 수 있는 특이한 기공.
거의 주술에 가까운 무공인데, 곤마는 거기까지 손을 댄 것이다.
“그러고도 결국 포기한 건가…….”
하지만, 이 많은 무공을 다 익혀도 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과거의 절대고수들이 집대성한 무공도 천살성 앞에서는 그저 무의미한 것들일 뿐.
원 역사에서, 곤마는 결국 일제자나 이제자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래도 일말의 도움은 되었을 테지.”
그나마 열여섯 이후로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던 걸 보면 소득이 없지는 않았으리라.
설휘는 더는 이 부분에 대해서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끔찍할 정도로 방대한 서적 양은, 곤마가 천살성을 벗어나기 위해 쳤던 몸부림처럼 보였기에.
“그나저나 시험이 이리 쉽진 않을 것 같은데……?”
암기를 끝내고 난 후, 설휘는 이 부분에서 다시 고민했다.
첫 번째 시험은 난이도가 말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시험도 그러할 것이다.
단순히 시스템의 능력으로 극복하기 어려울 만큼.
“그냥 외운 걸 읊으라고 하는 게 답이 아니란 얘기겠지.”
설휘는 여기서 곤마와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곤마는 자신에게, 어떻게 이렇게 강해질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표했다.
당시엔 천미려의 제자라는 것으로 답을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 의문이 거기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고작 석 달에 책 이십만 권.
이 막막한 시험에 통과하고 나면, 그때는 또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물음이 날아들 것이다.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틀릴 수도 없다. 그건 시험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할 터이니.
“고민해 보자. 아직 며칠이지만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설휘는 한곳에 앉아 운기를 하기 시작했다.
가끔 답을 찾기 어려울 때면 이렇게 명상을 하는 게 도움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자신을 가졌다.
어떤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고 해도, 이 시험은 반드시 통과할 거라고.
***
시험 당일.
설휘는 이날 곤마의 최측근 인사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얼굴은 복면으로 죄다 가린 채 눈만 내어놓은 여덟 명. 그마저도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있을지를 확신할 수 없는 인물들이리라.
‘비밀무사다!’
죄다 복면을 하고 있었음에도 설휘는 확신했다.
아주 예전의 전생에, 비밀무사라고 초대되었던 고수들. 그들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
제각기 자기 일들을 하다, 이번 시험의 출제를 위해 곤마가 특별히 부른 모양이었다.
“설휘. 비밀무사 두 번째 시험이다. 총 열 번을 물을 것이며 그에 대한 답을 하면 된다. 참고로 몇 개를 맞추느냐로 합격 여부가 결정되는 게 아니니, 한 문제 한 문제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하거라.”
미리 준비해놓은 커다란 탁자 주변에 의자가 놓이고, 복면인들과 곤마가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지금 규정을 말하고 있는 중년인은 이전에 보았던 인물이었다.
“또한 이 시험은 임문이 허락되니, 말하기 어렵거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경우, 원하는 책을 펼쳐봐도 된다. 단, 시간은 한 문항당 한 식경을 내줄 터이니 그를 넘겨서는 아니 된다.”
“알겠습니다.”
설휘는 담담히 대답했다.
차츰 분위기가 고요해지자, 곤마가 한쪽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복면인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는 신체의 전신혈도에 관해 물어보겠다. 임문하겠느냐? 배강하겠느냐?”
시험 문제를 내기 전에 미리 정하라는 것이었다.
“배강하겠습니다.”
“…….”
문제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미리 알고 있었는지, 복면인은 상당히 의외라는 눈빛을 보였다.
그는 슬쩍 곤마를 한 번 바라본 후, 조금 후에 입을 열었다.
“경맥유주(經脈流注)가 무엇이냐?”
“원류를 묻는 것입니까? 가공된 교법서를 묻는 것입니까?”
설휘는 되물었다. 이는 정종무공과 본교 무공의 접근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원류를 묻는 것이다.”
예상대로 복면인의 질문에는 함정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 수준은 설휘에겐 어렵지 않았다.
“답하겠습니다. 경맥유주란 경맥이 시간 순서대로 흐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 몸에는 열두 개의 경맥이 있고, 이를 십이경맥으로 부릅니다. 이는 따로 십이정경이라 부르며, 십이정경의 처음은 수태음폐경이라 하며 마지막 족궐음간경까지의 흐름을 말합니다. 수태음폐경에는 좌우로 모두 스물두 개의 혈도가 있어, 그 흐름을 인시이며 정경의 앞 글자인 폐 자와 뒤에 시간 인을 합쳐 폐인이라고 부르며, 그다음 수양명대장경은 묘시를 대 자를 따고 시간 묘 자를 따서 대묘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용어를 폐인, 대묘, 위진, 비사, 심오, 소미, 방신, 신유, 심술, 삼해, 담자, 간축이라 하며 이런 순으로 우리 몸을 지키는 위기(衛氣)는 쉬지 않고 하루에 50바퀴를 돕니다. 거기에 기경팔맥이 존재를 더하면 이를 경맥유주라 합니다.”
“……!”
“……!”
질문했던 비밀무사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답의 준수한 수준은 차치하고 기의 흐름을 말하는 기초의 원론이 그를 당황하게 했다.
지금 설휘가 말한 것은 정종무공의 이해도.
특히 몸속의 경맥유주의 순서는, 마교가 아닌 소림에서 말하는 경락의 이해를 고스란히 읊은 것이다.
원류라는 것 역시도 마교 입장에선 다르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엔 내가 묻지.”
다음으로 손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복면인.
먼저 출제한 시험관의 당황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그가 질문했다.
“수나라의 왕통(王通)의 후손이며 당나라의 시인인 왕발(王勃)에 관해서 묻고자 한다. 이번에도 배강할 텐가?”
이번 출제는 시(詩)였다.
무공을 담는 신체에 이어, 거침없이 방대한 주제로 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예.”
그럼에도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있는 그 특유의 표정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배강하겠습니다.”
꺼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