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천미려 (1)
설휘는 지하창고에서 저녁을 맞이했다.
낮에 있었던 두 번째 시험이 끝난 뒤, 곤마와 복면을 쓴 출제자들은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 별다른 언질을 주지 않아서 무작정 대기해야 했던 것이다.
“통과한 건지, 실패한 건지…….”
하염없이 기다리며 설휘가 푸념을 했다.
딴에는 준비를 많이 했는데, 그게 곤마의 마음에 들었을지 어떨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석 달 동안 준비한 게 도움은 된 건지…….”
책 이십만 권을 달달 외우며 준비한 것보다, 마지막에 곤마가 낸 질문이 훨씬 더 컸다.
하기야, 설휘가 머릿속에 욱여넣은 지식이라고 해봤자, 곤마는 이미 손금 보듯 뻔히 다 알고 있을 터.
그저 아는 게 많다고, 암기력이 좋다고 자랑해 봐야, 천살성인 곤마에게 큰 감흥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설휘는 곤마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과거에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답을 완성했다.
달리 말해, 과거에 경험하지 못하면 결코 내놓을 수 없는 답.
“그런데도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문제는 이거였다.
떨어지면 다시 도전하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그럼 이번 생은 어찌해야 하는가?
비밀무사가 되지 못했다고 굳이 죽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을 테니까.
저벅. 저벅.
‘어.’
한참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발자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끼이이이.
그리고 잔뜩 긴장한 설휘의 눈에 비친 인물은…… 곤마였다.
“잘 있었느냐?”
표정은 예상외로 밝았다. 혹여 불편한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왜 그리 표정이 어두우냐?”
자신의 얼굴이 더 굳어있는 듯했다.
“그…… 시험은 어찌 된 건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당연히 합격이지. 그리 완벽한 답을 해놓고 떨어진다는 게 말이 되느냐?”
말할 필요도 없다는 투였다. 통과란 얘기에 설휘는 그제야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뒤이어 곧장 따르는 의문.
“그럼 셋째 시험은…….”
“그래서 온 거다.”
곤마는 웃어 보였다.
그는 손짓을 하며 가벼운 걸음으로 먼저 걸어 나갔다.
“따라오너라. 보여줄 것이 있으니.”
***
곤마가 안내한 곳은 자신의 집무실. 건물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 층이었다.
어둑해진 밤 풍경에 길을 밝혀놓은 횃불들.
간격을 놓고 지어진 건물들과 저편에 서 있는 산맥이, 잘 절제된 본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했다.
“보기 어떠냐?”
“멋집니다.”
곤마의 말에 설휘는 가감 없이 느낀 대로 말했다.
전생에서 그의 집무실에 들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런 야밤에 경치 구경하듯이 들른 것은 처음이었다.
한동안 야경에 감탄하며 창 아래를 보던 설휘 옆으로, 곤마가 다가오며 말했다.
“셋째 시험은 동행(同行)이다.”
“동행이라 하심은?”
“음…….”
곤마는 시선을 돌렸다. 잠깐 뭔가 생각을 하던 그는 곧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교주님의 다른 제자들에 비해 따르는 수하들이 많지 않다. 극마에 오른 고수들은 전무하기까지 하지.”
“그거야 사제자님이 교주님의 제자가 된 것이 늦어서…….”
“사실이지만, 그게 사정을 봐 줄 일이 되지는 못한다. 본교에서 투쟁이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것이니까.”
설휘는 더 말하지 못했다.
어설프게 위로해 봐야 오히려 더 괴롭기만 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비밀무사는 내 마지막 보루인 게지. 내게 가장 취약한 부분을 보조해 줄 수 있는 실력자들. 해서 그런 그들의 마지막 시험. 동행의 의미는 나에게 뛰어난 자를 천거하는 것이다.”
‘아.’
설휘는 그제야 무슨 시험인지 대략 감히 왔다.
인재 영입.
어떤 인물을 데리고 오는가에 따라, 합격 여부를 결정하는 모양이었다.
“어떤 이도 괜찮은 겁니까?”
“본교에 소속된 인물이라면 누구라도 좋다. 무력이 뛰어나면 더더욱 좋고, 어떤 분야에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해도 좋다. 물론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도 괜찮다.”
“……?”
“내가 오랫동안 눈여겨 왔던 인물을 알려줄 테니까.”
그때였다.
<시간을 기록하시겠습니까?>
갑자기 뜨는 문구. 곤마가 마지막 시험을 설명하는 와중에 이것이 나타났다.
■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 천력 98년, 7월 마지막 날.
□ 천력 98년, 본 스토리_운명의 날.
‘이거, 쉽지 않은 상황이 주어지겠구나.’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런 선택지가 주어지고 나면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들이 뒤따랐다.
자연히 긴장할 수밖에.
<‘천력 95년, 제2장-1.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의 칸에 기록하시겠습니까?>
설휘는 첫 번째를 선택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번 생은 다시 앞으로 돌아갈 필요 없이, 성공적으로 수행해오지 않았던가.
[첫 번째에 기록했습니다.]
■ 천력 95년, 제2장-5. 동행, 그로 인한 수많은 갈래 길.
‘수많은 길이라.’
내용이 바뀐 첫 번째 칸. 설휘는 그걸 읽으며 왠지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자, 선택하거라.”
곤마의 말과 함께 다시 이어지는 글귀들.
<아래의 지문 중에 선택하세요.>
▶ 곤마의 추천을 받는다.
▷ 본인이 생각해둔 인물로 정한다.
“음?”
설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곤마의 추천을 받는 것 외에도, 본인이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나의 선택이라?’
곤마의 추천보다 이것이 더 궁금했다. 지금의 설휘, 자신이 추천할 수 있는 이는 어떤 이가 될까.
그것 때문에 설휘는.
<‘본인이 생각해둔 인물로 정한다.’를 선택하셨습니다.>
두 번째를 선택했고.
그러자 눈앞에 몇 명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 천미려 [성공 시 보상 : 목숨 100개]
▷ ???<아직 만난 적이 없습니다.>
▷ 왕모력 [성공 시 보상 : 목숨 10개]
▷ ???<아직 만난 적이 없습니다.>
▷ 음무기 [성공 시 보상 : 목숨 3개]
▷ 송화 [성공 시 보상 : 목숨 1개]
총 7명.
그중에 두 명은 만난 적이 없다는 표시가 떴다.
익숙한 이름들도 보였고, 전혀 알 수 없는 정보들도 적혀 있었다.
‘천미려가 있다고?!’
그중에서 설휘의 시선을 확 끄는 인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가 있었다.
‘어떻게…… 그녀가 선택될 수 있는 거지?’
지금 이 목록에 등장한다는 건, 본교에서 만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제껏 지난 삶에서, 3년하고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습조차 보이지 않던 천미려.
그녀를 직접 만날 수 있다니.
하지만 설휘는 선뜻 선택할 수 없었다.
그건 바로 목숨의 수 때문이었다.
[목숨 100개]
‘너무 많다.’
성공한다면 목숨 100개?
이제껏 극마의 고수들과 마주하며 10개나 그 이상을 보긴 했어도, 이건 너무한 수치다.
싸우지 않고 사람을 추천하는 것이라서 다른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힘든 일이라 보상이 많은 것일까?
6…… 5……
‘선택해야 해.’
설휘는 왕모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싸워 본 적이 있어 잘 안다. 이 녀석이라면 중요한 서적.
천일관 안에 있는 무공서 하나 건네주면 협력할 수 있다.
그럼에도 천미려라는 이름이 주는 위압감.
이제껏 자기 스승이라며 남들을 속이는 데 들이밀었던, 그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걸까?
‘그녀를 설득하기만 하면…… 아주 죽여주는 건데.’
무모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은 분명 존재한다.
보상 목숨이 100개라는 것을 보아, 분명 위험할 것이다.
목숨 몇 개는 우습게 소모가 되겠지만, 그래도 하고 싶었다.
이제껏 설휘가 그녀의 제자라고 쳐 온 허풍도 있거니와, 소신수마공의 권능이라 할 수 있는 시간 결박.
그걸 만든 인물, 그 결박을 부숴버린 천마를 상대로 어떤 견해를 전해줄지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하자. 이걸로.’
분명 이 길도 AI는 지나갔을 것이다.
그간의 경험으로 선택지보다 더 어려운 것은 바로 삶. 누군가 정해놓은 정답이 아닌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미려’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설휘가 선택하자.
“정말인가?!”
이번엔 곤마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다만……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어떤 것? 말만 해라. 그분을 데리고 온다면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마.”
곤마가 즉각 대답했다.
절대고수의 개입. 이것은 기존 제자들 간의 쟁투 구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미려가 곤마에게 온다면, 정계에는 아마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사부님이 마지막으로 어디에 발자취를 남기셨는지 좀…….”
“……응? 네가 모르느냐?”
곤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얼굴로 되물었고,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제가 배우고 나온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거기다 워낙 성미가 성미이신지라, 어디에 계시는지 지금의 저로서는 도통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해서…….”
“하긴, 워낙에 소탈하며 신출귀몰하신 분이시니.”
적당히 먹히지도 않을 변명을 했는데…… 곤마는 오히려 그걸 믿어 버렸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 달 정도, 최대한 흔적을 찾으마.”
곤마가 잠시 생각 후에 입을 열었다.
“너에게 주어진 건 본래 반년 정도다. 거기서 한 달을 소요하면 다섯 달. 그 안에 그분을 찾고 설득해 데려와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하겠습니다.”
곤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 무사를 불러 설휘에게 거처를 안내하라고 명하고는 바로 방문을 나갔다.
한시가 급하다는 듯이.
‘어?’
설휘는 안내한 거처를 보자 눈을 의심했다.
이곳은 놀랍게도 예전 곤마가 배려해준 그 장소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전과 똑같이 적용되는 건가?”
설휘는 일단 침상으로 걸어가 몸을 뉘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하면 시간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 안 되네?”
변화가 없었다. 혹여나 하여 목함 아래에 있는 것도 보니, 그것 역시 똑같았다.
심지어는 옷장 안도 그랬다.
“거 참.”
설휘는 자리에 앉았다. 아마도 난이도가 높아 이런 편한 기능들이 작동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뭐, 상관없지.”
설휘는 의자에 앉아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려보았다.
천미려.
만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차후의 문제다.
우선 그녀를 설득하기에 걸리는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애초에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에게 자신의 사부 행세를 하도록 설득해야 하고, 관심 없었던 후계자 쟁투에 끼어들어 곤마를 위해 같이 싸워주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 정도니 목숨 100개가 붙었겠지.’
원래라면 불가능하다. 그건 설휘도 안다.
그럼에도 그녀를 선택한 것은 ‘앞으로 나아가야 길’이기 때문이다.
사부의 존재.
이제껏 설휘는 정식으로 무공을 배우지 못했다.
스스로 깨닫는 것도 어느 정도다. 제대로 된 강호의 고수들은, 대부분 사부부터 뛰어나지 않은가.
쉽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천미려를 설득해서 정식으로 소신수마공의 무공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다면.
자신의 무위에 분명 큰 깨달음이 있으리라.
“일단은 한 달. 그동안 수련이나 해보자.”
설휘는 그때부터 촌각을 아껴가며 운기조식을 했다.
설휘의 그의 무공 수준은 초절정. 회월동 안에서 괴수들과 싸우다 보니 제법 올라 있었다.
과거와 다른 점이라면, 마공을 쓰지 않았다는 것.
또한 몸 속에 순수한 기를 받아들인 후 화공이면 화공, 빙공이면 빙공, 원류에 가까운 성질의 무공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기를 품었던 과거와 내공 심법의 운행도 당연히 달랐다. 지금 설휘의 기운은 마기 특유의 흉폭함이 거의 없어, 정순한 쪽에 가까웠다.
“슬슬 극대화할 방법을 찾아야 해.”
때문에 기존 내공 심법의 효율을 더 올릴 필요가 있었다. 이번 생은 무예의 바닥부터 시작한 덕에 지반은 단단했지만, 운용의 묘는 거의 기초공에 가깝다.
절세의 마공 혹은 심공을 얻기 위해서는, 화공만 하더라도, 더 위력을 강하게 하면서 내공 소모는 오히려 줄이는 방법. 그런 것이 있어야 했다.
여기선 어느 쪽을 선택할 건지. 기준을 정해야 했다.
“총 네 갈래 길이구나.”
천일관의 책자를 보고, 설휘는 여기서 자신의 가야 할 길이 넷 정도라는 걸 깨달았다.
첫째. 태극의 힘으로 음양의 기운을 조화스럽게 만들 것.
무당의 기본 묘리를 알고 있는 설휘에게는 이 방식이 가장 편했다.
둘째. 화공이나 빙공 등. 이 기운들을 마공과 결합하여 더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
여기서 마공의 경우, 상승무공이 필요하다. 화공이나 빙공은 수단일 뿐이지, 기준이 될 수 없으니까.
셋째. 순수하게 선가(仙家)들의 연단(煉丹)법을 통하는 방법.
해 본 적은 없지만, 책에 따르면 기운을 가장 자연에 가깝게 만든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만 이 경우 식습관까지 조절하는 건 필수로 보인다.
넷째. 내공과 외공의 힘을 균등하게 두는 음양의 조화법.
천일관에서 찾아본 내용에 따르면, 소림승들이 많이 하는 수련법으로 체력과 정신을 합일시키는 수련법이다.
“세 가지가 정종무공 쪽이고, 한 가지가 마공 쪽이구나.”
물론 마공에서 추구하는 방식이 하나 있다.
상승무공을 익혀 그 무학이 추구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
하지만 이 방법은 설휘가 실패했기에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렇게 종일 고민하던 설휘는 그중 하나를 선택했고 수련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한 달을 사흘 남겨놓은 때에.
“따라나오너라.”
설휘는 자신을 찾아온 곤마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두렵기도 하고 고대하기도 했던 인물에 대한 것을 곤마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천미려 님의 흔적을 찾아냈다.”
이제껏 사칭하고 다녔던.
그리고 이제는 진짜로 만들어야 하는 사부님의 존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