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천미려 (2)
설휘는 곤마를 따라나섰다.
어느새 본교를 벗어났고, 남쪽으로 한참을 이동했다.
점점 가파른 지대가 나왔고, 신법을 써서 며칠을 이동하여 도착한 그곳에는 거대한 설산(雪山)이 펼쳐져 있었다.
후에 알았지만, 이곳은 신이 하강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대설산맥(大雪山脈)이었다.
청해 파안객랍(巴顔喀拉) 산맥에서 남쪽으로 연결된 산줄기를 말하는 곳으로, 사천으로 뻗어나간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가장 높은 공가산(貢口夏山)이 나온다.
여기서 ‘공’은 오랜 세월 녹지 않는 만년설을 뜻하고 ‘가’는 백색을 뜻한다.
높은 산 대부분이 백색의 만년설을 띠고 있던 것이다.
“여기가…….”
설휘가 운을 떼자, 곤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적으로 그분을 발견한 건 아니다. 대원들의 말로는 이곳 너머에 빙공을 쓴 괴인의 흔적이 있다고 했으니까.”
“아…….”
대설산맥은 남북으로 칼날 능선이 길게 뻗어있고 동서로는 무려 천 리 가까이 수직고(垂直高) 형태의 벽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하나 더. 이와 유사한 빙공의 흔적은 곤륜산맥 북단. 가장 높은 봉우리라 일컬어지는 목자탑견산(木孜塔格山)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하니……. 이 근방에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곳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첩첩산중이다.
천미려의 흔적이 아니라 빙공의 흔적이라 알려진 곳이 무려 두 곳.
특히 대설산맥뿐만 아니라, 산새가 험준하기로 유명한 곤륜산맥의 북단 쪽이라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설휘는 불평보다 감사한 마음을 먼저 드러냈다.
사실 묻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신경 썼는지를 알 것 같았다.
고작 한 달 만에, 이런 험준한 산맥을 뒤져 빙공의 고수인 천미려의 흔적을 발견했다니.
이는 본교의 무사들뿐만 아니라, 세외에 살고 있는 유목민까지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알아낼 수도 없었을 터이니.
“자. 받거라.”
곤마는 양피지 두 장을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든 설휘는 약간의 감정이 동했다.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 때문이 아닌, 그걸 건네주는 곤마의 눈빛.
절절한 마음을 설휘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절실하단 말인가…….’
절대고수.
다른 제자들과 달리 곤마 주위에는 극마고수라 말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천미려 같은 절대고수가 합류한다면, 정세는 급변할 것이다.
천군만마를 얻게 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반드시…… 사부님을 찾겠습니다.”
설휘는 다시 한번 약속했다.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내기로.
곤마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반드시 찾아야 하는 인물이었다.
***
험준한 지대. 거기다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의 눈보라와 칼바람이 설휘의 시야를 끊임없이 방해했다.
곤마가 내민 약도를 보고 걸어감에도, 기준점이 되는 곳이 없으니 위치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후우, 후우.”
설휘는 호흡하며 하단전의 내기를 순환해 몸을 보호하는 데 주력했다.
한 달간의 수련.
그 짧은 시간에 설휘는 이미 입신의 경지까지 올라 있었다.
네 가지의 길 중 선택한 것이 바로 첫째, 태극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태극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둘째는 이전에 갔던 길이라 제외했고, 셋째와 넷째는 한 달이란 시간 내에 결과를 얻어내기 힘들다 판단했다.
그렇게 반나절을 돌아다닌 끝에, 지도에 그려져 있는 지점에 도착했고.
“이건…….”
얼음 계곡을 지나, 이름 모를 산 앞에서 멈춘 설휘가 입을 쩌벅 벌렸다.
눈앞에 펼쳐진 모양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영음빙천하(永陰氷天下)…….”
길게 뻗은 얼음벽에 쓰여 있는 글귀를 보고 설휘가 읊조렸다.
사방에는 빙공의 결정들이 맺혀 있다.
소수마공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빙공 계열로 보인다.
또한 위력을 보건대, 적어도 2갑자 이상이나 쓸 수 있는 위력으로 짐작되었다.
‘분명, 이곳에 있어.’
설휘는 그 아래의 커다란 동혈을 확인했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
안에는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공간이 들어서 있었다.
동굴이라고 하기엔 거의 마을이 들어찰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더욱이 살을 에는 추위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곧장 사라져버렸다.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한 절경을 펼쳐내고 있었다.
“저기…… 계십니까?”
설휘는 말을 걸며, 점차 안으로 들어갔다.
빙림(氷林)과 따뜻한 햇볕.
한쪽 풀에는 기화요초가 즐비했고, 더 안으로 들어가니 벽에 옥(玉)으로 보이는 구슬들이 박혀 있는 모습도 보였다.
“어르신! 계십니까!”
설휘는 계속 말을 걸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문뜩 바닥에 깔려있는 풀을 보곤.
‘어?’
뭔가 직감적으로 느꼈다.
과거 자용초와 닮았다고.
혹시나 하여 몇 개를 집어넣으려고 하니.
[천영음실(天英陰實)을 도구함에 넣으시겠습니까?]
영약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쓸 만한 영초임을 눈앞의 그것이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일단 몇 개 챙기고.”
[천영음실 30개를 얻었습니다.]
설휘는 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번엔 호수처럼 꽤 넓은 물이 나왔다.
수많은 물고기가 보일 정도로 투명한 물속에, 설휘는 단전을 식힐 겸 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휴…… 좋네.”
물은 차가웠지만,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오히려 단전을 너무 빠르게 보호하다 보니 몸이 뜨거워져서 오히려 시원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조금 몸을 녹이던 설휘는 이내 그 안에서 가부좌를 틀기 시작했다.
조금 상한 원기를 회복하기 위함이었는데.
‘……!’
설휘는 잠깐 감았던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들었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사람의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정파놈이라니까?”
“아냐. 마인놈이 맞아. 제아무리 숨기려 해도, 한번 손을 댄 마공의 냄새는 숨겨지지 않는다고…….”
허공에서 메아리와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
놈들은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설휘는 긴장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지만, 그들은 전혀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빙공을 익혔을까? 몸을 녹이면서 냉랭한 기운도 함께 흡수하는 걸 보면…… 그래 보이지?”
“정파놈이라니까. 오행의 기운이 이리 강하게 뻗어 나오는데……. 무당일 거야.”
계속 그들끼리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기할까?”
“그러자.”
“근데 괜히 시험하다가 죽으면 어쩌지?”
“그건 할 수 없잖아? 사고니까.”
“하긴. 보는 사람도 없고.”
그때였다.
촤아아아아악!
주변에 물기둥이 솟구치며, 천장에서 두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설휘는 앞서 말을 건 이들의 움직임을 볼 새도 없었다.
쿠와아앙! 지이이잉!
한쪽에서 빙공이 쏟아져 나오고, 다른 한쪽에선 마수(魔手)가 지공의 형태로 쏘아지고 있었다.
쏘아져 나오는 방향을 읽지 못해,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압!”
설휘는 발끝에 음기를 집중시켜, 손끝으로 빙하의 기운을 솟구치게 했다.
신수빙호(身水氷護).
마치 결계처럼 빙하가 치솟으며 설휘는 몸을 보호했던 것이다.
쩌어어엉!
하지만 그것은 거대한 송곳 바위로 변한 상대의 빙공에 의해 부서졌다.
더욱이 공간이 열린 곳으로 강력한 지공이 쏘아졌고, 영락없이 머리에 꽂히려는 그때.
화아악.
설휘의 손끝의 흐름을 타고 움직임이 변했다. 사량발천근 수법으로 기운의 힘을 되돌린 것이다.
쩌어어엉--! 쿠우우우우--
동굴 벽, 큰 굉음과 함께 암석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설휘 앞으로 한 쌍의 남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말이 맞지? 마공을 썼잖아.”
“무슨 소리. 내 말이 맞지. 무당의 수법이었어!”
설휘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한 명은 소녀로 보였다. 목소리가 남자처럼 걸걸하다는 걸 빼고는, 인상착의도 그랬다.
또 한 명은 장년인으로 보였다. 이름 모를 가죽과 천 조각을 두른 채 서로 다투고 있었다.
‘누구지?’
물 밖으로 나온 설휘는 머리를 굴려보았다.
엄청난 고수.
빙공의 기운도 그렇지만, 한 사람은 무려 강기와 흡사한 기운을 펼쳐냈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혈마수(血魔手).
그 끈적한 기운은 몸에 닿는 순간 폭발하는 게 아니라, 잠식해 들어가는 기운이다.
과거 멸화공 때 잠식해 들어가던 불꽃처럼 말이다.
‘누군지 확인을…… 아!’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
전투방식을 턴제로 바꾸면 저들의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아, 편법은 좀 그런데…….’
고민은 거기서 그쳤다.
책 보는 시험도 시스템의 힘을 빌렸는데, 이제 와서 이런 걸 고민한다는 것도 웃기는 얘기다.
시스템의 활용은 오로지 높은 경지로 가는데, 방해될 때에만 거부하는 게 옳았으니까.
“이봐.”
설휘가 전투방식을 바꾸려는 그때. 중년인이 말을 걸어왔다.
“예. 어르신.”
“너, 조금 전의 빙공은 어디서 배운 거야? 보니까 소수마공으로 보이는데…….”
조금 전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호심공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로 인한 무공이 소수마공 중 하나였던 것이다.
“아…… 그게…….”
그때 소녀가 한마디 픽 하고 던졌다.
“너, 정파놈이지? 조금 전의 수법도 무당에서 배운 거지?”
설휘는 말문이 막혔다.
괜히 곧이곧대로 대답했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것이…….”
대답이 늦어지자, 소녀는 다시 중년인을 향해 소리쳤다.
“정파놈 맞다니까. 사지를 찢어서 죽여야 한다고.”
“소수마공을 썼다고. 우리 쪽 사람이라니까.”
“아, 정말.”
티격태격대는 그들 앞으로 설휘는 말을 걸기가 겁이 났다.
그러다가 슬쩍, 전투방식을 바꾸어 그들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State Summary, 상태 간단 요약]
초아란(楚我蘭) [마교 은둔고수 냉혈마녀]
경지 극마
체력 2억/2억
내공 3억/3억
전투력 3억
[State Summary, 상태 간단 요약]
악비(岳飛) [마교 은둔고수 빙월신마]
경지 극마
체력 5억/5억
내공 2억/2억
전투력 2억
‘초아란, 악비……!’
설휘는 머릿속에 경종이 울리는 듯했다.
초아란, 악비란 이름은 처음 듣지만, 냉혈마녀와 빙월신마란 별호는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이 생각한 냉혈마녀보다 너무나 어려 보였고, 또 한 사람은 흉폭함보다는 오히려 부드러워 보였다.
그러던 중에.
“이봐. 너, 천미려 님과 아는 사이인가?”
“……!”
악비의 물음에 설휘는 눈을 부릅떴다. 다름 아닌 자신이 찾고 있던 인물이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혹, 천미려 님을 아십니까?”
“……어? 이거 맞나 보네?”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설휘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여기서 괜히 거짓말을 해서는 본전도 찾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는 운 좋게 그 무공을 익혔을 뿐, 그분과 일면식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소수마공을 익히고 있는 거야?”
“어떻게 연이 닿다 보니…….”
“특이한 놈이로고. 아니지, 훌륭하다. 역시 마공은 빙공 계열이 제일이긴 하지.”
“빙공은 무슨. 혈사기공이 몇 배는 더 강력해. 비교 자체가 안 된다고.”
“그럼 저 아이가 혈사기공을 익혀야지, 왜 빙공을 익히고 있겠냐?”
“그거야 접하기가 어려울 수 있지. 최강의 무공이니까.”
묘하게 분위기가 흘러갔다.
갑자기 투닥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들끼리 싸우려는 듯 언성이 높아졌다.
‘이거 큰일인데…….’
설휘의 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목숨도 건지기 힘든 상황.
절대고수끼리의 싸움에서 자신의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싸우게 놔두면 안 돼. 천미려의 존재도 알고 있는데…….’
씩씩 거리는 그들 가운데서 설휘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곧이어 동굴 안에 살기가 몰아칠 정도로 강렬한 마기가 들끓는 게 보였다.
설휘는 급히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기 말입니다!”
일촉즉발에 상황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중년인과 소녀.
설휘는 여기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될지 안 될지는 차후의 일이고, 우선 질러버리는 걸 선택했다.
도구함에서 빠르게 꺼낸 물건을 집고는.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이건…… 술의 정수라 알려진 소흥신명이주라 합니다.”
과거 종리가에서 얻은 가보.
그것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