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천미려 (3)
졸졸졸.
조심스럽게 술을 따르는 설휘. 찹쌀을 잘 발효시킨 주향이 동굴 안에 퍼져나가며 잔에 술이 담겼다.
악비는 어디서 구했는지 돌로 깎은 술잔 같은 걸 들고 냄새부터 음미하고 있었고, 초아란은 받자마자 이미 한 잔 들이켠 상태였다.
“캬…… 이거 물건인데?”
밝아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초아란.
설휘는 밝은 얼굴로 웃었지만, 속은 꽤 복잡한 심정이었다.
소흥신명이주.
상황에 따라선 내공을 무려 100만 이상이나 올려주는 효과를 가진 술이다.
최상급 영약에 비견되는 이걸 거저 내어준다는 게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 사람들을 잘 구워삶을 수만 있다면…….’
설산에서 은거하고 있던 극마고수들.
이들이라면 분명 천미려와 연이 닿아 있을 터.
운이 좋다면, 그녀를 회유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너 꽤 재밌는 녀석이구나?”
한 잔을 마신 뒤 악비가 밝게 웃으며 물었다.
“아, 감사합니다.”
설휘는 좋은 술을 구해왔다는 것에 대한 칭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뭐가 감사해? 그거 술법이냐? 아님 이능이냐?”
“……?”
“방금 허공이 일그러지지 않았느냐. 거기에서 술병이 나타났고.”
설휘는 그에 흠칫했다.
‘도구함의 존재를 알아챈 건가?’
이제껏 도구함에서 물건을 꺼내는 행위를 유심히 본 자는 없었다.
설사 보았다고 해도, 자신이 잘못 보았다고 착각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 미묘한 반응을 감지했던 것이다.
“대개 그런 능력은 기연보다는 저주인 경우가 많아.”
초아란의 말에 설휘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그녀도 도구함의 존재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더 없어?”
“그게 전부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제…….”
초아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죽어야겠지?”
“……!”
초아란이 여인의 허리처럼 휘어진 곡도를 세웠다.
스스스슥.
그러자 단숨에 핏빛의 기운이 아로새겨지며, 비릿한 혈향(血香)이 코끝을 자극했다.
‘이, 이거 진짜로 죽이려는 건가…….’
설휘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조금 전까지 웃으며 술을 맛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살기만 눈가에 피어올라 있었다.
“자, 그럼 꺼져라.”
가가가---각.
눈 깜짝할 사이 쏘아진 혈향의 빛.
쩌어어엉!
그 죽음의 핏빛은 어이없게도, 새하얀 빙공에 의해 가로막혔다.
느닷없이 십여 장이나 치솟은 얼음벽이 혈강기를 막아선 것이다.
“이거 왜 이래? 좋은 술도 가지고 온 손님한테…….”
설휘의 앞을 막은 이는 악비였다.
술이 마음에 들어서일까. 여인과 달리 그는 자신을 보호하는 걸로 보였다.
“정파놈을 비호하다니, 어디까지 떨어질 셈이냐?”
“아니라니까 그러네. 이놈은 우리 본교의 무사라고.”
“하……. 아무래도 이제는 너와 승부를 봐야겠군.”
“환영한다. 이로써 누구의 무공이 더 강한지 밝혀지겠군.”
그리고 이어지는 싸움.
다시 생사결로 이어지자, 설휘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거, 말려야 할 것 같은데……?’
곤마에게는 인재가 턱없이 부족하다.
만약 이들을 곤마에게 데려갈 수 있다면 든든한 우군이 될 터.
그런데 여기서 누구라도 죽게 된다면 커다란 전력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 천미려를 데려가지 못할 경우도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제가 말씀 하나 올리겠습니다!”
그래서 설휘는 무작정 질렀다.
우뚝.
싸움을 멈추고 초아란과 악비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느 분의 무공이 강한지, 알고 있으니까요.”
“……!”
“…….”
사아아아-
분위기가 급변했다.
좀 전까지 살기 어린 시선을 보이던 초아란은 어느새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변해 있었고.
“하긴, 누구보다 네가 더 객관적으로 보겠구나.”
악비는 호의가 감도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몸을 돌리며 재차 물었다.
“네가 보기엔 누구의 무공이 더 강해 보이느냐?”
“그게…….”
설휘가 초아란에게 시선을 돌리자.
“딱 한 명만 고르면 된다. 그 외의 다른 말이 나오면 네 입을 찢어버릴 테니.”
섬뜩한 경고에 설휘는 목덜미가 갑갑해짐을 느껴졌다.
‘미쳐버리겠구만.’
일단 싸움을 막기 위해 지르긴 했는데, 여기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해둔 건 없었다.
그래서 일단 아무 말이나 던졌다.
“그럼, 한번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보여……?”
“뭘……?”
설휘의 말에 둘은 의아한 시선을 보냈고, 그는 바닥에서 돌 두 개를 급히 집어 들었다.
“여기 이 돌 두 개. 저는 지금 이걸 한쪽으로 던질 겁니다.”
“……?”
“그렇게 던진 돌이 벽면에 닿기 전에, 두 분의 무공으로 박살을 내 보십쇼. 그걸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전력으로 던지는 돌.
어찌 보면 도발적으로 들리는 언사의 말에.
“동굴이 무너질 텐데?”
초아란은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 그러지 않게 하셔야죠! 그 정도의 정밀함도 없다면, 어찌 실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설휘가 급하게 덧붙였고, 초아란이 인상을 쓰는 순간.
“그 말이 맞군. 그렇게 하자.”
악비가 멋대로 수긍했다.
스스스슥.
잠시 가라앉았던 살기가 급속도로 팽팽해졌다.
“내 차례가 돌아왔을 때, 돌이 조금이라도 빠르거나 느리면…….”
초아란은 설휘를 바라보았고.
“내 검은 네 목을 향할 것이다.”
협박인지 승낙인지 모를 말로 마무리했다.
설휘는 얼결에 두 절대고수의 대결에 끼어 심판을 보게 되었다.
***
설휘는 돌을 바꿔 들었다.
처음 들었던 돌은 크기가 서로 달랐다. 괜히 트집 잡히면 목이 달아날 터였다.
‘일단 저지르기는 했는데…….’
여기서 잘 구워삶아야 했다.
두 절대고수의 싸움을 막긴 했는데, 앞으로가 문제였다.
만약 여기서 초아란이 이기면, 당연히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 들 터였다.
그렇다고 악비가 이기도록 손을 썼다간? 공정하지 못하다고 역시 죽이려 들 터였다.
‘그리고 애초에 악비가 내 편도 아니고.’
이래도 저래도 죽을 위기. 그럼에도 설휘는 한 가지 믿고 있는 게 있었다.
바로 사대극마공의 풍.
마공은 될 수 있는 대로 쓰지 않으려고 했던 설휘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었다.
일단 돌을 극단적으로 빠르게 던지는 것.
그래서 두 사람 다 날린 돌을 맞추지 못하게 하여 그걸 빌미로 무승부 운운하며 끝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준비됐냐? 정파 출신의 개?”
초아란의 말에, 설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맞추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그에게는 초풍신의 초식이 있다.
무극초풍신 정도의 속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설휘는 나름 확신했다.
던진 돌이 닿을 벽까지의 거리는 고작 삼 장 정도.
초아란과의 거리 역시 그만치 떨어져 있었다.
아무리 절대고수라 한들, 연습도 없이 그가 전력으로 던진 돌을 뒤에서 공격을 날려 맞춘다? 그건 쉽지 않을 터였다.
“갑니다.”
“언제든지.”
츠윽.
그녀는 검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이전에 보였던 혈향도 없었고, 어떤 마공의 자극도 없었다.
촤아아아악.
설휘는 온몸에 내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몸속의 기운을 마공으로 변질시켰다.
곧이어 사이한 기운이 사로잡혔고.
“하아앗!”
괴성을 지르며 던진 돌이 순식간에 벽으로 날아갔다.
번쩍.
어른거리는 빛줄기. 동시에 퍼져 나오는 핏빛의 환영.
돌은 벽에 부딪히기도 전에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런 미친!’
설휘는 속으로 기함했다.
상식을 벗어나는 속도다. 하지만 속도보다 검강을 쏘아 돌을 부수며 벽에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말끔한 솜씨가 더 놀라웠다.
지난번 자신이 올랐던 최대 수준으로도 흉내 낼 수 없을 무위였다.
“이번엔 내 차롄가?”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나타난 악비.
그렇게 몸을 푼 그가 손짓했다.
“저기…….”
그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설휘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왜?”
“손이…….”
“응?”
지공을 쏘려는 듯, 한 손을 들어 올린 악비. 그런데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 술 한잔하다 보니……. 괜찮아.”
악비는 해맑게 웃었지만, 설휘는 웃지 못했다. 얼굴이 상기되며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악비가 초아란에게 지면, 난 죽은 목숨이겠지?’
적어도 비겨야 하는 싸움에서, 누가 봐도 지는 그림이었다.
그래서.
설휘는 정말 진지한 어조로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말래도.”
설휘는 기운을 끌어올렸고, 이내 이전과 같은 힘으로 던졌다.
패애애액. 팍!
돌은 벽에 부딪히자마자 부서졌고, 일부는 파편이 되어 날아갔다.
“……?!”
설휘가 눈을 부릅떴다.
악비가 뭔가 대단한 것을 펼쳐주길 바랐는데, 황당할 정도로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할 때쯤.
“쳇. 제법이야.”
“……?”
인상 쓰는 초아란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잔뜩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
그에 설휘는 다시 부서진 돌로 시선을 옮겼다.
투투툭.
“와…….”
바닥을 뒹굴던 돌. 그건 어느새 꽁꽁 얼어서 땅에 달라붙어 있었다.
대체 언제 손을 쓴 건지, 빙공으로 완벽히 얼려버린 것이다.
‘감지하지도 못했어. 이건…….’
설휘는 거기서 시간의 결박을 떠올렸다.
이제껏 남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빙공극저하로 시간을 얼려 재미를 보았던 수법.
계열은 다르지만 아마 자신과 같은 그런 수를 쓴 것이 아닐까?
“시시한 놀이는 이쯤 하고.”
초아란은 한마디로 일축한 후.
“방금 너…… 사대극마공을 어떻게 쓴 거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런, 알아본 거구나.’
초아란의 눈은 매서웠다. 방금 마공을 쓴 덕분에 정파놈이라는 선입견은 없어졌으나, 다른 문제가 생겼다.
사대극마공 풍.
공식적으로 천마제자만 전수받기로 되어 있는 마공이 아닌가.
“그러게. 너 뭐냐? 천마의 새 제자냐?”
악비도 의아하다는 반응을 해왔다. 그 역시 사대극마공을 알아본 것이다.
‘어차피 이리된 거…….’
설휘는 그들의 반응을 보고 생각했다.
이미 천미려의 제자라는 거짓말로 여기 온 이상,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려고 한 것이다.
“교주님의 제자는 아니고…… 천미려 님의 제자입니다.”
“뭣!?”
“뭣이!”
급당황하는 두 사람.
너무 놀라는 모습을 보이자, 오히려 설휘가 당황할 정도였다.
다행히 두 고수는 천미려가 어떻게 사대극마공 풍을 배우게 됐는지는 따로 묻지 않았다.
“사실 제가 이렇게 온 건, 사부님이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두 분의 다툼이 끝이 없으시니…… 저를 보내서 두 분의 무공을 직접 보고, 어느 쪽이 강한지 결론을 내어 드리라고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황당해하는 두 사람에게, 설휘는 되는 대로 말을 이어 붙였다.
“그러니 저에게! 두 분께서 무공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걸로 제가 비교를 해 드리면…… 결판이 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무공의 전수라…….”
두 사람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그와 함께 설휘는 속으로 어라? 싶었다.
‘이거…… 정말 가능성이 있는 것 같은데?’
강호에서 가끔 등장하는 야담. 두 고수가 서로의 자웅을 겨루지 못해, 제자에게 대를 이어 겨루게 했다는 이야기.
얼결에 그렇게 막 던져버린 것인데, 생각 외로 진지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걸려도 무공을 쏙쏙 빼먹으면 그게 더 이득이라는 심정이 주요했다.
“가르쳐서 이긴다라, 나쁘지 않군. 우열을 가리기에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놈이 자질이 떨어져서 내 무공을 제대로 못 배우면? 그건 불공평해!”
“하, 명필이 붓을 가리던가? 가르치는 재주 또한 중요한 재주지. 자신 없으면 이참에 패배를 인정하든가.”
“이놈! 누가 패배란 말이냐!”
악비의 말에 초아란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리고.
“난 제자가 아니면 무공을 전수 안 해.”
노려보는 눈길에 설휘가 흠칫했다. 명백한 거부 의사였다.
“너, 이름이 뭐냐?”
“……설휘입니다.”
“설휘. 그래.”
그녀는 몇 걸음 다가오더니 설휘를 사납게 노려본 후.
“오늘부터 넌 냉혈마녀의 제자다.”
“……?”
“왜, 불만 있어?”
멋대로 정해버린 후 겁박하듯 말했다.
“어, 없습니다!”
설휘는 얼떨결에 대답했고, 그녀는 끄덕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그의 앞으로 다른 중년인이 섰고.
“넌 오늘부터 빙월신마의 제자다. 천미려 님의 제자라곤 하나, 사부는 여러 명일 수도 있으니까.”
“……예. 감사합니다.”
이게 끝이었다.
그걸로 얼결에, 설휘는 하루아침에 두 명의 스승을 가지게 되었다.
냉혈마녀의 초아란. 혈향이 피어나는 혈마수(血魔手)로, 마교에서도 펼칠 수 있는 자가 극히 드물고 익히기도 난해한 극성의 수법을 쓰는 고수.
그리고 빙월신마 악비. 소수마공에 못지않은, 그만의 독문무공으로서 빙공에 조예가 깊은 마인.
‘횡재다!’
강호를 은퇴한 노고수의 비기. 그리고 무학을 오랫동안 수련했던 절대고수의 심득.
생각과 경험. 스승이 아니면 전수해주지 않는 그런 것들을 익힐 계기가 된 것이었다.
“하하…….”
이제껏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온 인생에, 처음으로 복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진실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