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고속 수련 (2)
혈마수.
손끝에만 닿아도 독에 중독되는 용혈독(龍血毒)의 성질을 띠는 무공으로, 초식들도 죄다 독살스럽고 패도적인 게 특징이다.
본래 이 무공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검법이 아닌 수공(手功)이었다.
홍사장(紅沙掌)이라는 독 모래에 손을 파묻고 단련하기를 반복하며, 이후 독에 면역된 수십 마리의 거머리를 이용해 피를 빼내는 과정을 거친다.
홍사장 안에 있는 혈사독(血死毒). 이것은 단순히 피를 응고시키는 독성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가려움과 부종, 점막 같은 걸 만들었고, 때론 열독(熱毒) 증상도 동반하게 했다.
비록 설휘가 독에 관해 불침이 되었다곤 하나, 이 고통은 피할 수 없었다.
거기다 항아리 안에 있던 거머리가 피를 빨아내며 부종을 가라앉혔지만, 엄청난 고통도 함께 수반했다.
연성하기만 하면 손의 감각을 몇 배나 더 예리하게 만들어주지만,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도중에 포기하는 이가 대다수였다.
거기에 초아란은 채찍을 이용하여 혈 자리를 자극하는 고전수법을 더했다.
그러다 보니 온몸에서 흐르는 기(氣)의 순환은 몇 배나 증가했고, 그로 인해 설휘는 지금처럼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빠른데?’
대수롭지 않게 설휘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초아란은 속으로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나름 혈도를 자극해 하단전의 모든 기혈을 심법에 맞게 타동시켰지만, 그럼에도 놈이 이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거의 초마의 극에 오른 움직임이 아닌가.
‘좀 더 확인해봐야겠군.’
사박.
그녀는 항아리에 담긴 모래 일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설휘로부터 거리를 좀 벌렸다.
곧 삼 장, 오 장까지 멀어지자 그녀는 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서 모래를 떨어트릴 것이다. 일부 모래는 떨어질 테고, 일부 모래는 바람에 흩날리겠지. 네가 익힌 혈마수를 통해 맞춰 보거라.”
“……!”
설휘는 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기공(氣功)을 사용하라는 말이다.
혈마수의 성질 중 하나인, 핏빛 기운을 사용할 수 있느냐도 시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뇌리에 남는 건 이것.
‘속도가 중심일 터.’
혈마수. 초아란에게 따로 듣지는 못했지만, 여러 무공을 익혀본 설휘는 직감하고 있었다.
하단전에 흐르는 기류.
그리고 원할 때마다 따르는 폭발적인 힘.
몸속 내기가 반응하는 민감함은 설휘가 이제껏 익힌 모든 무공을 통틀어도 제일이었다.
그럼 혈마수의 근간은 무엇일까?
‘핏빛의 기운, 죽음의 기운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오히려 강한 생명력. 거기서 강한 투기와 엮여서 발현되는 것. 즉, 소생에 근간을 두고 있어.’
마교에선 변화라 일컫지만, 중원에선 변질이라고 일컫는 게 마공이다.
마공은 자연의 기운을 강한 힘으로 변모시킨다.
여기에, 혈마수는 한 가지가 더해진다.
몸의 감각과 내기의 반응을 극대화시켜, 다시 한번 강력한 힘을 더한다.
그러니 이 무공이 처음 경험하는 이에게 얼마나 경악스러울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준비됐느냐.”
“예.”
설휘가 대답하자, 초아란은 자신의 손등의 방향을 위로 올렸다.
스윽.
대충 거리를 가늠한 설휘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모래를 보고 반응하면 이미 늦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거리가 오 장이나 되는 상황에서 떨어지는 모래들을 모두 없애버릴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투욱.
그렇게 초아란의 손바닥이 펼쳐지고, 사방에 모래가 흩날리던 그때. 설휘의 손이 움직였다.
손가락 마디에서 뻗어 나온 기공은, 탄지신공을 닮아 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기운이 아닌, 핏빛이 감도는 것이 달랐다.
사아아아아-
한풍이 불었다.
설휘는 손가락을 한데 모은 채 팔을 내밀고 있었고, 초아란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에는 새하얀 눈만 있을 뿐, 자신이 쥐고 있던 모래의 흔적은 없었다.
맞은편의 사내가 펼친 기운이 수백, 수천 가지로 갈라지며 떨어지는 모래들을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다.
열기로 태운 것인지, 기공으로 공멸시킨 건지는 조금 생각해봐야겠지만,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건.
방금 그 녀석은 혈마수라는 무공이 가진 근간의 힘을 펼쳤다는 것이다.
‘말도 안 돼.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채찍으로 막히거나 굼뜬 혈을 뚫어주긴 했다지만, 그건 기의 순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내공 심법을 전수해 줬지만, 그것과 순환로를 알려줬을 뿐.
근원의 힘을 사용하는 건 또 다른 영역이다.
물론 다른 이들과 달리 놈의 신체가 특이한 것 역시 인정했다.
혈사독에 면역을 가진 놈들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지금 그가 펼치는 혈마수의 운용 방식은 이미 기운을 다스리는 걸 넘어, 조율 단계까지 들어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 맘에 안 드십니까?”
한참을 생각에 빠져있던 초아란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늘 그렇듯 얼빠진 표정을 짓는 사내놈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당분간 수련은 없다.”
“예……?”
“그렇다고 끝난 건 아니다. 혈마수에 관한 강론을 진행할 것이니 그리 알아라.”
강론이란 말에 설휘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제 더는 그 지독한 수련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기뻐하던 설휘를 잠깐 노려보던 초아란.
이내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설휘는 처음으로 휴식다운 휴식을 취했다.
***
“그래서? 그 뒤로 별다른 얘긴 없었고?”
휘이익. 휘이익.
자정을 조금 넘긴 시작.
절벽과 절벽 사이를 연결한 기다란 외줄 하나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악비는 거기다 대고 묻고 있었다.
그러자 외줄 위에 태연하게 서 있던 사내가 말을 받았다.
“별다른 얘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낮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래?”
“…….”
잠깐 동안 말이 없자, 설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있던 중에.
“이리 와 보거라.”
악비의 부름에 설휘는 외줄을 너무도 쉽게 넘어 그의 앞에 다가섰다.
“보아하니, 혈마수란 무공에 나름 성취를 본 것 같구나. 그래서 요망한 할망구가 수련을 멈춘 거겠지.”
“아, 그런 겁니까?”
“당연하지! 내가 그 영악한 할망구를 모를 리가 있겠느냐!”
갑자기 흥분하며 말하는 악비.
성취가 있다는 것이 맘에 안 드는 듯 괜히 자신에게 짜증을 내는 그였다.
‘역시 반로환동의 고수였구나.’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무공의 성취로 소녀처럼 어려진 모양이었다.
악비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이내 다시 말했다.
“흠흠. 그래도 나름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성취를 한번 보자꾸나.”
“아직 수련이 끝나지 않았는데요?”
“흥. 바보 같은 놈!”
악비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요망한 할망구의 수련에 성취를 보이는 동안 나는 놀았겠느냐? 네놈이 기절할 때마다, 또한 중간중간 너의 몸 상태를 확인하며 얼음찜질부터 시작해 수없이 보조를 맞춰왔다.”
“얼음찜질…….”
“네놈의 체력은 지금 상당한 상태.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뭔가 단언하듯 말하자, 설휘 본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고수가 그렇다면 그런 것일 터다.
“자. 그럼. 수련의 성과를 확인해 보자꾸나. 단전에 기를 유통해 보거라. 참고로 앉지 말고 선 상태로.”
“옙.”
가부좌를 트려고 하던 설휘는 선 자세로 어깨를 폈다.
그리고 단전에 기를 순환시키며 그를 쳐다보았다.
“빙공의 심법은 대부분 흡사하다. 발바닥인 용천혈을 열어, 내기를 받아들인다고 생각해라.”
“알겠습니다.”
그의 말대로 바닥을 딛고 있는 발바닥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는 몇 개의 혈을 툭툭 누르기 시작했다.
“이곳과 이곳, 그리고 이곳. 여기로 기운을 보내거라. 참고로 내기는 계속 순환시켜야 한다.”
“옙.”
그가 시키는 대로 순환하는 기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변경하자, 기운이 폭주하듯 갑자기 몸이 덜덜 떨렸다.
“누르지 말고 곧장 뻗어내라!”
악비의 외침에 설휘는 급히 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기운들이 맹렬히 손으로 이동했고.
쩌저저저저저적-!
새하얀 빙공이 터져 나오며, 스쳐 지나가던 모든 것을 얼려버렸다.
“아…….”
설휘는 순간 자신이 펼쳐낸 빙공을 보며 경악했다.
몸속 내공을 모두 쏟아냈다고는 해도, 그 빙공은 끝도 없이 뻗어 나왔다.
공기를 얼려버린 빙정 조각들이 비산하는 효과까지 보이고 있었다.
“대, 대단합니다. 사부.”
설휘는 자신도 모르게 속내가 튀어나왔다.
소수마공과는 결이 다른 힘.
소수마공이 날카로운 칼이라면 이건 폭포와 같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때려눕히는 빙공인 것이다.
‘뭐지…….’
한편, 악비는 악비대로 당황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빙공의 힘이 발현될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끝도 없이 펼쳐진 빙공이라니.
이는 내공이 많다고 해서 펼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힘이 분산될 뿐, 저리 끝도 없이 퍼져나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빙월신공의 힘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해서 악비는 물었다.
성취는 결국 깨달음. 이 아이는 빙월신공을 일부 이해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불침과 결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지?”
“제가 수련한 건 대부분 체력 훈련이지만, 그만큼 사부님은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아마도 금강불괴, 아니 그 이상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한 훈련으로 보였습니다.”
“결박은? 무슨 뜻으로 말한 건가?”
“시간의 결박입니다.”
“…….”
“빙공은 얼리는 것. 하지만 단전의 내부는 거의 폭발할 정도로 빨라지지요. 자연에 주어진 시간은 일정하기에, 몸의 순환이 극도로 빨라지면 결국.”
설휘는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시간이 느려지는 효과를 보이게 됩니다.”
“허…….”
악비는 설휘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범인과는 다르다. 수련을 시켜도 하는 이유를, 또한 무공의 근원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왜 이자가 천미려의 제자인지를 이제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중간성과가 괜찮았던 걸까?
설휘는 그날부터 고된 훈련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자리에 편히 앉아서 혈마수와 빙월신공이 어떤 무공인지, 어떤 상황에 효과적인지 가르침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 정도가 지났을 때쯤.
“사부님 궁금증이 있습니다.”
설휘의 질문에 초아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엇이냐.”
“혈마수가 9성에 이르면, 극마가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그럼 그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더 높은 경지?”
예상치 못한 질문인 듯 초아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질문의 의미를 파악한 후 다시 물었다.
“혹, 탈마를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설휘가 현생을 살면서 알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극마를 뛰어넘어 탈마로 가는 길.
과거에선 도저히 그 길을 알기가 힘들었다.
최상승 무공이라는 것도, 궁극의 영역인 극마에 오르는 것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음…….”
초아란은 고민하는 듯 보였다. 웬만한 질문에는 거침없던 그녀였기에, 설휘는 평소보다 더욱 집중했다.
꽤 긴 침묵이 흐른 뒤에 그녀가 입을 뗐다.
“그건…… 다른 무학이 필요하다.”
“예?”
무학?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설휘가 눈을 껌뻑이며 계속 쳐다보자 초아란이 설명을 붙였다.
“극마, 정말 대단한 경지지. 더는 이룰 것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지만 그 경지는 자신의 공부가 끝이 났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지, 모든 공부가 끝났다는 말은 아니다.”
그녀는 두 손을 좌우로 뻗으며 손바닥을 펼친 뒤 말을 이었다.
“대자연. 자기 몸의 공부가 끝나면 그다음은 바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든 자연을 공부해야 한다. 그게 시작인 것이지.”
“자연의 공부라는 건 어떤 걸 의미하는 겁니까?”
“어렵지 않다. 몸에 내공이 없어도 자연에는 내공이 있지. 그 힘을 이용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다. 고요한 바람을 태풍처럼 만들거나, 화창하던 하늘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것.”
한마디 한마디가 경악하게 만드는 설명들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니.
초아란은 설휘는 보며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때에는 몸도 변할 것이다. 대자연을 변화시킬 수 있는 몸이 되는 것이지. 그때…… 탈마에 오를 것이다.”
자연.
주체가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된다는 말은 여전히 모호했지만, 그럼에도 이런 생각의 발상이 가능하다는 게 놀라웠다.
“사부님이 생각하신 겁니까?”
해서 설휘가 물었다.
극마에 올랐음에도 길을 아는 것을 보면 그녀의 능력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대단하지 않을까.
턴제에 잡힌 능력보다도 더욱더 말이다.
“아니, 은둔고수 한 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걸 그대로 말한 거다.”
“아, 누가…….”
“너도 잘 아는 사람이지.”
“……예?”
의아해하는 설휘를 보며, 초아란은 지그시 웃어 보였다.
여기서 본 그녀의 두 번째 웃음이었다.
“천미려. 너의 사부님의 말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