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실전 (2)
대자연의 기(氣)는 사상과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해석된다.
일찍이 도가에선 자연의 기를 오행으로 표현하며 풍수, 사주추명, 산명학, 기문둔갑, 육임, 기학 등의 이론들을 오행의 위에서 구축하게 했다.
마교에서는 대자연의 기를 지수화풍, 네 개의 근원적인 원기로 보았다.
그 이론 위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무공이 사대극마공의 지수화풍이었다.
허공섭물은 자연의 기를 이용한 수법이다.
멀리 떨어진 사물을 움직이기도 하고, 때에 따라선 파괴하기도 한다.
자연의 기를 움직이기 위해선 상단전을 개안시키는 게 필수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절대 반열에 올라선 고수들만 흉내 낼 수 있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화경이나 극마가 바로 그것이었다.
헌데, 놀랍게도 설휘는 극마에 오르지 않고서도 그 수법을 사용했고, 특정 무공과 결합하는 형태로 펼쳐냈다.
그러니 절대고수인 악비와 초아란은 심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저도 잘…….”
혈사공을 허공섭물과 함께 쏘아냈냐는 초아란의 질문에 설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로서도 이런 변화에 당황하고 있었다.
허공섭물을 사용한 것도 사실 의도했다기보다는 기류를 움직이려다가 펼친 기예였기 때문이다.
“허…….”
초아란은 스스로도 의아해하는 설휘를 향해 더는 묻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방금 펼쳐낸 두 무공의 결합은 비상한 전투감각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했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혈마수라는 무공이 허공섭물이란 수법에 접목이 가능한가부터 짚어야 했는데, 그는 그걸 너무도 손쉽게 해결했다.
그러다 보니 설휘가 펼친 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악비를 향해 쏘아낸 혈기공 자체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기상천외한 변화를 보였으니까.
이건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어검술 같은 공격과 흡사했다.
‘혈강기를 펼친 건 아니니…….’
혈강기보다 한 단계 낮은 혈기공.
그랬기에 강기가 쏟아져 나오는 어검술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공섭물을 이용한 수법을 펼쳤다는 것.
이미 무공의 성취뿐만 아니라 깨달음 면에서도 극마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실력을 보여줬다.
“크으으읍.”
한편, 악비는 쓰러졌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꽤 충격을 받은 듯 잠깐 휘청거렸지만, 이내 몸을 추슬렀다.
사실 이미 금강불괴의 몸인 악비에게 혈기공 따위로는 제대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훌륭했다.”
정신을 차린 악비는 조금 전 쏘아낸 설휘의 공격을 솔직히 평가했다.
마음속으로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상대의 공격에 따라 방어를 하려던 그때. 주변의 기류가 제멋대로 흔들리며, 머리 위에서 혈기공이 쏘아져내렸다.
당황한 그는 급히 몸을 뒤로 움직였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게 된 상황이었다.
“약속대로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그리고…….”
그는 가슴을 활짝 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날 밀어낸다면, 모든 내공을 너에게 주마.”
내공 전수.
조금 전 일격으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가 날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스승으로서 제자가 성장한 것이 몹시 기쁜 것이리라.
거기다 혈마수 같은 난해한 무학을 이해할 정도라면, 빙월신공에 대한 이해 역시 자신의 예상보다 더 높은 수준까지 올라갔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하겠습니다.”
우우우웅.
설휘는 공명하듯 울어대는 검을 쥐며 두 번째 공격을 준비했다.
초아란은 그런 설휘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맞은편에 있는 악비도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 비친 악비는 이전처럼 방어하려는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공격을 받아주려는 듯, 가슴을 당당히 펴고 있었다.
‘이건…….’
그를 보던 설휘의 몸이 또다시 흠칫했다.
어느새 눈에 보이는 희미한 기류.
그 기류의 흐름은 악비의 주변에서 비정상적으로 느려지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명확했다.
‘시간의 결박과 비슷한 걸 펼친 거구나.’
소수마공과는 운용 과정이 다르다 해도 빙월신공 역시 극음의 무공.
그것이 가진 절대적인 힘 중 하나가 바로 시간을 조율한다는 것에 있었다.
악비는 그것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예전에는 몰랐겠지만 지금 설휘의 눈엔, 상단전 개안으로 생성된 기류의 흐름이 보이고 있었다.
‘그럼, 나도 한번 시험해볼까?’
설휘가 내기를 검 끝으로 불어넣자, 핏빛의 기운이 뻗어 나왔다.
그리고 눈에 띄게 서서히 줄어들었다.
의도적으로 힘을 응축한 것이다.
핏빛 기운이 거의 사그라들자, 설휘의 검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혈마수의 초식 준비가 끝난 것이다.
‘지금!’
슈아아악!
설휘의 검 끝이 악비를 겨누자마자 기공이 쏘아져나갔다.
속도는 거의 전광석화.
차이점이라면, 쏘아가던 핏빛 기운이 일섬(一閃)처럼 날카롭게 날아가지 않고, 도중에 구 모양을 그리며 부풀어 올랐다는 것.
그리고 악비의 지근거리에서 마치 설계된 기운처럼 터져나갔다는 것.
스윽.
헌데, 그곳엔 악비가 없었다. 바로 옆, 서너 걸음 거리를 벌리고 그가 나타난 것이다.
‘……!’
설휘의 눈이 커졌다.
이건 그의 의도대로였다. 분명 악비는 자신의 공격을 보고 피해냈다.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는 움직임으로.
“혈마수의 장기 중 하나지? 적에게 날린 기공을 터트려, 물리적으로 막아내기 불가능한 수준으로 만드는 것.”
자신만만하게 말을 걸던 악비.
하지만 정작 설휘는 전혀 다른 상황을 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과거 천마의 입장이 된 것 같구나…….’
최후의 일전이었던 과거.
그때에는 자신이 시간의 결박을 사용했다.
그리고 천마는 그 결박을 부숴버렸다. 설휘에겐 거대했던 시간이라는 대상이, 천마에겐 고작 조율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나도 이 결박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그때처럼 맥없이 당하진 않겠지.’
오랜 시간 설휘가 생각한, 시간의 흐름을 극도로 느리게 만드는 상대를 뛰어넘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했다.
상대보다 시간의 흐름을 더욱더 강하게 결박하거나, 상대가 쳐놓은 결박의 틀을 깨부수는 것.
다만 이 두 가지는 지금으로선 불가능했다.
거기다.
‘혈마수 무공엔 파훼법이 없어.’
설휘는 스륵 검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초아란이 의아한 눈빛을 띠었고, 악비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
“졌습니다.”
“……?”
“도저히 빈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말에 악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후,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말은 대수롭지 않았지만, 악비는 속으로 매우 놀라고 있었다.
‘그걸 본 것인가.’
자신이 시간의 흐름을 늦췄다는 것. 그러니 싸워보기도 전에 이리 순순히 포기한 걸 테니.
“이번엔 나군.”
초아란은 악비가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그러자 악비가 씨익 웃으며 말을 건넸고.
“각오하라고.”
“각오는 무슨.”
초아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솔직히 허공섭물과 접목된 혈마수의 쓰임에 놀라긴 했다.
하지만, 딱 그것뿐.
그만한 기행은 또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다. 설령 나온다 해도 악비처럼 당하진 않을 생각이었다.
“세 번. 어떤 공격이든 펼쳐 보이더라.”
자리에서 선 초아란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확실히 여유로운 악비보다는 경계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설휘는 혈마수가 아닌 빙공의 내공심법을 떠올렸다.
‘시간의 흐름을 통제하면…… 분명 통할 것이다.’
혈마수의 힘이 속도와 정확성에 있다면, 빙공은 시간의 결박과 통제에 있다.
이것의 시작은 극도로 빨라진 내공심법에서 나온다.
과거에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으레 당연하게 여겼던 수법과 과정이.
이번 생에서는 설휘의 머릿속에 또렷이 각인되고 있었다.
“어서.”
초아란의 재촉에 설휘는 내공을 순환했다.
그리고 발바닥을 통해 받아들인 기운을 손바닥으로 밀어넣었다.
그러자 새하얀 기운이 넘실거리며, 팔과 손으로 이어졌다.
스스스스슥.
그리고 빙월신공의 내공심법을 운기하자마자, 변화가 생겼다.
눈앞에 펼쳐진 기류가 눈에 띄게 느려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주변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것이 일 단계였지.’
빙월신공이 가진 시간의 통제는 총 3단계로 이뤄진다.
이렇게 주변이 고요해지는 게 첫 번째.
그때 설휘는 기다리지 않고 상대를 향해 빙공을 쏘아냈다.
쩌어어엉.
새하얀 빙공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예상대로 초아란은 그 기운을 단번에 베어냈고.
콰가가가각.
잘려나간 빙공은 벽에 부딪히며 산산이 부서졌다.
“흥.”
별것 아니라는 듯이 바라보는 초아란.
하지만 악비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전했다.
방금 쏘아낸 건 그저 시범 연습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이 단계.’
고요함과 함께 찾아온 이명소리. 그리고 주변의 흐름이 몇 개의 환영처럼 연속으로 펼쳐지는 장면들.
설휘는 이것을 보며 시간의 흐름이 남들이 느끼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느려졌다는 걸 깨달았다.
하여 이번에는 검을 내리는 동작을 보여줬고, 한 시점에서 이번엔 기습적으로 검을 올리며 빙공을 쏘아냈다.
‘……헉!’
초아란의 눈에 약간은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순간적으로 빙공을 쏘아내는 움직임을 놓칠 뻔한 것이다.
설휘가 이제껏 보였던 움직임과 전혀 다른, 거의 전례가 없는 속도로 펼쳤기 때문이다.
쩌어엉!
하지만 역시나 초아란은 극마고수.
늦은 반응에도 상대가 쏘아낸 빙공은 베어냈다.
콰가가각!
빙공은 벽에 부딪혔고, 조각조각 깨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것이…… 삼 단계.’
내공의 순환을 극한으로 빠르게 회전시키자,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느려졌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설휘의 몸도 함께 느려졌다.
아마도 이건 과거에 자신이 경험했던 빙공극저하보다 빙원핵축압에 가까울 터.
“하아아—압!”
그렇게 쏘아낸 빙공.
이전과 다르게 새하얀 빛보다는 투명에 가까웠다.
“……!”
그런 시간의 완벽한 결박에도 초아란은 반응했다.
검을 휘두를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인지.
투욱.
검을 놓음과 함께 손끝으로 혈마수를 펼쳐낸 것이다.
허나, 이전처럼 빙공을 잘라내는 게 아니라 파괴시킨 게 악수로 작용됐다.
빙백이 깨지면서 수백 개의 빙정이 터져 나왔다.
설휘가 쏘아낸 기공은 빙공 속에 빙정을 넣은 빙백현화탄(氷白玄化彈)이었던 것이다.
“크윽!”
초아란은 졸지에 빙정을 맞으며 신법을 펼쳤다.
이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지만, 피해를 막을 수는 없었다.
“혈마수의 기막을 이런 식으로…….”
빙백현화탄은 초아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휘가 쏘아낸 건 형태가 조금 다르게 빙백의 막을 형성한 것이었다.
설휘 역시 그녀가 알 것을 예상하여 쏘아낸 나름의 한 수였다.
“이거 우리 비긴 거 같은데? 하하핫.”
그 모습을 보던 악비는 호탕하게 웃었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피해를 줄지는 생각도 못 한 듯했다.
정말로 활용 능력이나 전투 감각은 노고수 못지않은 제자놈이었다.
“제자야. 이미 극마에 오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냐?”
웃는 악비를 뒤로하고 초아란이 진지하게 물었다.
설휘는 평소 놈이라고 부르는 그녀가, 친절히 제자라고 말하는 게 낯설다고 느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헌데 왜? 왜 극마에 오르지 않았지?”
“아직 자연을 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냐?”
“자연의 기를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다 보니 또다시 제 몸을 이해하는 데에도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너…….”
그 말에 초아란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더 높은 경지를 원하고 있구나.”
그녀는 설휘의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보통의 무인은 깨달음이 생기고 길이 보이면 바로 올라간다.
허나, 그러다가 벽에 부딪히는 순간 후회하는 게 있었다.
원하는 만큼 기초가 다져지지 않았음을 느낄 때였다.
하지만 이미 상승경지에 오른 이상,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래. 훌륭한 자세다. 보통의 마인들은 그걸 간과하지.”
“…….”
“수련은 끝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못다 한 수업을 해보자꾸나. 제자야.”
소녀의 모습을 하며 미소 짓는 초아란. 설휘는 그 모습이 처음으로 예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