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신비한 사람 (2)
악비와 초아란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천미려의 입에서 나온 애인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찾지 못한, 그런 눈빛이었다.
“천미려 님의 애인이라 하셨습니까?”
악비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물었다.
“응, 애인. 한쪽에서 좋아하면 애인 아냐?”
“아…… 그게…….”
어이없는 천미려의 대답에 악비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설휘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너는 아느냐, 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것이…….”
설휘가 말끝을 흘리며 잠깐 뜸을 들였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아니, 설명을 한다고 해서 이해를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우리 구면이지?”
그때 갑자기 초아란이 끼어들며 설휘에게 물었다.
설휘는 구면이란 말에 잠깐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초아란은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삼 년 전쯤, 설산 북쪽에 있는 운해궁(雲海宮)에서 만난 적이 있지 않았나?”
“아…… 그랬지요. 혈마수란 무공을 쓰셨지요?”
설휘가 뭔가 알 것 같다는 듯 동의하자, 천미려가 다시 끼어들었다.
“어? 아란아. 너, 이분 본 적 있어?”
“그럼요. 잘 알지요. 운해궁주와 연이 있어서 몇 번 들렀다가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천미려는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며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초아란은 이해한다는 듯 웃어 보였다.
“천미려 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일전에 한 번 본 기억으로는 이 남자, 아주 괜찮은 사람입니다.”
“정말?”
초아란의 말에 천미려는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모두가 들릴 정도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휴우우……. 다행이다. 난 또,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이지?’
사부의 의도를 읽고 급히 대답하긴 했지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상대가 애인이라고 하면서, 한쪽만 좋아하는 거라는 것도 그렇고. 무력으로는 적수가 없어 보이는 그녀가 자신을 두고 나쁜 사람일까 걱정했다는 말도 그러했다.
‘일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아닌 걸까?’
그러다 보니 왠지 그녀가 보통의 사람과는 생각하는 것이 조금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그때였다. 초아란이 자신을 향해 슬쩍 눈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이.
“천미려 님. 오랜만에 만난 인연인데…… 잠시 대화를 나눌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초아란은 천미려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 그래. 알겠어. 나도 깜빡하고 챙기지 못한 물건들이 있어서.”
그녀는 이 상황이 조금은 민망했는지, 그 길로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천미려가 보이지 않자 악비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어찌 된 일이냐?”
그는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아, 그게 말입니다. 처음에…….”
설휘는 있었던 일을 천천히 설명했다. 갑작스런 등장과 너무 빤히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행동.
사제자의 수하임을 밝히며 그녀에게 도움을 부탁하다가, 본인을 설득시켜 보란 그녀의 말에 입맞춤을 하기까지.
“네가 미쳤구나!”
설명을 전부 들은 악비가 당황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알고 있느냐?”
“사부님…….”
“잘 듣거라. 평생을 극음기공(極陰氣功)의 수련을 했던 분이다. 어릴 적부터 음기가 강한 고산지대를 돌며 체질까지 변화시킨 분이야. 그런 분에게 입맞춤이라니. 그게 천미려 님의 정신적인 부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랐느냐?”
‘아…….’
설휘는 악비가 지적하는 바를 그제야 이해했다.
그녀가 이렇게 나오는 데는, 남성이 가진 양의 기운이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아니, 그것 때문에 저런 반응을 보이시는 게 아냐.”
초아란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그녀는 설휘와 악비를 차례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천미려 님은 수련에 도움이 된다면 어떠한 곳이든 찾아 나서셨지. 때문에 어릴 적부터 누굴 만나거나 정분을 나눴다는 얘기는 당연히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보통의 연인에 대한 정보나 감정은 턱없이 부족할 터.”
“…….”
“그러다 보니 입맞춤의 의미를 보통 사람과 다르게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설휘, 너를 평생 정인(情人)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도 아마 거기서 나온 것 같구나.”
“하지만 사부님, 고작 입맞춤 한 번 했다고 평생 애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겁니까? 혹여 다른 생각이 있는 건 아닐지 염려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녀가 이 상황을 단순히 ‘놀이’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자 잠깐 고민하던 초아란이 입을 열었다.
“제자야, 그건 네가 잘 알지 않겠느냐?”
“예?”
“입맞춤 후에 천미려 님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그걸 보면 진심인지 아닌지를 조금은 알 수 있겠지.”
“아…….”
설휘는 그제야 천미려의 행동이 다시금 상기되기 시작했다.
입맞춤을 했을 때 그녀가 보인 반응.
그건 설휘, 자신의 손목을 잡고서 심박수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 아, 거짓말. 진심이었다니…….
콩닥콩닥 뛰는 감정. 그녀는 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소수마공의 대가이며 극음의 마공을 쓰는 절대고수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감정 변화가 아주 적을 터.
그런 자가 사람의 감정을 글로만 배웠다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마교에서 누가 감히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미친 짓을 할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녀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드러낸 남자는 설휘가 유일하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럼 저는 앞으로 어찌해야 합니까?”
대화를 듣던 설휘가 물었다.
그녀가 단단히 착각한 거라면, 그래서 자신을 도우러 온다면.
나중에 오해가 드러날 경우, 뒷감당은 각오해야 했다.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고, 지금은 이대로 가는 게 최선이다. 천미려 님 같은 고수분이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냐.”
“아…….”
“다만, 양날의 검처럼 위험성도 함께 존재할 거다. 그녀가 생각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아직 전부 알지 못하니까. 그 기준이 보통의 사람과 다를 때, 너의 목숨도 위험해질 거란 말이다. 그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게 네가 각별히 신경 쓰는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설휘는 이 상황이 오로지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목숨 100개가 주는 것이 행운이 될지.
아님 언제든지 앞길을 방해하는 자가 될지는 직접 경험을 해봐야 알 것 같았다.
***
‘이리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구나.’
동굴 밖으로 나간 후, 설휘는 그저 감탄만 나왔다.
앞서 달려 나가는 사부들과 천미려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빨랐기 때문이다.
‘경공술이 무슨…….’
특히 천미려의 발은 땅에 닿지를 않았다.
답설무흔(踏雪無痕)이라. 눈을 밟아도 발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의 경공술.
당연하게도 여기 있는 자들이라면, 이 정도의 상급 경공술도 어렵지 않게 펼쳐낸다.
하지만 그녀는 딱히 경공술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잠깐 동작을 멈추고 서 있었을 때 발자국이 남지 않은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과연 극마의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한 것일까?’
설휘는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말을 거는 것 자체도 어려웠다.
괜히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혹여 심경의 변화가 생길 경우가 우려스러웠다.
“여기서 야영을 하시지요.”
적당한 지역을 물색 중이던 악비가 걸음을 멈췄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본교에 도착하기까지 적어도 하루 정도는 쉬어줘야 할 듯했다.
휘이이잉.
고산에서 내려왔다곤 하지만, 아직 산중이라 여전히 추웠다.
악비와 초아란은 능숙하게 땅을 파, 알아서 휴식을 취했다. 설휘도 자신이 누울 공간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잠을 청했다.
그렇게 몇 시진이 흘렀을까.
추위에 깼는지, 눈을 뜬 설휘가 밖으로 나왔다. 문득 천미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뭐 하십니까?”
조금 떨어진 언덕 위. 거기서 커다란 나무를 등지고 서 있는 천미려를 발견했다.
새벽녘, 기온이 가장 낮은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어나셨나요?”
“혹시 잠을 안 주무신 겁니까?”
“저는 원래 잠이 없어요.”
“그래도 그렇지…….”
평범한 옷을 입었다곤 하나, 엄동설한의 날씨였다.
대체 그녀는 어떤 수련을 한 것이기에 이 추위에도 아무렇지 않은 걸까.
“그런데 왜 여기에 나와 계신 겁니까?”
“이곳이 주변 경관이 잘 보이니까요.”
“경관 말입니까?”
“혹시 모르잖아요. 짐승들이 갑자기 떼로 몰려올 수도 있고…….”
“하면 호위를 서신 건가요?”
“앞으로 제 낭군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니 당연히 그래야지요.”
‘아, 이거…….’
설휘는 다시 당황했다.
낭군이라니.
혼례를 한, 남편을 뜻하는 단어를 이리 쉽게 말하는 것인가.
“잠깐만 이리로 와보세요.”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던 설휘를 향해 그녀가 손짓했다.
설휘는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스윽.
천미려는 설휘의 정수리에 손을 조심히 올렸다.
한동안 말이 없자, 설휘가 슬쩍 운을 뗐다.
“뭐가 궁금하신 겁니까?”
그 말에 여인은 그제야 손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보통 단전은 하단전에서 중단전으로 하나씩 열리기 마련인데, 왜 상단전이 이렇게 열려 있는지가 궁금해서요. 본인의 의지인가요?”
천미려가 몸 상태를 정확히 짚어내자 설휘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를 때마침 상기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왜죠?”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더 높은 경지에 오르면, 길을 찾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거기서 주저앉을 것 같은 공포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극마에 오르신 적이 있나 보군요.”
“……!”
설휘는 눈을 부릅떴다. 진심으로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아니, 무엇을 보았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거기에 본인의 노력보다는 주변의 환경에 의해 만들어졌을 테고요. 그러니 길을 찾지 못했을 거예요. 그죠?”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많은 사람이 극마에 오르고 나서 겪는 현상이에요. 제 사부님도 겪었고요.”
“아…….”
“무공은 수단일 뿐, 나아갈 길을 정해주진 않아요. 깨달음은 한 길이 아닌 여러 갈래 길로 나누어져 있어요. 지금 고민하시는 문제도 어쩌면 쓸모없는 일일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소저…….”
천미려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손에 맞는 무공은 없어요. 여러 수단을 시도해 보고 한 가지를 정해서 나아가는 거지요. 그리고 뭐든지 조화를 이루는 게 필요해요. 그걸 이루면, 원하는 곳까지 이를 수 있을 겁니다.”
선인과 같은 말투.
설휘는 그 대답에서 왠지 다른 경지에 오른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허면, 그대는 이미…….”
“아뇨. 저는 아직 조화를 담진 못해요. 또한 그것을 이해할 그릇도 되지 않고요.”
“…….”
“하지만 걱정 마세요. 더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게, 제가 낭군을 돕겠어요.”
천미려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너무도 순수했기에 거짓도, 의심도 없어 보였다.
“설령 상대가.”
“…….”
“천마라 해도 말이지요.”
이번엔 설휘의 눈빛이 흔들렸다.
대체 그녀는 누굴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어디까지 자신을 보고 있는 건지.
정말로 뭐 하나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