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비밀무사 첫 임무 (2)
“흑마전주의 동선이 파악되면 자넬 부를 테니, 우선 좀 쉬고 있게.”
곤마는 설휘와 일행들에게 편히 쉴 수 있는 거처를 안내해 줬다.
귀한 손님이 오실 때 내어놓는, 공관과 조금 떨어져 있는 별채로 안내한 것이다.
“욕조에 물을 데워놨습니다.”
일찍이 나온 시비 하나가 예를 표하며 말하자.
“그럼 나중에 보자꾸나.”
“어서 쉬어라.”
악비와 초아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들어갔다.
제아무리 스스로 은거를 선택하고 고산의 동굴 속에서 살았다지만, 몸을 데울 수 있는 따뜻한 욕조는 그들도 쉽게 거부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각자 배정된 건물로 들어가자, 졸지에 설휘와 천미려만 남았다.
이후, 설휘도 천미려를 향해 살짝 예를 표하며 한 건물로 걸어가려고 했다.
“혼자 가시려는 건가요?”
“예?”
갑자기 설휘의 옷깃을 잡고 말하는 천미려.
설휘가 돌아보자 그녀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연인이잖아요. 연인끼리도 각방을 쓰나요?”
“아, 소저…….”
설휘는 순간 당황했다.
설마하니, 정말 방까지 같이 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여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혹시…….”
어느덧 천미려의 눈매가 매서워져 있었다.
“날 가지고 논 건가요?”
“……!”
그 말에 설휘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얼마 전에 입맞춤해버린 당시의 상황이 떠오른 것이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소저.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라…….”
“그런 거죠?”
그녀는 웃으며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설휘는 난처했지만, 지금은 뭐라 하기에도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어색한 동작으로 둘은 한 건물로 같이 들어갔다.
***
거처로 들어가자마자 천미려가 말했다.
“고단하실 테니 먼저 씻으세요.”
“아, 감사합니다.”
그녀의 권유에 설휘는 거부하지 않았다.
얼마 만의 욕조인가.
비밀무사가 되기 위해 숨 가쁘게 살아왔다 보니, 이런 휴식이 너무나 좋았다.
그렇게 욕실로 들어간 설휘는 욕조에서 몸을 데우며 잠깐이나마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흑마전주.
과거 만답서생으로부터 알려진 바에 따르면, 성격은 매우 괴팍하다고 했다.
경우에 맞지 않은 걸 매우 싫어하며, 선을 넘는 행동에는 용서가 없다고 한다.
불같은 성격 때문에 천마 제자들도 그를 어려워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다만, 오히려 그런 불같은 모습이 교주에겐 좋게 보였던 모양인지, 교단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매우 좋았다.
이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 자리를 지킨 것을 보면, 실력뿐만 아니라 충직한 면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현재 흑마전주는 권력투쟁 속에서도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여 천미려가 그런 인물을 설득해야 한다고 했을 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비밀무사 첫 임무에 그가 포함되지 않았다면 거부했을 게 분명할 정도로.
‘천미려 님이 뭔가 알고 있겠지.’
흑마전주를 직접 거론한 걸 보면, 전혀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그와 만나기 전, 그녀를 통해 최대한 정보를 많이 얻을 생각이었다.
‘어?’
옷을 갈아입은 뒤, 방 안으로 들어선 설휘는 흠칫 놀랐다.
커다란 창틀 위.
천미려는 그곳에서 두 다리를 길게 뻗은 채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아직 한낮이었다.
창가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이 실로 아름다운 자태와 어울리며 빛이 났다.
거기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은 가히 절세미녀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흑마전주는 쉽게 설득될 사람이 아니에요.”
아름다움에 취해 있던 설휘를 향해 천미려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앞서 그녀가 언급한 흑마전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설휘가 물었다.
“혹 만난 적이 있습니까?”
“두어 번쯤. 다만 대화 없이 그냥 스쳐 지나가면서 봤죠.”
설휘는 대충 이해가 갔다.
본교에서 어떤 직책을 맡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인 그녀이지만.
그래도 본교의 주요 인사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분에 대해서 아는 게 좀 있습니까?”
설휘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창가에서 내려왔다.
“그는 내기를 좋아해요.”
“내기?”
“네. 남들보다 강한 호승심은 아무리 신중한 사람이라고 해도 가끔 위험한 판단을 하게 만들죠. 저희는 그 점을 이용해야 해요.”
“하지만 상대가 애초에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무시로 일관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혹은 사제자 보고 직접 오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러니 도발을 해야죠. 그가 분명히 응해올 정도의 도발.”
천미려는 자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설휘가 다시 운을 떼자.
“혹 위험한 상황이 오면…….”
“제가 옆에 있으니 걱정 마세요.”
곧장 대답하는 천미려였다.
설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
자신감에 찬 저 눈빛을 보면, 왠지 불가능한 것도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다만, 그녀 옆에 있으면 뭐든 잘 풀릴 것 같은 기대감은 역설적으로 불안한 느낌도 같이 주고 있었다.
바로 ‘시스템’이란 녀석 때문에.
‘지금 이것도 모두 그 녀석에 의해서 생겨난 걸지도 몰라.’
과거 시뮬레이션으로부터 받았던 도움.
처음에는 그 능력이 너무 고마웠으나,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되었다.
결국 그 도움 역시 ‘시스템’이 의도한 대로 흘러갔다는 것을.
허면 눈앞의 이 여인은 무엇일까?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인물일까?
아니면 시스템의 영향에 포함되지 않는 인물일까?
“대신 조건이 있어요.”
“……?”
“지금 설휘 님의 능력으로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어요. 어서 빨리 극마에 오르셔야 해요.”
“소저.”
설휘의 나직한 목소리에 천미려가 귀를 기울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왜 이렇게 절 도와주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야 저의…….”
“저를 생각해서 도와준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설휘의 재질문에 약간 멈칫하던 그녀가.
“그래요.”
대답과 함께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멀리서 지켜봐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뜻밖의 말이었을까.
그녀의 표정에 의아함이 물들었다.
하지만 설휘는 생각한 대로를 솔직하게 고했다.
“도움을 받는 데 익숙해지면, 그 끝은 항상 좋지 못했습니다. 쉬운 길을 가면 나중에는 그만한 대가를 꼭 치러야 했습니다.”
“…….”
“이 일은 제게 맡겨주시지요. 어렵더라도 혼자서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낭군, 흑마전주의 성격을 아시면 혼자서 움직이는 것은…….”
“내기를 걸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
“죽고 사는 내기에, 살아날 방도가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천미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 설휘를 데리고 빠져나오리라 생각했을 테니까.
“그를 반드시 설득하고 오겠습니다. 그리해서…….”
“…….”
“소저에게 어울리는 남자라는 걸,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녀는 미묘한 표정으로 설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이내 인기척이 들리자, 창가를 박차며 지붕 위로 올라가 버렸다.
“누구냐?”
설휘가 묻자, 곧장 문밖에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곤마 님께 임무를 받아왔습니다.”
설휘는 대충 직감했다.
흑마전주의 동선이 파악된 모양이었다.
***
거대한 복도식 구조의 회랑 중심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정원의 풍취를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흑마전의 사람들로, 다들 고위급 인사들이었다.
잘 가꾸어진 분묘와 조경.
더불어 드넓은 정원에 심어진 인공연못은 화창한 날씨를 더욱 상쾌하게 만들었다.
“캬……. 역시 풍취를 보며 먹는 명주는 정말이지 맛이 일품이군.”
한 중년인이 술잔을 들어 보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거대한 체구에 호걸스러운 눈빛. 하관을 뒤덮은 수염은 마치 범을 연상케 하는 인상이었다.
그가 바로 중원 침공 때 최전선에서 싸운다는 흑마전의 수장. 구대염(具大髥)이었다.
“백화주(百花酒)는 중원에 모르는 이가 없다지요. 백 가지의 꽃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진 명주로, 향기와 약효가 있다고 하여 가향주라고도 불립니다.”
때마침 비워진 잔에 술을 따르던 장한이 입을 열었다.
그가 바로 중원에서 이 술을 가져온, 흑마 1부대장 시명(施明)이었다.
“그래. 시간이 허락하면 가끔 중원에 가서 좋은 술을 가지고 오너라. 천마 제자분들의 권력투쟁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으니…….”
구대염은 잘 차려진 안주 하나를 집어먹었다.
역시나 중원에서 가져온 과일들이라 싱싱하고 맛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뭐 재미난 일은 없느냐?”
구대염이 주변을 둘러보며 묻자, 한 장년인이 고개를 숙였다.
“특별한 소식은 없는 듯합니다. 그건 그렇고 일전의 일로 이제자께서 섭섭하시다고…….”
“쯧. 그분께선 아직도 포기를 못한 모양이군. 그 얘긴 그쯤하고. 부관주.”
“예. 전주님.”
맞은편에 앉아 술상을 같이하고 있던 노인 하나가 예를 표했다.
“……이번 중원 순방에서 재미난 녀석을 데리고 왔다던데?”
“아, 들으셨습니까. 마침 인사시키려 했습니다.”
부관주라 불리는 노인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찌됐느냐?”
그러자 뒤쪽에서 대기하던 수하 한 명이 대답했다.
“준비해뒀습니다.”
“그래, 어디 볼까?”
촤라라라락.
때마침 회랑의 모든 창문이 열리며 드넓은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마전 내부의 정원은 본교에서도 가장 크기로 유명했다. 마교의 주 전력인 곳답게 총단 장로들의 배려가 들어가 있었다.
“읍읍.”
그리고 멀리서 온몸이 묶인 채로 한 남성의 어깨에 들쳐 걸어오는 인영.
검은 천으로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어, 그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알기 힘들었다.
“중원에서 잡아 온 놈입니다. 무당파 일대제자로 추정되며, 상당한 검술을 가진 실력자입니다.”
그 모습을 본 부전주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말에 구대염이 물었다.
“우리 쪽에서 상대할 자는?”
“저기 옵니다.”
때마침 반대편에서 긴 수레에 실려오는 또 하나의 인영.
맞은 편 중원인과는 다르게 천으로 완벽히 밀봉되지 않았다.
그저 나무로 된 판때기에 온몸이 줄로 결박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사내는 척 보기에도 상당히 거구였다.
거기다 외공을 익혔는지 외견상 숱한 고문 자국에도 몸의 균형이 아주 잘 잡혀 있었다.
“저 녀석은 이번에 규율을 어겨 문제가 된 놈입니다. 중죄를 저질러 감옥에 가야 하지만…… 이 기회에 불러냈지요.”
“호오. 재밌는 싸움이 될 것 같구나.”
두 인영을 보던 구대염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회포를 풀 때 가장 재미있는 게 바로 싸움구경이다.
본교의 죄를 지은 중죄인과 중원의 구파출신 중 하나인 무당고수의 싸움.
이보다 흥미진진할 수가 있을까?
“자, 이제 다들 누가 이길 것 같은지 한쪽에 거시게나. 내기에 이긴 자는 많은 돈과 시간. 여자를 줄 것이고. 내기에 진 자는 매일 보초와 순시를 돌 것이다.”
구대염의 말에 회랑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는 흑마대원 출신에 걸겠습니다.”
“당연히 흑마대원 출신이지요. 근본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부분 한쪽으로 쏠릴 때쯤.
“너무 중원인을 무시하는 게 아니오? 듣기로 흑마 2부대장이 저자를 잡는데 상당히 힘들었다던데……. 나는 무당에게 걸겠소.”
한 사내가 목청껏 소리치며 말했다.
그럼에도 대부분 흑마대원에게 쏠렸다.
“그럼 이제.”
모두가 내기를 걸자, 흑마전주인 구대염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둘 다 풀어…….”
그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질때쯤.
사사삭.
때마침 가신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자 밝아졌던 구대염의 표정이 무슨 일인지 급격히 어두워졌다.
“정말 그리 말했는가?”
혹시나 하여 되묻던 그는 가신이 고개를 숙이자 이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건방진. 이곳에 들라 하라!”
알 수 없는 분노의 외침.
그로 인해 밝았던 좌중의 분위기가 빠르게 냉랭해졌다.